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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리사의 등장은... 그래, 어쩌면 난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부산이라는 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를 통해서 온 연락이라는 점에서 난 제일 먼저 리사를 떠올렸었다. 막상 연구소에 도착해도 리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어 잠시 잊고 지냈을 뿐이다. 그래서 리사가 강당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놀랐다기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유진이라니.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유진이가 어떤 아이인가. 선영이가 자신의 몸을 내게 주어가며 지키고자 했던 여자아이다. 서울에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졌던 선영을 구원했던 꼬마아이였다. 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수 있기를 바라며 선영이 내게 비밀과외를 요청했던... 바로 그 아이다.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선영이 불쑥 나타나 함께 웃어줄 것만 같다. 날 부를 것만 같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물론 그때의 유진은 아니다. 그때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열일곱 살의 여고생은 이제 스물일곱... 그래, 그 나이겠구나.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키는 그때랑 비교해서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는 좀 더 기른 것 같다. 가슴은 제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꽤 유려한 곡선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하얀색의 드레스를 입은 리사와는 달리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게 또 녀석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등 뒤 파임도 심하고 다리 옆 슬릿이 길게 나 있어서 꽤나 핫한 의상이었다. 젖살이 빠진 얼굴은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느낌은 그대로였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처럼 생긴 얼굴과 그런 표정은 여전했다. 전에는 없던 가느다란 은테 안경이 녀석의 차가운 이미지를 더 증폭시키고 있었다.
연단 위에 있던 나 소장과 가희가 일어나 리사를 맞이했다. 리사와 유진은 그대로 연단으로 올라갔다. 마이크가 나 소장에게 넘어갔다. 그는 리사를 가리키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정말 모시기 힘든 분을 모셨습니다. 부경지역사랑연합회 회장님이자 저희 연구소 이사장이신 김리사 양입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리사는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누가 보면 연예인이라도 온 줄 알 정도로 열렬한 환영이었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뭔가 꽤 길고 복잡한 단체이름이 리사 이름의 앞에 놓여있었던 것 같다. 역시나.... 리사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여자였다. 십 년 전에 리사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뭐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녀는 내게 크게 실망했고, 그 실망의 원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이제 그녀를 다시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나 소장은 거듭하여 리사에게 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유진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기는 아마 오늘 다들 처음 보는 분일 겁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가장 뛰어난 학생이며 이제는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분입니다. 아울러 오늘로 물러날 저를 대신하여 우리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아주실 진유진 박사입니다."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 서른도 되지 않은 아가씨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새로운 소장이 되었다니 놀랄 만도 하다. 나 소장이 리사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리사는 앞으로 천천히 나섰다. 하얀 드레스가 그녀의 늘씬하면서도 굴곡 있는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방금 소개받은 김리사입니다. 연구소에 적을 두고는 있지만, 워낙 연구소 분들이 알아서 잘 하시는 데다가 제가 워낙 바빠 발걸음을 못 하고 있었네요.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 괜히 또 번거롭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염려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렇게 불량하게 출근한다고 해서 절 자르지는 못하시겠죠. 그쵸, 소장님?"
그녀의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힘이 있었다.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기에 그녀가 가볍게 던진 유머에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특히 나 소장은 아주 허리를 꺾어가며 크게 웃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좀 잦아들고 나서 리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제가 여기 굳이 참석한 이유는 방금 나소장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새로운 소장님에 대한 임명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다소 갑작스러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직을 수행하기에 너무 젊고, 또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받은 교수 초빙을 애써 물리치고 이곳으로 와주셨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네요. 다시 한 번 환영해주십시오. 진유진 양을."
리사는 유진에 대한 칭찬과 지지를 자연스럽게 표시했다. 박수 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진을 향했다. 그러나 녀석은 특유의 무표정함으로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누굴 찾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리사는 유진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그럼 신임 소장님의 각오 한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유진 양? 아니, 이제는 진 소장님이라고 불러야겠지요. 한 말씀 해주시겠어요?"
유진은 리사가 내민 마이크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그걸 받아들고 스탠드에 끼웠다. 녀석에게는 좀 높은 모양이었다. 중간에 바를 조정하여 살짝 낮춘다. 그리고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딱히 할 말 없습니다. 나 교수님이 저한테 사기를 치셨어요."
순간 엄청난 침묵이 강당을 뒤덮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아주 쏴 해졌다. 방금 리사처럼 웃으면서 한 유머도 아니고 무표정하게 혹은 약간의 짜증이 섞인 유진의 말투는 뭐랄까. 조금 가시 돋아 있는 게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사는 가볍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 정도로 나 소장님이 유진 양을 아끼는 모양이죠. 그래도 어떠신가요. 저희 연구소 시설은 훌륭하지 않던가요?"
