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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12월이 되고 나니 확실히 부산도 많이 추워졌다. 원래 따뜻한 도시인데다가 눈이라고는 오지 않는 동네로 알고 있었는데 근래 기상이변인지 폭설도 간간이 오곤 한다. 덕분에 내 업무 중에서 굉장히 사소하면서도, 그리고 중요한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나버렸다.
"한석 씨!"
총무팀 사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희경이 날 불렀다. 정리하던 자재 태그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왔는데... 제설업체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새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아침만 해도 조금 꾸물거리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이 꽤 굵어졌다. 지난번 눈 왔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죄다 비상이라서 불러도 안 올 텐데요. 그러고 보니 지난주가 대설인가 그랬죠."
지난번에 폭설 - 물론 부산 기준에서의 폭설 - 이 왔을 때 불렀던 제설업체는 고작 염화칼슘 몇 번 뿌리고 가래질 몇 번 하는 시늉만 하고는 터무니없는 요금을 제시하였다. 그나마 일찍 오지도 않아서 다들 퇴근을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다. 희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에엑. 우리 회사 앞은 비탈 심해서 위험할 텐데... 좀 있으면 퇴근 시간인데 어쩌려나... 이런 폭설이라니..."
부산 사람들의 폭설 기준은 너무 한심스러운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희경 선배. 이 정도는 체인 감고 가면 갈 수 있어요. 체인 감고 운전해본 적 없으시죠?"
"부산에서 누가 그렇게까지 해요..."
"그렇다면 다른 분들도 죄다 마찬가지겠군요."
부산의 겨울은 확실히 내 고향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내가 살던 곳은 겨울이면 눈이 오는 게 당연한 동네이다 보니 십 센티 정도 적설 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그 정도를 가지고 아무도 폭설이라고 하지 않았다. 눈발이 거세어지면 일단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 실린 스노체인을 바퀴에 감는 게 다소 귀찮을 뿐이다. 그런 다음 원래 가던 길을 가면 된다. 그렇지만 워낙 눈이 안 오는 동네인 이곳에서는 3~4센티 정도의 눈만 와도 온 도시가 마비되곤 한다. 심지어 체인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던 난 다소 놀랐었다.
"휴우. 안 그래도 이번에도 그럴 줄 알고 지난번 구매 나갈 때 체인 신청했었어요. 창고에서 꺼내오겠습니다."
"언제 그런 걸 준비했어요?"
"왜 지난번에 눈 한번 오니까 전부 퇴근 못한 날 있었잖아요. 그걸 보고 연구소 사람들 차량의 휠사이즈 전부 조사한 다음 일괄 주문했죠. 나흘 전에 왔던 큰 박스가 그거였어요."
희경은 내 준비성에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럼 예산항목은 뭐로 잡았는데요?"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살짝 웃으며 답했다.
"사원복지로요. WBS번호는 854956"
그러자 희경은 내 등을 몇 번 두드리며 기뻐했다.
"잘하셨어요. 이제 앞으론 팀장님에게 덜 혼나시겠네요."
나보다 어린 여자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거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저쪽에 앉아 계신 우리 팀장님 - 그러니까 총무팀장이자 김지혜 씨 - 이 우리 쪽을 보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희경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살짝 눈짓을 보내놓고 창고로 걸어갔다. 희경은 사내 방송을 통해 각자 차키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전했다. 스노 체인이 담긴 박스를 주차장에 전부 내어놓을 때쯤, 연구소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눈 내리는 하늘과 하얗게 덮인 땅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체인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CPT의 책임연구원인 박상돈 씨가 나에게 물었다.
"최 대리는 체인 감을 줄 아는 거야? 난 한 번도 그걸 안 해봐서..."
그를 향해 씨익 웃어주곤 체인 박스를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그리고 먼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는 기본 옵션입니다. 일단 박 연구원님 차부터 시작해볼까요? 차키 가지고 오세요."
머뭇거리던 상돈은 이내 앞으로 나와 주차장 쪽을 향해 내려왔다. 그의 차바퀴마다 체인을 배치하고 간격을 조정했다. 그런 다음 운전석에 탄 그를 향해 외쳤다.
