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93화 (29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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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내 딸도 딸이지만, 아주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수영이 역시 거지꼴을 면하기 어려웠다. 녀석을 번쩍 들어다가 욕실로 옮겨놓았다. 수영이가 아라보다 키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무게는 더 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라고는 하나 남의 집 딸내미라서 내가 직접 벗기기는 좀 그랬다. 아라한테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이미 옷을 훌러덩 벗고 있던 아라가 수영이 옷 벗는 걸 도와주기 시작했다.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그 옷을 벗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지퍼가 뒤에 달린 데다가 어깨와 허리에는 뭔 그리 많은 끈이 달렸는지 아라가 그걸 하나하나 풀어내느라 꽤 애를 먹었다. 옷을 입고 있는 당사자가 비협조적이라 더욱 그러했다.

"수영아, 옷을 벗어야 목욕을 하지. 우리 아빠가 세탁기에 넣어서 빨아줄 거야."

"아... 안 돼에...."

"응? 이건 세탁기가 아니라 손빨래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아...."

수영이의 얼굴은 점점 더 울상이 되어간다. 아라 혼자 힘들면 도와줄까 싶어서 욕실 문가에 계속 서 있었다.

"어?"

수영의 원피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자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빠, 얘한테 이상한 거 달려있어."

아라가 수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영이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욕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상한 거?"

수영이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남의 딸자식 알몸을 보는 게 좀 주저되었지만, 혹시나 녀석의 몸에 무슨 상처라도 난 건가 싶어서 욕실로 들어섰다. 아라가 수영이 보고 일어나 보라면서 몸을 돌리게 했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녀석의 다리 사이에는 어디서 많이 보던... 그러니까 지금은 좀 다르지만, 암튼 내가 어렸을 적 많이 보던 것이 달려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에엑? 너 남자애였어?"

긴 머리와 귀여운 얼굴. 늘 입고 다니는 치렁치렁한 옷을 보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덜렁거리고 있는" 명확한 증거가 이 녀석의 성별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영이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 꼬추가 달려있잖아."

"아니라고요... 아니란 말이에요."

수영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엉엉 울고 있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수영이의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수영이의 울음소리가 꺼이꺼이 하는 쉰소리로 바뀔 때쯤 아라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날 밀어내고는 수영이를 감싸 안아주었다. 한쪽 팔로 수영이의 어깨를 안고 다른 손으로 등을 토닥여준다. 그 익숙한 동작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라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본다.

"왜 여자애를 울리고 그래, 아빠는."

"여자애라니, 아라야. 쟤는 그러니까..."

"본인이 여자라잖아. 그럼 된 거지."

내 딸이지만, 난 도무지 말로 이 아이를 이길 자신이 없다. 그대로 아라에게 밀려나 욕실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욕실 문이 닫혔기에 서럽게 울던 수영이의 울음소리가 조금 작게 들렸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아라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계속 거기 서 있다가는 수영이의 울음소리가 나까지 울릴 것 같았다. 남자애를 내 딸과 목욕시켜도 과연 괜찮을까, 문제 없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안 괜찮은 쪽은 왠지 수영이 쪽일 것 같았다. 일단 그 자리를 떠나 방으로 들어갔다.

수영이의 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물건도 충격이었지만, 녀석이 옷을 벗을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던 피부의 상처와 멍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심할 정도로 과보호를 받으며 귀하게 자라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몰랐다.

잠시 후, 말쑥하게 된 두 아이가 나왔다. 미리 아라의 옷장에서 꺼내어 준비해둔 원피스 두 벌과 새 팬티를 건네주었다. 바지를 준비할까 하다가 괜한 짓인 거 같아서 일부러 원피스로 준비했다. 고추 달린 녀석이 내 딸의 팬티와 원피스를 입는 광경은 좀 그랬지만, 그래도 본인이 여자라고 주장하니 여자로 대우해주는 게 맞지 싶었다. 원피스를 다 입히고 나니, 역시 믿을 수 없지만, 아라보다 더 귀여운 여자아이가 거기에 있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인정할 건 해야 한다.

두 아이를 부엌에 있는 식탁으로 데리고 가서 식사를 권했다. 내 눈치를 보며 깨작깨작 먹어가는 수영이와 숟가락까지 먹어버릴 기세로 밥을 퍼먹고 있는 아라가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것도 좀 먹으렴."

