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09화 (30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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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강당에서 제법 떨어진 위치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사람들의 주된 이야기 주제는 단연 롯데에 새로 부임한 외국인 감독이었다. 나는 야구를 잘 몰라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비밀번호 어쩌고 하면서 지난 몇 년간의 내리 부진을 면지 못했던 롯데 야구팀을 성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새로 온 야구 감독은 외국 사람인데, 패배를 거듭하는 야구팀의 체질을 바꿔줄 구세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모양이다. 물론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잖아 있지만, "히딩크 하는 거 기억 안 나나?"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쏙 들어간다.

그래, 히딩크... 참 대단했지. 2002년 월드컵. 그 뜨거웠던 여름, 난 선영과 함께 내당리에서 응원전에 참여했다.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처럼 어마어마한 인파는 못 되어도 내당리 사람은 죄다 나온 몹시 큰 자리였다. 읍사무소에서 설치한 대형 화면에서 태극전사들이 뛰어다녔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라는 선영의 등 뒤에서 칭얼거리다가 잠들어 있곤 했다. 골이 들어가면, 나는 선영은 물론 아라까지도 한꺼번에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 전이라니. 시간은 무심하게 빠르고 사람은 떠나고 없다. 지금 내 곁에는 그때 함께 있던 선영이 없고 오직 아라 만이 남았다.

여기는 수면실 중에 하나였다. 내일 아침까지 행사가 진행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날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법. 각 사무실에 자리를 꾸며 몇 개의 수면실을 마련해두었다. 손님들이야 대개 자정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나서 돌아갔지만 연구소 직원들과 그 식구들은 내일 아침 해돋이까지 할 예정이었다.

좁은 간이침대에 두 아이가 뉘여 있었다. 수영이와 머리를 맞대고 쿨쿨 자고 있는 아라의 등을 가만히 토닥거려 본다. 평소 아홉 시면 잠드는 녀석이 열두시까지 마음껏 먹고 떠들며 놀았으니 아마도 내일 아침 늦게까지 푹 잠들 테다. 이 녀석이 해맞이를 하는 건 무리겠지. 선미는 지금 지혜를 챙기러 나가 있었다. 지혜는 오늘 술이 제법 과하여 다른 방에서 쉬고 있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쳐다보다. 이중창 너머 비춰지는 새까만 하늘에 두둥실 휘황찬란한 달이 떠 있었다. 보름에서 많이 기울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형형한 빛을 내뿜는 달이다. 연구소 주변은 다른 건물이 별로 없고 바로 뒤는 산이었기 때문에 인공적인 불빛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달빛이 온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는데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 아이가 아라인가요?"

고개를 돌려보니 리사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예린이 서 있었다. 안 그래도 까만 옷에 까만 선글라스까지 낀 그녀는 어둠 속에 거의 녹아 들어있었다. 십여 년 전,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도 그냥 특이하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고나니 그쪽 계열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예린은 문가에 서더니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보초처럼 서 있다. 리사만 방을 가로질러 침대 가까이 왔다.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 간이 의자를 꺼내어 리사에게 권했다.

"응. 그래. 이름을 알고 있구나?"

"연구소 직원들의 아이들은 거의 다 알고 있어요. 역시 선영 씨와 오빠를 닮아 귀엽게 생겼네요. 아역 모델을 시켜도 되겠어요."

"....아니, 그쪽은 내 딸이 아니고 이쪽이 내 딸이야."

귀엽다니. 혹시 수영이를 보고 그러는가 싶어서 아라를 가리켰다.

"후후. 알아요. 저 아이는 딸이 아니라 남자애잖아요. 김지혜 씨 아들 수영이."

방금 리사가 말했듯이 그녀는 이 연구소의 이사이기도 하니 직원의 가족에 대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묘하게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나에 대한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과한 생각일까.

"수영이랑 같이 있을 때 아라 보고 귀엽다고 말한 사람은 아마도 네가 처음 일거다."

"그런가요? 그렇지만 빈 말이 아니에요. 제가 아는 분 중에 방송국에서 일하는 분도 있는데 다리라도 놔드릴까요?"

"아냐. 사양할게. 그런 걸 감당할 자신 없으니까. 게다가 이 녀석이 그런 곳에 가면 엄청난 민폐만 끼치고 다닐 거야. 뭔가 부셔먹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리사는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나자 리사는 날 빤히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뚜렷한 눈빛이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나도 모르게 조금 움찔했지만, 서늘한 그 손의 감촉이 나쁘진 않았다.

"괜찮으세요? 붓지는 않았어요?"

다짜고짜 내 뺨을, 그것도 주먹으로 치고 달아난 뺑소니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꽤 섞인 말투였다.

"어? 어... 그 정도는 아니야. 아까 얼음찜질도 했으니까 괜찮아."

"이럴 줄 알았으면 유진 양을 연구소가 아니라 저희 회사에 스카우트할 걸 그랬네요. 이렇게 손이 매울 줄 알았으면 말이죠. 유진 양은 대체 왜 그랬을까요. 혹시 오빠, 유진 양에게 돈 떼어먹은 거 있어요?"

