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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내 질문을 받은 리사는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그런 동작은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옛 생각이 났다.
"후후. 그거 아세요? 이 연구소는... 반쯤은 오빠 덕분에 만들어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나 덕분에? 어떻게? 난 여기 오기 전까지 이런 연구소가 있다는 걸 알지도 못 했어."
"처음에 오빠 생일 잔칫날 효진 씨와 저, 마리까지 전부 있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리고 연구소의 발단은 오빠 결혼식이었어요. 그때, 효진 씨를 만났어요.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던 효진 씨가 절 발견했죠. 그래서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녀의 고민을 알게 되었어요.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서로 논의하다가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죠."
리사의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이야기 투성이였다. 십여 년 전, 내 생일잔치와 결혼식 때문에 효진이와 리사가 만난 건 알겠는데...
"효진이의 고민? 걔한테도 고민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그게 대체 뭔데?"
"그건...."
그때였다.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하지 마십시오."
선미의 목소리다. 수면실의 입구에 선미가 서 있었다. 아마도 예린이 막고 있느라 못 들어오는 모양이다. 예린이 리사 쪽을 쳐다보자 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문을 막고 서 있던 예린이 비켜서자 선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특유의 걸음걸이로 수면실을 가로질러 오더니 수영이가 자고 있는 머리맡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뭔가 챙기러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선 채로 나와 리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
"효진 님과 지혜 님 사이에서 일어난 일 중에 효진 님이 지혜 님에게 말하지 않고 처리한 사안도 많습니다. 아직 지혜 님도 모르는 일을, 함부로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분 탓일까. 선미의 목소리가 은은히 떨리는 느낌이다. 리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선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알기 힘들었다.
"주제넘게도 대화중에 끼어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리사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네요. 오빠. 제 생각이 짧았어요. 나중에... 나중에 지혜 씨나 효진 씨에게 직접 들으세요. 그게 좋겠네요."
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차마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나도 따라 일어났더니 그녀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손을 내밀어 잡자 리사는 다른 손으로 마저 내 손을 덮으며 조용히 말했다.
"멀리 있을 때는 멀리 있어서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가까이 있으니 더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절 보는 눈, 절 노리는 눈은 너무 많거든요. 오빠에게 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 자주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늘 건강하셨으면 해요."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가 마음에 물결처럼 와 닿는다. 멀리에서, 또 가까이에서... 그녀는 항상 날 보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그런 그녀의 마음에 보답하지 못하는 게 너무 미안했고 미안했지만,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널 노리는 눈이 많다니... 네가 하는 일은, 혹시 위험한 거니?"
"후후. 글쎄요."
리사가 몸을 돌려 나갔다. 그녀를 따라 나설까 하는데 문가에 서 있던 예린이 내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걸 보고 나니 따라갈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게 멍하니 서서 문만 바라보고 한참을 있었다. 리사와 나, 나와 리사는 분명 어떤 접점이 있는 관계인 동시에 이루어지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분명 그녀의 호의 덕분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그녀에게 무언가 기대하거나 기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않기로 했다.
다시 의자에 걸터앉는다. 아라의 등 위에 손을 얹고 들숨날숨에 맞추어 천천히 두드려준다. 그렇게 토닥이다가 나 역시 잠이 들었다. 새벽 일출 전에 누군가 깨우러 오기 전까지, 난 아마도 선영의 꿈을 꾼 것 같다. 아마도라고 말한 이유는 그녀의 얼굴이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몸냄새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오직 얼굴만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다 같이 아침 해를 보러 나가서도, 그 붉은 해 속에 선영의 얼굴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다.
해가 바뀌고 소장도 새로 바뀌었다. 단 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연구소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여태까지 나 소장이 느슨하게 관리해 온 편이기도 하지만 새로 부임한 소장, 그러니까 유진이는 보통 빡빡한 게 아니었다. 새로 부임하는 첫 인사를 그런 식으로 시작한 녀석이니 어련했을까. 1월부터 우리 연구소의 모든 사람들은 일복이 아주 제대로 터졌다.