보다 못해 계란 후라이를 조금 떼어 수영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수영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내 눈치만 볼 뿐 계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수영이를 계속 쳐다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선미 이모가 오늘은 안 오신다며?"

"....."

"엄마는 언제 오시니?"

"....."

별수 없이 아라쪽을 보며 다시 물어보았다. 밥을 입안 가득 밀어 넣고 우물거리던 아라는 밥알을 마구 뿜어가며 대답했다. 식탁 위로 밥알 융단폭격이 펼쳐진다.

"선미 이모는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가야 된대. 그래서 원래 수영이는 밤에 잘 때마다 선미 이모랑 자는데 이때마다 엄마랑 잔다고 그러더라고. 아무래도 수영이는 자기 엄마하고 사이가 안 좋은 거 같애. 이상하다, 그치? 난 맨날 엄마랑 자는 게 더 좋았는데. 그런데 엄마랑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항상 아빠 침대에 들어가 있더라?"

"흠흠, 흠....아니, 아빠가 궁금한 건 수영이 어머니가 얘를 데리러 언제 오시냐는 거야."

"그리고 수영이는 아빠가 없대. 그래서 나는 엄마가 없다고 했어. 수영이가 나한테 아빠가 안 무섭냐고 하길래 하나도 안 무섭고 오히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줬어. 나 잘했지?"

"....아니, 이 아가씨야. 아빠가 묻는 건 수영이 어머니가 언제.."

"금방 올 거야. 아줌마가 내 전화번호 알아. 아까 나한테 문자 왔거든. 그래서 내가 우리 아파트 이름이랑 동호수 가르쳐줬어."

"그걸 진작 말하라고. 어휴."

필요 이상으로 쓸데없이 똑똑한 딸내미는 내가 필요로 하는 이상의 쓸데없는 정보를 마구 쏟아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밖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 애랑 잘 노는 애라고 해도, 애는 애다. 자기 집에 늦게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어 물어본다.

"어머니가 늦으시네... 너무 늦을 것 같으면 아저씨가 데려다 줄까?"

그러자 수영이는 고개를 올려 날 쳐다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태껏 내가 뭘 물어보면 무반응이거나 아라 뒤에 숨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대답은 꽤나 큰 진보라고 할 수 있었다.

깨작깨작 먹는 수영이가 다 먹기를 기다리느라 상 치우는 게 좀 늦어졌다. 수영이가 밥을 다 먹자 아라가 책을 가져오더니 수영이를 데리고 거실로 가서 함께 보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아라의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나서 순간 울컥해졌다. 황급히 거기서 시선을 돌리고, 식탁을 치운다. 싱크대에서 그릇을 씻고 있는데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우리 집에 찾아올 사람은 거의 없다.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수영이 엄마가 온 게 틀림없었다.

"아라야. 수영이 데리고 좀 나가볼래?"

고개를 돌려 거실을 보니 수영이는 안방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아라는 그런 수영이를 쫓아가고 있었다. 자기 엄마가 왔는데 도망을 가다니...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싱크대의 수도를 잠갔다. 냉장고 옆에 걸린 수건에 손을 대충 비벼 닦았다.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네, 나갑니다."

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집 애가 실례가 많네요...이런 인사 나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거기에는 전혀 낯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어?"

"어!"

서로 가리키며 놀라움을 표하고 만다. 거기에는 지혜가 서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아하니 나 역시 그런 표정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그러는 너는?"

몇 초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나는 그제야 내가 누굴 맞이하기 위해 현관을 열었던가를 기억해냈다.

"네가 수영이 엄마야?"

"그럼... 네가 아라 아빠였어?"

고개를 돌려보니 안방 문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놓고 있는 두 아이가 보였다. 내 딸과 지혜의 딸... 아, 아니지. 내 딸과 지혜의 아들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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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입니다만,

괄괄녀 아라가 아주 씩씩하게 자라나서 예쁘게 자라난 여장남 수영이를 덮치는 이야기는 별도의 시리즈로 훗날 연재됩니다. 원고 앞부분은 이미 편집부에 넘겼으며 이곳 조아라가 아닌 다른 사이트에서 단편 연작으로 게재됩니다.

제목은 <카라차의 해피타임 > 부제 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웹툰화 계획도 잡혀 있으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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