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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정말 세상 좁다."
"그러게..."
아이들은 여전히 안방에서 나오지 않고 가끔씩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희들끼리 무어라 속닥거리곤 했다. 지혜는 수영이를 굳이 부르지 않았다. 밖에서 놀다가도 멀리서 날 발견하면 쪼르르 달려오는 아라를 생각하면, 수영이의 태도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까 녀석이 씻기 위해서 옷을 벗었을 때 본 흔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설마 지혜가...? 이런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에게 늘 상냥했던 그녀를 떠올리면 그런 상상은 쉽지 않았다. 일단 부엌 식탁에 앉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커피 줄까?"
그러나 지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혹시 술 있어?"
"술?"
조금 놀랐다. 십여 년 전 그녀와 함께 술을 마셨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개의 경우, 그녀와 내가 함께 술을 마신 이후에는 뭔가 은밀한 단계로 넘어간 적이 많았다... 그녀는 그걸 기억하고 있을까? 괜한 생각이다. 지금 그녀는 애 딸린 유부녀였다. 집에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고개를 흔들어 삿된 망상을 떨쳐버렸다.
"소주나 맥주는 아니고... 좀 독한 술이 있는데, 괜찮아?"
찬장에 넣어둔 보드카를 꺼내왔다. 보드카용 잔은 내당리에서 미처 챙겨오지 못했기에 물잔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지혜는 병을 들어 뒷부분에 적혀있는 도수를 보곤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걸 마셔?"
"애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술이었어. 어느 순간... 나도 좋아하게 되더라고."
"아아."
지혜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녀의 앞에 앉아 두 잔을 1/3쯤 채웠다. 보드카 특유의 강한 향이 훅하고 밀려올라와 코끝을 어지럽힌다. 잔 하나를 지혜 앞으로 밀어놓으며 물었다.
"차 가져온 거 아냐?"
"대리 부르면 돼. 여기서 우리 동네까지 대리비는 만 원도 안 나와."
"그럼 다행이고."
냉장고를 열어봐도 당장에 안주로 할 만한 게 크게 없었다. 고심 끝에 냉장고 위에 올려놓은 바구니에서 과자 한 봉지를 꺼내어 뜯었다.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귀신같이 눈치 챈 아라가 안방문을 열고 소리 질렀다.
"아빠! 그건 내 과자잖아!"
"....알았어. 나중에 아빠가 다시 채워놓을게."
"감자칩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과자를 심하게 좋아하는 아라를 제지하기 위해 녀석의 과자는 내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그걸 먹는다고 하니 저렇게 반항하는 거다.
"....알았어. 두 개 사놓을게."
"흐흥. 약속했어? 그치?"
흐뭇한 미소를 짓던 아라는 자기 쪽을 쳐다보던 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허리에 손을 딱 얹고 있던 아라는 황급히 두 손을 앞에 모으더니 지혜에게 배꼽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최아라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빠한테 떽떽거리다가 외부인 앞이라고 저렇게 돌변하는 자세라니! 저건 캠코더로 좀 찍어둬야 하는데! 아무래도 다음 월급을 타면 캠코더를 하나 사야겠다. 인사를 받은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가 아라구나. 선미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듣던 대로 귀엽구나."
귀엽다는 칭찬을 받은 아라는 좋아하기 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은 자기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귀엽기는 수영이가 더 귀엽게 생겼는데요?"
"호호. 외모뿐만 아니라 하는 행동이 말야. 항상 수영이랑 잘 놀아줘서 고마워. 잠깐만... 어디 보자."
지혜는 아라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내가 만류해도 지혜는 괜찮다며 지갑을 열었다. 그러자 아라가 먼저 낼름 말했다.
"아줌마. 전 오천 원만 주시면 돼요."
"뭐?"
지혜의 눈이 커졌다. 아라는 손바닥을 쫙 펼치고 휘저으며 말했다.
"만 원을 주시면 아빠가 다 뺏어가거든요. 제 통장에 넣어주겠다는데 그러면 제가 바로 못 쓰잖아요. 그러니 오천 원만 주시면 좋겠어요."
