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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나처럼 되길 원치 않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대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 사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그녀는 전에도 이미 한 번 나에게 유진의 과외를 그만두라고 종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억지명령에 가까웠지만, 지금의 이야기는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었다. 호소였다. 그토록 떨리는 목소리에 담아낸 간절한 부탁은 나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했다.
"잘 생각해보고...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만약, 돈이 필요해서 과외를 하는 거라면... 원래 받던 금액만큼, 제가 매달 드릴 수 있어요."
"....아, 아뇨.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여 겨우 대답했다. 선영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그녀는 인상이 퍽 험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화장이 지워지고 난 얼굴을 마주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매는 분명 많이 울어본 듯한 선을 가지고 있었다. 손을 들어 닦아주고 싶었지만, 내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울고 있는 여자를 달래주고 싶었다.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면 도리어 화가 낼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둘게요."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한 한 유진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분명히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게 뻔했다. 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유진이랑 언니에게는 제가 말해둘 테니까요. 그럼, 이만."
선영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고개 숙여 내게 인사하고 곧바로 뒤로 돌아 들어가 버렸다. 병원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한참만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계속 생각을 거듭했다.
유진과 선영, 선영과 유미, 유미와 유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 사람이었다. 늘 틱틱거리기만 하지만 은근히 나에게 마음을 주었던 유진이와 유진에 대한 애정만으로 모든 이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선영. 다 큰 딸을 둔 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는 유미...
선영이 했던 말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유진이가 내게 보여준 행동들은 결코 범상치 않았으니까. 만약 이대로 과외를 계속 한다면 언젠가는 선영이 우려하는 대로 나에게 너무 빠진 유진이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런 우려가 들었다.
아주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 내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래. 유진이가 싫진 않았다. 열 여자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어린 여자라면 남자들 누구나 환장한다고 유진이가 그랬듯이..... 내심 아까의 상황에서 선영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선영의 표현대로, 자지 달린 놈들의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렇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그 녀석을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그 후폭풍이 가져올 모든 것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병원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결코 가까운 게 아니었다. 꽤나 오래 걸어야 했고 그 긴 시간 동안 내내 생각한 끝에 마음을 정리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한 번 결정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집에 돌아오니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얼른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석이 집에 들어왔냐? 니 에미 지금 버스 탄다."
엄마였다. 주변이 시끄러운 걸로 보아 바깥인 모양이다.
"여태까지 리사 씨랑 있었던 거야?"
"호호호. 그려. 리사 요것이 어찌나 잘 해주는지 몰르겄다. 저녁까지 아주 잘 얻어먹고 내려간다."
"나중에 내가 리사 씨에게 다 갚아야 될 일이야. 공짜 아냐. 엄마."
"뭐든 간에, 이 녀석아. 암튼 잘해 줘. 우리 리사한테."
세상에.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엄마가 방금 "우리 리사"라고 그런 게 맞나?
"우리 리사?"
"그럼 남의 리사니?"
"남 맞아, 엄마... 대체 얼마나 민폐를 끼친 거야."
엄마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그려. 알긋다. 예린아. 이거 어떻게 끄는 거냐? 그냥 닫으면 돼?"
"제가 끄겠습니다."
휴대전화인 모양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어제만 해도 아들내미 방에 여자 들어와 있다고 못마땅해 하더니 단 하루 사이에 "우리" 리사가 되어버렸다. 낯 두꺼운 우리 엄마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런 엄마의 비위를 완벽하게 맞추고 수행해 낸 리사가 대단한 건지 궁금하다.
전화를 끊고 옷을 벗으려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누구랑 이렇게 길게 통화해요?"
유진이었다.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걸 봐서 이제 다 나은 모양이었다. 목소리도 아까보다 훨씬 괜찮았다.
"우리 엄마였어. 길게도 안 했는데, 뭘. 그나저나 넌 이제 괜찮아?"
"네. 언니가 퇴원 수속하고 있어요. 저녁은 지금 먹으러 가요."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공중전화인 모양이다.
"그래. 몸조리 잘 하구 푹 쉬어. 내일은 학교 가야지."
"아저씨는요?"
"나?"
"예. 학교 안 가요?"
"대학생은 토요일에 수업 없어."
"그러시구나..."
기운 없는 목소리는 아닌데 목소리에 힘이 없다. 어쩐지 무언가 망설이는 태도다. 녀석 답지 않다.
"겨우 그 이야기하려고 전화한 거야?"
"아니요."
"그러면?"
녀석은 한참 동안이나 미적거렸다.
"과외.... 그만 하신다면서요?"
결국 이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나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응. 그래."
대답을 마치고 나서 수화기에서 얼굴을 떼야만 했다. 바락바락 지르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날아와 내 귀를 두드렸다.
"어떻게 나한테 상의 한마디 안 하고 그만둘 수 있죠? 그만 둔다는 거 당장 취소해요!"
"취소 못 해."
"왜요? 왜요! 대체 왜!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아깐 네가 아파서 누워있었으니까... 이야기 못했어. 미안."
"지금은 괜찮다구요. 일어나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러니까...."
"유진아."
녀석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격앙되어 있었다.
"내가 과외를 받고 싶다구요! 내가 과외를 받고 싶다는데 왜 어른들이 멋대로 결정하는 거죠?"
"내가 다른 사람으로 소개해줄게."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난! 나는.....!"
유진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내 마음에 있는 얇은 벽을 때리는 것처럼 쿵쿵 울렸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일까.
".......난 아저씨가 필요한데.... 왜......어른들 마음대로....결정하고...."
울음소리 때문에 유진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한참 말도 못하고 울먹이는 유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미안해. 유진아.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동전이 다 되었거나 녀석이 끊어버린 모양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굳이 모진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마음과 선영의 말대로 빨리 떨쳐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대로 계속 두었으면 유진이는 아마도 내게 더 의지했을 것이다. 내 성격상 그걸 또 거절 제대로 못하고 계속 받아들였겠지. 우유부단하니까. 그러다 결국은 서로 불행해졌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고,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아픈 일이 일어나는 건 원치 않았다.
녀석은 너무 어렸고 나에겐 너무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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