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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95화 (29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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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그녀의 결혼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투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술잔이 오고 가는 가운데 술병이 조금씩 비워진다.

"그나저나 안방이 너무 조용한데?"

잔을 내려놓고 방으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영이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었고 아라는 방바닥에서 책을 끌어안고 코를 골고 있었다. 아라를 안아들어 제 방의 침대에 눕혀놓았다.

"수영이는 어쩔까? 깨울까?"

지혜는 그냥 재워달라고 했다. 수영이도 데려다가 아라 옆에 눕혀 놓았다.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 나니 두 아이의 얼굴만 보인다.

"아라가 참 영리해."

아라 방의 문가에 지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수영이도 저렇게 똑 부러지면 좋겠는데..."

"수영이는 귀엽잖아. 난 처음 봤을 때 당연히 여자애인 줄 알았어."

지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남자애지. 옷 갈아입힐 걸 보아하니.. 한석이도 봤겠지?"

"으응. 아까 애들이 흙장난을 심하게 해서 말야. 목욕을 시켰어. 미안."

"미안하긴. 휴우. 그래.. 다 내 탓이야. 내 탓."

식탁으로 돌아오자마자 지혜는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나조차 두 번에 나누어 마시는 그 독주를 한 번에 마시다니. 조금 놀랐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지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 요새 혼자서도 술 곧잘 마셔. 선미는 근무 중에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여자고 걔는 24시간이 근무시간이니까."

"근무시간?"

"응. 근무시간... 선미는 효진이를 수행하던 전담 고용인이었어. 무슨 하우스 메이드인가, 그러던데. 암튼 내가... 내가 이렇게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으니까 보다 못한 효진이가 날 이곳에 취직도 시켜주고... 그리고 선미도 붙여준 거야.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효진이를 수행해...?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선미를 처음 봤을 때 낯설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도 내 결혼식에 왔었다! 배가 잔뜩 부른 선영을 옆에 두고 효진이가 깔깔 놀리던 바로 그 날, 선영과 나, 효진이 셋이서 찍은 스냅사진이 있었다. 그걸 찍은 사람이 바로 효진이를 따라온 어떤 여자. 바로, 선미였다. 그녀도 나처럼 이걸 까먹고 있었던 걸까. 왜 지난 시간 동안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난 한석이 널 다시 만났을 때, 당연히 효진이가 보낸 건 줄 알았어. 그래서 연락해봤더니 그게 아니라더군."

"효진이가 아니라면... 누구지? 이사가 날 여기에 취직시켰다고 했잖아? 효진이 말고 다른 이사가 또 있는 거지?"

그러자 지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지."

"그게 누구냐면.... 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거야. 회사에서 제대로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되면 알려줄게. 요새 너 정신없이 일하는 건 알겠는데 아직 일처리가 말끔하지 못해."

"으윽... 우리 이런데서 회사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회사에서의 엄한 총무팀장으로 아주 잠깐 돌아갔던 지혜는 다시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두 사람은 회사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와 앞담화로 잠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효진이를 제외한 다른 이사들에 대한 걸 물어보았지만, 지혜는 한사코 그 점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벌써 열한 시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시계를 올려다본 난 지혜에게 물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집에 안 들어가 봐도 돼? 아니면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하거나..."

그러자 지혜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미 적잖은 술을 들이켰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연락? 누구한테 연락?"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너 집에 있을 남편한테지."

"남편?"

지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이 의아스러운 난 그저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한참을 킥킥거리던 그녀는 뱉어내듯이 말했다.

"남편....남편이라는 사람은 없어."

"없다니? 어디 갔어?"

"그래, 갔지. 아주아주 먼 곳으로. 여기가 아닌 아주 먼 곳으로..."

"다른 지역에 단신부임이라도 한 거야?"

문득 아까 아라가 이야기한 게 생각났다. 아라는 수영이네 집에 아빠가 없다고 했다. 난 그게 단순히 그가 집을 비웠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아... 한석이... 너 눈치 없는 건 여전하구나."

지혜는 고개를 들어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날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뱉어내듯이 말했다.

"나, 이혼했어."

"뭐?"

"좋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나랑 결혼한 게 따로 속셈이 있을 정도로... 난 그저, 그저 선봐서 괜찮은 사람이다 싶어서 결혼한 거였는데 그는 그게 아니었던 거야."

갑자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혜야, 너... 울어?"

"그 자식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도... 내가... 내가 못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어.... 그러고도 수영이를 낳았지... 수영이를 가졌을 때, 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도 애가 생기면, 애가 생기고 나면 사람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집에 애정을 가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런데 그건 큰 착각이었어."

눈물을 삼키느라 지혜의 발음은 좀 불분명했다. 그녀는 토해내듯이 말하고 있었고 난 그저 들어줄 뿐이었다.

"내가 순진했지.... 그 사람이 수영이를 자기 자식으로 여기지 않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한 거야.... 처음에는 그냥 무관심한 정도였는데... 수영이가 커갈수록 그 사람은 애한테 손을 대기 시작했어... 맨날 때리고 욕하고 윽박지르고.... 근데 난 그걸 제대로 막지도 못 했어... 막아주지 못했어...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 사람이 날 향해 소리 지르면 그저 꼼짝도 못 할 뿐이었어."

"지혜야...."

더는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지혜의 곁으로 옮겨 앉아 그녀를 안아주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지혜의 고백은 이어졌다.

"수영이가 남자 어른을 무서워하는 것도... 자기가 남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도... 전부, 전부 내 잘못이야... 심지어 저 아이는 나보다도 선미를 더 좋아해... 어떻게 보면 저 아이를 그 지옥 같은 집에서 구한 건... 내가 아니라 효진이와 선미일지도 몰라.... 난 그저 방관만 하고 있던 멍청이, 바보였어."

"그만해. 지혜야. 그만해."

"멀리 가서 우릴 전혀 모르는 곳에서 살면 괜찮을 것 같았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기억이 아직도 수영이한테는 그냥 있는 거야... 계속 있는 거야... 난,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지혜의 눈물이 내 옷을 적셨다. 그녀의 머리와 목을 쓸어내리며 토닥였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가 겪었던 일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수영이란 아이의 이상한 행동과 지혜의 수척한 얼굴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지혜는 가까스로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눈가를 훔쳤다. 테이블 위에서 티슈 몇 장을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걸로 눈가를 찍어내며 말했다.

"나, 정말 바보 같지?"

"...음. 뭐랄까. 바보 맞네."

"뭐어?"

"이런 이야기는 좀 진작 하지 그랬어. 그렇다고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는 거잖아."

"하아. 그러고 보니... 난 어떻게 널 만나면 항상 안 좋은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 같아."

"안 좋은 이야기?"

"응. 널 처음 만났을 도... 좀 그랬잖아. 상황이 안 좋고."

"그랬었지. 그래서 너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와 내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우느라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내 손은 그녀의 허리에 가 있었다.

"....만났을 때... 뭐?"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쉬어있었다. 젖어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아...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입술이 겹쳐졌고 혀가 섞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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