그녀의 회사가 대체 뭐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주먹질 잘하는 사람을 스카우트해야 하는 걸까.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유진의 주먹에 제대로 맞은 뺨이 여전히 얼얼한 건 사실이었다. 녀석은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짐정리를 해야 한다며 연구소를 나가버렸다. 아무래도 뺑소니 범으로 신고해야 할까 싶다.

"너무 반가워서 그랬겠지. 너무, 지나치게."

"그럼 저도 반가운데... 한 대 쳐도 되나요?"

"얼마든지."

"여전하시네요."

리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 역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야말로. 이게 얼마만이지? 십 년 만인가?"

"오빠는 십 년 만이겠지만, 전 아니에요. 오빠는 모르겠지만, 전 오빠 결혼식에 갔었어요. 그러니 이제 칠 년 만인가 그렇죠."

조금 놀랐다. 내 결혼식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만 왔었기에 온 사람의 면면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리사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왔었다니...

"정말?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그러자 리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목소리가 좀 낮아졌다.

"제가 좋아하는 남자가 결혼한다는데 그 안까지 들어가 축하할 용기는 없었나 보죠. 그 앞까지 가는 게 고작이었나 봐요."

"아...."

내가 다 부끄러웠다. 그녀와 난 분명 서로 좋지 않게 끝나긴 했지만, 은근한 수준까지는 분명히 갔었던 사이다. 육체적으로는 갈 때까지 간 거고... 내 질문이 너무도 철없게 느껴져서 미안했다.

"그리고... 오빠에 대한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전 전혀 오랜만이 아니에요."

"나에 대한 소식? 대체 어떻게..."

리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머리를 귀 너머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

"어머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고 있었거든요. 요새는 좀 뜸하지만 적어도 한두 달에 한번 정도는..."

"우리 엄마랑? 왜...."

"오해하지 말아요. 오빠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에요. 오빠 어머님은 뭐랄까 .마치 저희 어머니처럼 느껴져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편해지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리사와 우리 엄마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초면부터 대번에 죽이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설마 그때 이후 지금까지 줄곧 연락하고 지냈단 말인가.

"그래서 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자연스럽게 오빠 이야기도 듣고 아라 이야기도 듣고 그랬어요."

"그랬구나... 그럼 나한테 연구소에 가라고 권한 사람도...."

"네, 저였어요. 오빠가 그렇게 폐인처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싶었죠. 어머님은 오빠와 아라가 아예 내당리를 떠나 아픈 기억을 빨리 털기 원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님이 돈을 보내셔서 이곳에 아파트를 마련했죠."

"그래... 덕분에... 덕분에 많은 것을 잊을 수 있었어. 많은 것을...."

부산에 오고 나서의 일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라는 수영이의 만남을 통해 친구를 얻었다. 선미의 등장으로 육아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 연구소에서 만난 지혜, 그리고 그녀와의 뜨거운 시간들.... 그 와중에 하나씩 잊혀져간 선영에 대한 애틋함까지도. 이 모든 것이 리사의 안배였을까. 난 대체 리사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아니면 화를 내야 할까.

"선영 씨의 일은... 참 안 됐어요. 그리고 그 아이도.... 그때 가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오빠."

리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목이 멨다. 내 부주의함으로 이 세상을 떠난 그녀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와 나의 아이도... 선영의 상실을 내게 위로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게 아니겠지만, 날 위로하려고 하는 소리겠지만... 그 소리가 전부 날 향한 비수가 되어 날 아프게 한다. 내가 죄인이기에. 내가 죽을 놈이기에.

"미...미안, 리사야. 지금은 괜찮아. 그러니...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해."

왼손을 들어 빠르게 눈가를 훔쳤다. 눈물은 이미 맺혀버렸지만, 흐르게 놔둘 순 없었다. 리사는 고맙게도 고개를 돌려 아라 쪽을 보았다. 날 못 본 척해주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도 아이는 참 좋아하는데...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시기를 놓쳐서 제 아이가 아직 없네요. 벌써 서른인데도 말이죠."

"조카도 없어?"

"마리가 결혼해야 제게 조카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걔는 남자보다 자전거에 더 관심 있어요. 지금쯤 유럽 어딘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을 거예요. 명색이 이 연구소의 이사인데도 당최 한국에 붙어있지 않으려고 해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세 번째 이사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마리였단 말인가.

"마리가 이사? 그렇다면... 너와 마리, 그리고 효진까지. 그렇게 세 명이서 이 연구소를 만들었단 말이야? 그럼 내 취업에 대해서 승인한 사람이..."

"저예요. 저는 어차피 마리의 대행자이기도 하니까 저 혼자서 이사회의 두 표를 담당합니다. 혼자서 과반수죠."

리사의 말장난에 웃을 수만은 없는 게 더 큰 궁금함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셋이 아는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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