"돈은 제법 쓰셨더군요. 여기 있는 돌대가리들이 그걸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유진의 명백한 적의가 연단에서 뿜어져 나와 사방을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초대 손님들이야 그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이지만 연구소 사람들은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도 이미 한 번 겪어봤지만... 다들 석박사들이라 자신이 하는 연구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꽤 강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놓고 "돌대가리"라고 일갈하는 유진이니 좋은 시선을 받을 리 만무하다. 유진의 말은 이어졌다.
"비행기로 오는 동안 심심해서 이곳에서 여태까지 연간 보고서로 제출한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한심한 수준이더군요. PPT의 책임 연구원 성준모 씨. 어디 계시죠?"
"네, 네?"
뜬금없는 호출에 저쪽 테이블에 있던 성준모 책임연구원이 손을 들었다. 유진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5년 전부터 마이크로칩 임베디드 유니버설 모터를 연구하고 계시더군요. 고주파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 모터가 안정적으로 구동된다는 점은 높이 사지만 그게 답니다. 5년이나 연구하셨다는데 그게 끝이라고요. 원격제어를 위한 프로토콜이나 확장성 API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어요. 3년 전 헬싱키 공과대학 제프리 교수가 발표한 임베디드형 프로토콜 랭귀지가 있습니다. 해당 논문을 확인한 후 저에게 페이퍼를 제출하십시오."
"네? 네..."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서는 성 연구원이 어린 여자애의 지적에 쩔쩔매는 모습이 자못 불쌍할 지경이다. 유진은 또 다른 사람을 호출했다.
"CPT의 책임연구원 박상돈 씨.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입니다."
"혼성궤도함수 개념을 도입해서 전자궤도함수의 상호 반발을 이끌어 내는 연구를 하고 계시더군요. 의도는 좋습니다만 2년 전 인터내셔설 케미컬 세미나에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팀이 발표했다가 이미 개박살난 이론입니다. 이온단이 배위하여 혼성궤도함수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연구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연구비 그만 까먹고 분자모형 연구에 대한 것부터 다시 공부해서 저한테 새로운 연구과제 제출하십시오."
박상돈 연구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한마디 반박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유진은 그 후에도 각 파트의 책임 연구원들의 이름을 호명한 뒤, 그들이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가멸찬 지적을 던졌다. 좀 더 조사하라는 PPT의 연구과제를 제외하고는 CPT, IPT, APT의 연구과제들은 유진의 표현대로 "개박살"이 났다. 뒤이어 책임 연구원 보다 아래인 선임 연구원의 연구 주제까지 읊으려드는 유진이었지만, 그에 앞서 리사가 마이크를 가져갔다.
"자, 다들 보셔서 알겠지만, 진 박사님의 연구에 대한 열정이 이 정도랍니다. 다들 박수 한 번 보내주시죠."
멍하니 있던 청중들이 황급히 박수를 쳤다. 마이크를 뺏긴 유진은 심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리사에게 팍팍 쏘아 보내고 있었지만, 리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사장의 권한으로 말씀 드립니다. 복잡한 연구에 대한 건 오늘 하루,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모두 내려놓으시고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리사의 선언에 기운을 얻은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순식간에 파티 분위기가 되었다. 아마도 유진의 독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한순간에 폭발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한쪽에서 대기하던 뷔페 업체의 파견인원들이 음식을 각 테이블로 나르기 시작했고, 악단은 연주를 시작했다. 준비했던 서비스가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나는 연단으로 올라갔다. 유진과 리사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다가간다. 한발 한발 가까워질수록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무어라 말을 걸 것인가. 반갑다고 해야 할까.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예뻐졌다고 해야 할까.
"오빠. 오랜만이군요."
리사가 날 먼저 발견했다. 유진이는 내게서 등을 돌린 위치였기에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으니 자못 당황스러웠다. 너무 오랜만이었고, 너무 급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전혀 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만나야 하다니. 겨우 심호흡을 하고 첫 마디를 떼어본다.
"그래. 리사구나. 그리고 유진이도..."
살짝 찡그리고 있던 유진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녀석은 날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꽉 쥔 주먹이 뭔가 불안하다.
"이 나쁜 새끼!"
유진이가 휘두른 주먹이 내 뺨을 강타하는 순간까지도, 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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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크리티컬 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