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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정한 톤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때 지혜가 날 쳐다보며 말했다.
"헤에... 후후. 한석아. 방금 들었지? 선미 씨가 날 어떻게 호칭하는지 말야."
호칭...말인가? 안 그래도 전부터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한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들었어. 지혜 님이라니... 선미 씨는 가끔 보면 말투며 행동이 참 신기해요. 그거 알아요?"
"모시는 분이니 경칭을 사용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혜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급여는 효진 님에게 받고 있지만, 제가 모시는 대상은 지혜 님인걸요."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란 식으로 말하는 선미에게 뭔가 반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난 겸연쩍게 웃으며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하하. 선미 씨가 나온 학교인가? 거긴 뭔지 모르지만, 교육이 정말 엄한 모양이다."
"저희 아카데미의 교육이 꽤 엄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많이 마시지 않기도 하거니와 선미는 어떤 경우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술기운도 알딸딸하게 들겠다, 늘 한결같이 곧은 선미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조금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난 테이블 위로 몸을 조금 드리우고 말했다.
"선미 씨.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말씀하십시오."
"솔직히 말해줘요. 그렇지만 대답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조금 곤란한 질문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겠습니다."
난 조금 망설이다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지혜의 손목을 잡았다. 지혜는 알코올이 살짝 들어간 눈빛으로 이게 뭐냐는 식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손을 빼진 않았다. 그렇게 잡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선미를 향해 물었다. 약간 주저되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지혜랑 나랑... 그런 사이라는 거, 알고 있었죠?"
선미의 표정은 여전했다. 아주 무표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환히 웃는 표정도 아닌 딱 중간의 표정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관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와 달리 지혜는 살짝 사레가 들린 모양이다. 그녀는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선미 씨를 약간 골려주려고 꺼낸 이야기인데도 그렇게 정색으로 대답하니 좀 그러네요."
"서른이 넘은 남녀가 일주일에 서너 번 밤마다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데,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보는 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이 집은 그다지 방음이 잘 되는 구조가 아닙니다."
"헙... 그것참... 흐음. 음...."
"그리고 아까 전화하실 때도... 아, 이건 아닙니다."
속으로 굉장히 뜨끔했다. 그렇지만 애써 태평한 표정을 지으며 선미에게 물었다. 이미 이판사판 합이 육 판에 공사판까지 간 터라 뒤로 물릴 수도 없는 대화로 치닫는다.
"선미 씨도... 성인이니 이해...하겠지요?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줘요."
내 변명을 들은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사이는 효진 아가씨가 미리 귀띔을 해주었기 때문에 미리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달까요."
"효진이가? 대체 무슨 소리를..."
"예전에 한석 씨를 사이에 두고 효진 아가씨와 지혜 님이 쓰리썸을 하셨다고..."
"에엑?"
그런 이야기까지 했단 말인가. 얼굴의 핏기가 싹 빠지고 그 대신 귓불에 온몸의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지혜는 얼굴 표정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맥주 캔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선미의 폭탄발언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효진 님은 만약 한석 씨가 다시 쓰리썸이 하고 싶다고 해도 자신은 지금 바빠서 곤란하고 일단 저보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푸웁!"
결국 지혜는 마시던 맥주를 테이블 위로 뿜고 말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혜는 자신이 가져오겠노라며 나보고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런 다음 행주를 가져와 테이블 위를 닦았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어 선미 쪽을 보지 못하며 투덜거렸다.
"효진이 이 기집애는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진짜...."
지혜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나 역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효진의 원래 성격과 선미의 말투를 보아 저건 절대로 농담이나 뻥이 아닐 게 확실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선미에게 물어보고 말았다.
"선...선미 씨. 선미 씨는 그런 지시도 수행합니까?"
그러자 선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날 쳐다보았다. 늘 그렇듯이 농담하는 얼굴은 아닌 게 분명하다.
"저희는 모든 형태의 서포팅을 담당하는 게 목표입니다. 성적인 서비스도 예외는 아닙니...."
그 순간 지혜가 내 등짝을 후려쳤고 불의의 공격에 당한 내가 소리 질렀기 때문에 선미의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지혜의 째릿째릿한 눈빛을 받고 우리는 대화의 주제를 다른 걸로 바꾸었다. 그렇게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자정이 될 때쯤 술이 모두 떨어졌다. 먹던 것을 깨끗이 정리한 선미는 우리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불을 모두 끄고 나서 지혜의 손목을 잡고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일단 거실 소파에 내 자리를 깔아두고 거기서 자는 척을 일단 한 다음, 모두가 잠든 새벽이 되어서야 안방에서 자고 있는 지혜를 올라타곤 했었다. 그러곤 다시 아침이 되기 전까지 거실로 돌아갔었다. 아이들이 볼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선미가 신경 쓰여 그랬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뻔뻔하게...."
"그래서, 안 할 거야?"
".... 안 한다고는 안 했어."
지혜의 몸과 한데 엉케 침대로 들어갔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석아."
"응?"
"너 혹시... 선미 씨랑 하고 싶어?"
입에 물고 있던 지혜의 유두를 살짝 깨물고 나서 대답했다.
"아까부터 자꾸 왜 그래? 설마 질투?"
"아니, 질투는 무슨... 그치만..."
"후후. 하긴 선미 씨라면 내가 하자라고 했을 때, 네, 알겠습니다. 라고 일단 옷부터 벗어서 차곡차곡 개어놓을 것 같은 이미지이긴 해."
"뭐얏!"
지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슴가슴 공격을 시전했다. 그녀의 푸근하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은 가슴 사이에 끼인 채로 취소와 항복을 거듭 외쳤고, 그제야 그녀의 가슴을 벗어나 다리 사이를 공략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방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렇게 마음껏 서로에게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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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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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세상 좁군요."
"무슨 일입니까?"
"나 소장이 자기 후임자를 추천했는데... 한 번 보세요.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죠?"
"...그 아가씨군요."
"심지어 여기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해외에 있는 사람을 추천했는데 하필 이 아이라니. 사람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건가 봐요."
"......"
"이 아이는 지금 오빠가 연구소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아마 모를 겁니다.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한석 님에게 최근 접촉한 사람은 연구소 사람들 이외에 박선미라는 그 메이드뿐입니다."
"선미? 효진 씨의 전속이던?"
"네."
"그녀가 왜 거기에 가 있죠?"
"원래 작년부터 지혜 씨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의 보육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효진 씨랑 지혜 씨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게 맞나 보군요. 그때도 그러더니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은 효진 씨에게 연락을 넣어주세요. 명색이 이사인데 이 일도 알고 있어야죠. 게다가 소장 후임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야 나 소장에게 잔소리를 덜 들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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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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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는 한석이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일을 조금씩 보여드리는 용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