일단 각 파트의 모든 연구원은 자신의 연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유진에게 보고해야했다. 해당 연구원의 연구내용은 물론 관련 내용의 어지간한 논문과 데이터를 줄줄이 꿰고 있는 유진 앞에서 서툰 주장은 대번에 "개박살"이 났다. 그렇게 왕창 깨지고 나서 다시 제대로 된 주제를 가지고 컨펌을 받기 전에는 연구 착수는 고사하고 연구실 출입조차 금지될 정도였다. 희경이 귀띔하기로는 여직원 휴게실에서는 자기 연구 보고서를 갈기갈기 찢으며 우는 여자 연구원이 있을 정도란다. 남직원 휴게실에는 시간 단위로 꽁초가 수북이 쌓여갔다....
연구소의 불이 꺼지질 않았다. 1월 한 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지난 5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날밤을 새워가며 연구와 자료수집에 매달렸고, 그들을 서포트 하는 게 업무인 총무팀 역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겨울 중 가장 춥다는 소한과 대한이 1월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의 열기 덕분에 하나도 춥지 않았다고 하면 과장이 심하려나. 정말 그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2월이 되어있었다.
2월 1일. 금요일이다.
우리 연구소는 직원 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어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배달시켜서 먹곤 했다. 휴대용 식판에 담긴 밥을 가지고 올라가 자기 연구실에서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강당 한편에 마련한 긴 테이블에서 다 같이 먹곤 한다. 거기에 마실 물이나 후식, 디저트를 준비해 놓는 게 총무팀의 주요 업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희경, 지혜와 함께 식사 전 준비를 하러 내려갔더니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다. 3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의 끝에 유진이 혼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지혜와 희경 그리고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누구 하나 유진에게 말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 몫의 식사를 챙기면서 유진이 있는 쪽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녀석의 앞에는 몇 장의 A4용지가 흩어져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뭔가를 열심히 확인하는 모양이다. 평상시에는 소장실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는 녀석이 오늘은 웬 일일까 싶다. 오늘의 메뉴는 제육덮밥. 뜨끈뜨끈 도시락을 손에 든 난 어쩔까 싶다가 유진의 근처로 갔다. 먼저 자리에 앉은 희경과 지혜이 시선이 날 향하는 게 느껴졌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곤 유진의 앞에 앉았다.
"여기... 앉아도 됩니까. 소장님?"
유진은 고개를 들어 날 힐끔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미 앉았잖습니까. 최. 한. 석. 대리?"
"아, 예. 그래서 양해를 구한 겁니다. 진. 유. 진. 소장님."
처음이야 멋도 모르고 한 대 맞고 시작했지만, 이젠 이쪽도 할 말이 꽤 있었기에 결코 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자를 끌어내어 앉고는 수저를 손에 들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의례적인 인사를 보냈지만, 유진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한 손에는 종이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기계적으로 수저를 움직일 뿐이었다. 저렇게 먹으면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눈에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의 식사다. 맛을 음미한다거나 반찬을 골라 먹거나 할 것도 없이 대충 반찬을 숟가락으로 끌어가다 밥에 비벼 넣고는 숟가락만을 써서 퍽퍽 퍼먹고 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
"이번에 도시락 업체를 바꿨습니다. 지난번 업체는 국을 따로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번 업체는 그렇게 해서 직원들 호응이 좋습니다."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유진은 다 씹어버리며 묵묵히 밥만 먹었다. 내가 늦게 먹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먹는 속도가 더 빨라서 거의 비슷한 정도로 식사를 마쳤다. 유진이가 휴대용 식판을 치우려고 하기에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소장님."
그러자 유진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녀석이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말했다.
"소장님.....?"
"네, 소장님 무슨 문제라도..."
날 빤히 쳐다보던 유진은 식판을 집어 던지다시피 내게 안겼다. 그리고는 먼저 휭하니 가버렸다. 녀석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보고 있자니 지혜가 다가와 내게 물었다.
"유진이랑... 아니, 소장님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이야기는 무슨.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대답조차 안 하던데."
그러자 지혜는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예전에는 몰랐는데 성질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야. 지금 사람들이 전부 다 소장 욕하느라고 일을 못 할 지경이야."
내가 욕을 먹는 게 아닌데도 꽤 신경 쓰이고 기분이 안 좋았다. 그렇다고 딱히 유진을 두둔하자니 녀석 하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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