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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퍽-
휙-
"한 번 더!"
몇 번을 매트 위로 굴렀는지 모른다. 대략 서른 번까지는 세고 있었는데, 그 후론 잊어버렸다. 그녀가 가르쳐 준 건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고, 나는 그녀의 앞도 아닌 뒤에서 덤벼드는 처지인데도 번번이 공격 받아 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악이 바짝 오른 나는 사력을 다해 예린에게 덤벼보았지만, 그때바다 번번이 매트 위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신음을 흘려야 했다.
"으으으윽...."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매트에서 굴러다니며 신음하는 날 두고 예린은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녀는 누워있는 내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가워서 움찔거렸지만, 욱신거리는 근육이 진정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예린은 날 칭찬했다.
"처음인데도, 자세가 좋습니다."
"....계속 나가떨어진 것 같은데?"
"몇 번 나가떨어지면 아예 포기하는 녀석들이 더 많습니다. 끝까지 덤볐다는 점, 그리고 손에서 끈을 놓지 않았다는 점을 칭찬하는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끈을 말아 쥐고 있었다. 내 몸을 다 닦아준 예린은 날 데리고 침대로 갔다. 전처럼 마사지를 하는 건가 싶어서 옷을 벗고 엎드리려고 했더니 약을 발라야 한다며 누우란다. 여태까지 엎드려서 마사지는 많이 받았는데, 막상 누워서 있으려고 하니 상당히 뻘쭘했다. 그런 내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린은 근육통 약을 가져와서 내 몸 구석구석 발라주기 시작했다.
"쓰읍.....으윽..."
"처음에는 좀 따가울 수 있습니다만, 참으십시오."
"응. 고마워. 예린 씨."
"감사는 리사 아가씨에게 전하십시오. 저는 그분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뿐이니까요."
"음..."
가만히 누워서 예린을 보고 있자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잘 해야 이십대 초반인 그녀는 대체 무슨 이유로 리사에게 그토록 충성하는 걸까 싶었다. 리사가 내가 알기 힘든 신비로운 배경을 가진 여자라고는 하나, 그래봐야 걔도 이제 막 스물이 지나는 앳된 아가씨일 뿐이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예린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네."
"어, 그러니까... 예린과 리사는 대체 무슨 사이야?"
예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꼼꼼하게 약을 바라다가 약이 담긴 통 뚜껑을 덮었다. 그걸 제자리에 갖다놓고 오더니 이제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마사지를 시작했다. 엎드릴까 싶었는데, 예린은 내가 누운 채로 바로 시작했다.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왜 궁금하시죠?"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글쎄,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잖아. 그러니... 뭔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 보여서 그래."
"대충 짐작은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정확하게 들은 적은 없잖아."
예린은 묵묵히 내 몸을 주물렀다. 그녀의 손아귀 힘은 대단했고, 사람의 근육이 어디가 어떻게 뭉치는 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 번씩 억 하는 소리를 내곤 했다. 그녀는 내 허벅지를 주무르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조용히 뇌까렸다.
"역시, 저희는 보통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거군요."
....그렇게 다니면서도 보통 사람처럼 보이길 바란 거냐고 농담하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얘길 꺼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참았다. 예린은 내 무릎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리사 아가씨의 바람 중 하나는 보통 사람이 되는 거였습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사람을 만나고,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평범하게.... 결혼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파서 병원에 있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병원에서 나가면 하고 싶은 일을 200가지나 적어서 목록으로 가지고 있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학 교정에서 키스를 나누었던 일도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와의 밤도.... 어쩌면 나는 그녀가 꿈꿔왔던 보통 사람과의 연애, 그 열망에 해당하는 거였을까.
"그러기에 아가씨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 컸죠. 저는 그걸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선택된 사람입니다. 덕분에 제 꿈에 대한 준비도 할 수 있고.... 저희 둘은, 그런 사이입니다."
그냥 궁금하던 걸 물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다. 그녀가 마사지 하느라 손아귀에 힘을 주어서 내 팔다리를 주무를 때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았는데,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 허벅지에 손만 올리고 있는 게 의식되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리사랑 예린은... 다른 건 몰라도 평범하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린은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이 표정이 크게 드러나는 얼굴은 아니지만, 같이 지낸 지 꽤 되고 나니 이젠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늘 무겁고 진중한 태도인 예린을 살짝 놀려주고 싶었다. 나 역시 잠시 동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 다 평범하기에는 너무... 예쁘잖아."
