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02화 (30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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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12월의 마지막 주를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원래 월말이 바쁜데 거기에 연말이 겹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주 월요일, 올해의 마지막 날에 그날 연구소의 최대 행사가 계획되어 있었다. "HAEL의 밤"이라고 명명된 행사는 우리 연구소 사람들은 물론이고 직원들의 가족, 업체관계자들, 부산 지역의 유지들이 모두 초청되는 아주 큰 규모의 행사였다. 초대 손님만 오백 명에 달한다. 연구소 2층에 있는 대강당이 왜 그렇게 쓸데없이 큰가 항상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의문이 풀린 것과는 별개로 지금 내가 죽을 맛이다.

"최 대리! 우편발송은 다 끝났죠?"

눈에 핏발이 선 희경이 날 향해 소리쳤다. 요즘 칼퇴근은 고사하고 몰려드는 업무에 치여 교통사고가 날 판인지라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 카랑카랑했다. 평소 같으면 "최 대리님"이라고 불렀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모양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빠릿하게 대답했다.

"네, 아까 오전에 전부 보냈습니다."

"그럼 빨리 가서 행사진행업체랑 외식업체 계약 확인하세요. 외식업체는 그게 어디더라?"

"삼화 뷔페입니다만..."

"그래요. 아까 거기 상무가 전화 오더니 주류 단가를 조정할 수 없냐고 했었어."

"에? 단가는 이미 다 맞춘 거 아니었나요?"

희경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 몰라. 그러니까 빨리 전화해서 이야기해보라고. 괜히 돈 더 받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아봐."

"네!"

명함첩을 뒤져 삼화뷔페 전화번호를 찾았다.

"상무라... 상무라...아, 이 사람이구나."

번호를 누르자 신호가 갔다. 뚜루루루루- 그리고 연결되었다.

"아, 이 상무님? 안녕하세요. 저 오토연구소 최한석이라고 합니다."

우리 연구소의 정식 명칭은 휴먼오토엔지니어링랩, 줄여서 HAEL이었지만, 이렇게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긴 줄임말의 한글 발음도 좀 이상하다. "핼"인데... 이게 "헬(HELL)"과 발음이 비슷해서 글로 적을 때는 HAEL이라고 써도 말로는 그렇게 잘 쓰지 않는다. 말로 할 때는 짧게 줄여서 휴먼연구소 또는 오토연구소라고 부르곤 했다. 뭔가 온라인 게임이라도 연구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고, 최 대리님. 이제 전화 주셨군요."

호들갑 떠는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니 슬슬 불안하다.

"방금 주임님한테 들었는데 뭐 단가가 안 맞다고요? 지난번에 저랑 계산 다 끝나고 선금까지 드렸잖아요."

어깨와 머리 사이에 전화기를 끼우고 서류철 중에서 해당 업체의 계약서류를 찾았다. 눈으로 훑어보며 한 번 더 점검한다. 예전에도 우리 연구소와 같이 일했던 업체고 단가도 저쪽에서 부르는 대로 - 물론 100%는 아니고 좀 깎았지만, - 잘 쳐줬다.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 그게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날이 대목이 아닙니까. 부산 사백만 인구가 죄다 술 마시는 날이라고요. 아마 롯데가 우승하는 날이랑 꼴찌한 날 다음으로 술 많이 마시는 날이 그날일 겁니다."

"그래서요?"

"일이 그렇게 되다보니 저희가 계약한 주류업체가 강짜를 부리네요. 어디 보자... 연구소 식수인원이 오백 명이고 인당 소주 세 병으로 계산해서 천오백병 하셨잖습니까? 맥주는 백 박스구요."

"그랬죠.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니까요. 맥주는 문제가 없는데 주류도매상에서 그 전날까지 줄 수 있는 소주가 오백 병뿐이랍니다."

오백 명이니 일인당 한 병인 셈이다. 오백 명 중에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니 부족하지 않을 법도 하지만 이쪽 인간들이 마시는 술은 보통 레벨이 아니었다. 술에 무슨 웬수라도 진 것 마냥 콸콸 들이 붓는 데다가 한 번 시작한 술자리는 동이 터와야 끝난다. 참고로 이 행사는 전날 밤 열시에 강당에서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 연구소 옥상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보는 걸로 끝난다. 말 그대로 밤새도록 마신다는 소리다. 그러니 오백 병 가지고는 택도 없다.

"에엑? 그럼 인당 한 병 밖에 안 되는 거잖아요. 여기 분들 술 드시는 거 장난 아닌데..."

"아, 알죠. 저희도 잘 알죠. 여름에 저희가 체육대회 지원했을 때도 인당 세 병이 뭡니까. 인당 다섯 병은 더 들어갔는걸요. 그때도 술 안 떨어지게 대느라 엄청 고생해서..."