사양 하는 것도 아니고 겸양을 떠는 것도 아니고... 가격제시라니. 창피하다. 난 두 손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렸지만, 지혜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자, 이렇게 하면 오천 원이 두 개니까 아빠가 뺏지 못할 거야. 그리고 넌 만 원을 쓸 수 있고. 그럼 됐지?"
"네! 정말 고맙습니다."
아라는 다시 한 번 배꼽인사를 하곤 안방을 달려갔다. 문가에 서서 얼굴만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던 수영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은 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길래 자기 엄마가 왔는데도 저런 태도인 걸까. 안방 쪽을 한참 보고 있던 지혜는 몹시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귀엽네. 똑똑하고."
"똑똑해? 저게 어딜 봐서... 잔머리만 늘어가지고."
"그게 똑똑한 거야. 가만히 보니 생긴 게 엄마를 많이 닮았네."
뭔가 이상했다. 지혜와 내가 잠깐 알고 지낸 적은 있지만, 그 사이에 지혜와 선영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데 선영의 얼굴을 알고 있다고?
"....선영이를 본 적 있어? 네가?"
그러자 지혜는 잔을 들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후. 네 결혼사진이랑 DVD를 봤었어. 효진이가 보여줬지."
"아....그랬구나."
그제야 내 결혼식에 왔던 태근이 형과 함께 왔던 효진이를 떠올렸다. 선영과 처음 보는 사이였는데도 효진은 전혀 꺼릴 게 없었다.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신부를 가리키며 아주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어서 나와 선영이가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새삼 잊고 있던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 웬수는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지금은 아마 서울 아니면 일본에 있을 거야... 아, 한석이는 몰랐어? 효진이가 우리 연구소 이사잖아."
"그래. 효진이가 이사를 갔..... 에엑? 효...효진이가 이사라고?"
정말 예상외다. 늘 지혜 집에 얹혀 살던 한량인 효진이가? 백수인 데다가 맨날 나랑 지혜에게 얻어먹고 다니던?
"아니... 우리 연구소는 이사들이 돈을 내서 세운 거라면서? 그런 효진이가 그렇게 돈이 많단 말야?"
그러고 보니 녀석이 지혜 결혼식 때 끌고 온 차는 외제차였다. 태근이 형의 돈 씀씀이를 생각해보면 그 배경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사설 연구소를 세울 정도였다니. 아까부터 나는 계속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라곤 하지만, 이 정도는 너무 벅차다.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도 몰랐구나. 그래. 나도 전혀 몰랐는데... 효진이는 사실 어마어마하게 큰 회사 오너 집안의 딸이었어. 기집애가 그런 이야기는 나한테 한 번도 안 했는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알게 되었어. 그게, 참... 그래."
이 이야기를 하면서 지혜의 얼굴이 많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을 속여 왔다는 점 때문이었을까? 지혜와 효진이는 그냥 평범한 여자친구가 아니기도 했다. 지혜가 결혼하기로 했을 때 효진이가 보인 반응은 흡사 애인이 뺏긴 사람과도 같았다. 고개를 살짝 들고 지혜를 쳐다보니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내 내 시선을 알아챈 그녀는 황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미안하다. 넌 내 결혼식에 와줬는데 난 못 갔잖아."
"괜찮아. 워낙 급하게 하느라 많이 알리지도 못 했는걸. 게다가 시골에서 하는 바람에 서울 사람들은 다들 못 오곤 했어."
"그럼 그때 신부 배 속에 있던 애가 저 아이?"
"응. 쟤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치룬 거였어. 그때 효진이가 놀러 와서는 얼마나 놀려댔냐면 말야..."
아마도 그때였을 거다. 휴가 때 선영과 밤새도록 몸을 어울리던 그날. 피임도 하지 않았으면서 선영의 안으로 몇 번이고 사정하던 날. 아마도 아라가 잉태된 날은 그날이었을 거다. 병장 3호봉쯤인가. 전화로 선영의 임신을 알게 되었고 제대를 하자마자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결혼준비를 했어야만 했다. 지혜와 나는 내 결혼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게 벌써 7~8년 전 이야기인데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원래 그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일인데, 그걸 잊을 리가 없잖아."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혜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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