"넷?"
처음이었다. 예린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로봇이 아니구나... 싶었다.
"처음 봤네. 예린 씨가 놀란 얼굴. 설마... 처음 들어요? 예쁘다는 소리?"
"..."
"왠지 그럴 것 같아. 예린 씨는 그냥 있을 때도 분위기가 무서워서 아무도 그런 말 쉽게 못 했을 것 같아."
아주 찰나였다. 예린이 입을 벌리고 크게 놀란 얼굴, 아주 잠깐이나마 얼굴을 붉힌 건 정말 지극히 짧디 짧은 일순간이었다. 짙은 선글라스로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 너머의 눈은 아주 크게 떴으리라. 그렇지만 그녀는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아니,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멈추고 있던 손놀림을 갑자기 재개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센 힘으로 마사지를 시작했다.
"아직 훈련이 버틸 만 한가 보군요."
"흐아아아아악! 살려줘!"
예린의 힘센 손목 아래서 꽤 오래 비명을 질러야 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지만, 예린은 쉬이 손에 준 힘을 빼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나는 번번이 예린에 의해 매트 위로 나뒹굴어야만 했다. 그러나 한번씩은, 정말 어쩌다 한 번씩은 예린의 목에 노끈을 거의 걸 뻔 한 적도 있었다. 예린이 날 넘기는 것에 한 번 버티거나 흘려서 손을 풀어버린 뒤, 재차 달려드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예린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지나가는 말로 칭찬 비슷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게 잘 이루어지면 내가 사람을 잘 죽일 수 있다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기쁘긴 했다.
나날이 노끈 사용과 몸싸움에 익숙해지는 나와 달리 문제는 예린이었다. 노끈 사용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나와의 훈련보다는 나가서 전화를 받는 일에 더 열심이었다. 평상시에는 낮은 목소리로 뭔가 대화를 나누지만, 가끔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그런 기색을 별로 못 느꼈는데, 요즘은 예린이 많이 초조한 듯 했다.
"예린 씨. 무슨 일 있어요?"
저녁에 참다못한 내가 물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말해주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추궁해봐야 소득이 있을 리 없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예린은 뭔가 일이 있다며 차를 몰고 산을 내려갔다가 저녁 늦게 되서야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다짜고짜 산을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싶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사실 짐이라고 해봐야 작은 옷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예린은 책상에 종이를 펴놓고 뭔가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게 무슨 내용인지 보고 나서 좀 놀랐다.
"그....그건 무슨 지도...? 아니, 도면이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건물에 대한 도면이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필복이 있는 곳이구나! 그렇지?"
그런데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니라고?"
"네."
"그럼... 지금 그걸 왜 보고 있어? 나랑 지금 산을 내려가서... 녀석을 처치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거 아니었어?"
예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었다. 마음속에서 뭔가 쿵하고 떨어졌다.
"서울은...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산으로 갑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예린 씨는 나한테 약속했잖아! 도와주겠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지금 와서 한다는 소리가 부산이라니. 그게 지금 무슨 말이냐고! 설마 필복이 부산으로 갔다는 소리야?"
나도 모르게 반응이 격해진다.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예린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차분하게 답했다.
"리사 아가씨의 명령입니다."
"뭔 소리야, 대체."
리사? 명령? 그 앙큼한 녀석이 또 무슨 농간을 부리는 거지?
"한석 씨가 꼭 직접 나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 녀석을 거꾸러뜨리는 건 가능합니다. 결코 흔적이 남지 않게....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 버리는 일도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꽤나 잔인한 이야기인데도 예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 점이 더 잔인하다면 잔인하달까. 확실히 예린에게서는 피 냄새가 난다. 단 한 번도 그녀가 누군가를 해하는 광경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와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그녀에게서 풍기는 이질적인 냄새를 맡게 된다.
"한석 씨가 정말 원하신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런 일을 대신해드릴 수 있습니다. 꼭 당신의 손을 더럽혀야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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