"그걸 아시는 상무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곤란하죠."

"그래서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다른 방법이요?"

"예. 저희가 계약한 다른 업체 중에서 전통주 다루는 곳이 하나 있거든요?"

"전통주라니..."

"전통소주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부족한 물량을 어떻게 전통주로 하실 생각 없냐 이겁니다. 원래 주류업체는 제가 어떻게든 달래어 천병까지는 수량 맞춰보겠습니다. 그럼 전통주 오백병만 같이 주문하시면..."

전에 와서 계약할 때는 또 이용해줘서 고맙다고 굽실굽실하더만 이제 와서 이런 소리라니... 골치가 아팠다. 행사가 당장 다음 주다. 말이 좋아 다음 주지 지금이 목요일이니 금, 토, 일, 월. 나흘 후가 행사란 말이다. 이제 와서 요식업체를 바꾸거나 다른 구매처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시점이다. 어떻게든 이쪽을 잘 달래야 했다. 골치가 아파진 난 이마를 짚으며 물어보았다.

"전통주 단가가 어떻게 되죠?"

"3,950원입니다."

대뜸 나오는 소리에 골머리가 아프다.

"켁. 그러면 단가가 소주의 네 배가 넘잖습니까. 그걸 오백 병이나 사라니... 우리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그렇죠. 무슨 술만 먹다 잔치 끝낼 일 있어요? 아니면 맥주를 더 늘릴 수 없어요?"

"아이고, 말도 마십쇼. 안 주겠다고 버티는 애들 어르고 달래서 맥주도 초기 계약 분만큼만 딱 확보했거든요. 대신 저희가 요리 다섯 종 정도 서비스로 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최 대리님. 저희 사정 좀 봐주십시오. 제가 마음 같아서는 소주공장이라도 가서 업어오고 싶지만요, 그게 쉽지 않고, 또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전통주가 참 좋습니다. 소주랑 도수는 비슷한데 훨씬 부드럽고요. 오백 병 하셔봐야 금액도 이백이 채 안 됩니다. 숙취도 없고요 무엇보다도..."

냅두었다가는 한참이나 신세한탄을 할 것 같았다. 얼른 그의 말을 끊었다.

"아아, 알았습니다. 일단 이건 비용이 증가하는 거니까 제 단독으로는 결정하기 어렵네요. 윗분과 상의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주문 들어가야 한답니다."

"알았습니다. 바로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팀장인 지혜와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들고 사무실을 둘러보았지만, 각종 청구서와 사람 명단을 들고 끙끙거리는 희경뿐이었다. 희경에게 지혜의 행방을 묻자 그녀도 알지 못했다. 전화기를 들고 지혜의 핸드폰 번호를 눌러보았지만, 통화중이었다. 일단 사무실을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싶어서 복도 끝에 있는 여직원 휴게실로 가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몸을 돌려 복도를 따라 걸어가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총무팀에서 소형 자재를 두는 창고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쪽을 향해 걸어가자 지혜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응...응...그래.... 응... 그랬구나..."

몸을 돌리고 있어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싶어 문을 닫았다.

"그래, 그래... 알았어. 엉... 그래, 엄마도...."

지혜는 휴대폰의 폴더를 닫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난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누군데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그래?"

"꺅-"

깜짝 놀란 지혜는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몸을 돌린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석이잖아. 깜짝 놀랐어."

"무슨 통화인데 그렇게 숨어서 해? 뭐야, 나 말고 딴 남자 있어?"

지혜의 얼굴은 뭐랄까. 복잡한 심경처럼 보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날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딴 남자? 후후... 그래, 있지."

"엑? 진짜야?"

"누구겠어?"

"나야 모르지. 그렇게 다정하게 통화할 정도의 남자가 내가 어떻게 알아."

"후후후. 바로 수영이였답니다!"

"수영이?"

그러고 보니 방금 엄마가 어쩌고 한 것 같다. 하긴 수영이가 남자였지... 항상 여자 옷을 입고 있고 생김새가 그래서 나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 녀석이 선미에게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그랬대. 그래서 전화를 한 거야...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남들에게는 참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지혜에게는 남다른 일이었다. 그녀의 아들인 수영은 어린 시절부터 당한 지속적인 폭력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아이였다. 남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본인의 남성성까지 거부하는 아이였다. 그나마 지금은 좀 나아져서 다른 사람에게 약간의 반응이라도 보이지만 정작 제 엄마에게는 절대로 곁을 허락하지 않는 아이였다. 오죽하면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아이를 봐주어야 할 정도인데... 그런 아이가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전화를 했으니 지금 지혜가 눈물을 글썽거릴 만도 했다. 난 손을 뻗어 지혜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며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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