"시동 걸고 1단 넣고 조금씩 가세요! 네, 그렇게요! 오케이. 잠시만요!"
바퀴에 감아진 체인을 좀 더 타이트하게 묶는다. 와이어를 당기고 고무줄의 간격을 조정하여 몇 번 더 점검한다. 건물 앞에서 웅성거리며 서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개중에서 나랑 친한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오더니 내게서 체인 박스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사용법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주의점을 일러주었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뛰어가서 알려주고 하다 보니 어느 새인가 내 어깨와 머리 위에는 눈이 꽤 쌓이고 말았다.
"그럼 안전운전하세요."
나 소장의 차에 체인을 장착 완료했다. 운전석의 그가 내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최 대리 덕분에 잘 가겠네. 고마워요."
"하하, 뭘요. 주말 잘 보내세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에 올라타서 출발했다. 마지막으로 희경의 차에 체인을 달아주자 그녀는 내게 같이 타고 가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 등 뒤에서 나 대신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냐, 내 차 타고 갈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 커다란 우산을 쓰고 있는 지혜가 서 있었다. 희경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지혜는 부언 설명했다.
"우리 애가 지금 한석 씨 집에서 놀고 있거든. 데리러 가야하기도 하니까... 희경 씨는 먼저 들어가도록 해."
따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길게 하는 그 모습은 살짝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희경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곤 차에 올라타 출발했다. 평소 속도의 절반도 나오지 않는 속도였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몰고 나갔다. 모든 사람이 떠난 주차장에는 이제 지혜의 차만 남아있었다.
"안 추워?"
지혜는 내게 다가와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우산을 기울여 내게 씌워주기에 빙긋 웃어주었다.
"춥지 않습니다. 이 정도야 뭐. 견딜만하죠."
"애썼어. 이제 사람들도 한석이를 일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거야."
"팀장님이 직원을 이리도 아끼고 챙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뭐야, 한석. 지금은 다른 사람들도 없는데 왜 그렇게 딱딱하게 불러?"
"그러게 말야. 아무도 없으니까 이렇게 하고 싶은 걸?"
이렇게 천천히 말하면서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확 안아주었다. 그리고 차가운 손을 그녀의 허리 뒤쪽, 상의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난데없는 찬 감촉에 놀란 지혜는 꺄악꺄악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내 손 팔에 꽉 안긴 터라 그러지도 못 했다. 지혜는 내 머리를 끌어안고 연신,
"못 됐어. 못 됐어!"
를 연발했다. 그러면서 제 딴에는 날 끌어안는다고 한 거겠지만, 그녀의 신체구조상 가슴으로 내 얼굴을 누르는 건, 아주 훌륭한 질식시도 공격이 되었다. 얼굴을 거기서 빼내고 옷 안에 들어간 손을 점점 아래로 내려 바지 안쪽까지 침입시킨다. 이미 그녀의 체온에 더 이상 차가운 손이 아니긴 하지만 또 다른 자극에 지혜의 몸이 움찔거렸다.
"흐음... 여, 여기서 이러지 마."
"그럼 어디서 그럴까?"
"....몰라...네 마음대로 해..."
지혜의 옷 안에 손을 넣은 채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회사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그녀의 옷 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하게 넣어 안쪽의 안쪽까지 더듬어 댄다. 지혜의 걸음걸이가 조금씩 흐트러지는 게 자못 재밌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쯤 지혜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가 되어있었다.
"하아... 진짜, 이러기야?"
"그럼 가짜로 이럴 수는 없잖아."
"몰라. 짓궂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지혜를 책상 위에 올려 앉히고 키스를 퍼부었다. 내 키스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두 손으로 내 허리벨트를 풀어냈다. 빈 사무실의 약간 쐬하면서 차가운 공기가 몸에 와 닿았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쪽이 워낙 뜨거웠기에 문제없었다. 내 하반신과 마찬가지로 공기 중에 온전히 노출된 지혜의 가슴을 주무르고 빨고 있노라니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퇴근... 안 할 거야?"
그렇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내 허리를 두르고 있다. 밀어내기는커녕 되레 자신 쪽으로 더 당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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