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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그런 동시에 꽤 감탄했다. 확실히 사회 물을 제대로 먹은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싶었다. 하기야 그녀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도 이미 직장생활을 꽤 하고 있던 터였다. 지금쯤이면 사회생활 10여 년 차에 해당할 성 싶었다. 내가 여기서 괜히 그녀에게 친한 척을 해보아야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PPT에 배치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보아하니 모터 쪽으로 공부를 하신 거 같은데."
"PPT 팀장을 불러올까요?"
"다른 팀장들의 의견도 한 번 보고요."
가희와 지혜는 내 업무배치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추 대화가 흘러가는 걸 보고 있노라니 가희가 아까 말했던 PPT라는 팀에 들어가는 게 거의 확실히 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여태껏 아무 말 없던 나 소장이 테이블에 놓인 내 이력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반백이 성성하고 이마가 살짝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들여다보면서 이마를 살짝 찌푸리는 것으로 보아 노안 끼가 조금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별로 페이지가 많지도 않은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넘겨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력서를 보아하니 학사 출신이군요. 게다가 98년도 졸업 이후... 경력이 전혀 없군요. 그동안 어디서 뭘 하셨습니까?"
가장 난감한 질문을 다시 받았다. 아까 가희가 물어봤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농사짓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지만, 어째 이 사람의 말투는 다소 공격적이었다. 그렇지만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저, 그게.... 농사를...."
"농사요?"
나 소장의 보이스 톤이 한층 더 올라갔다. 그는 날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껄껄 웃기 시작했다. 명백히... 웃겨서 웃는 웃음소리는 아니었다.
"농사라니. 허허허. 언제부터 우리 연구소가 농업 쪽의 연구도 시작했나요. 설마 경운기나 콤바인 몰던 실력이 우리 연구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껄껄껄."
그는 내 이력서를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죠. 최한석 씨. 이미 채용이 결정되었으니 제가 무어라 부언한다고 해서 당신의 채용 여부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대체 어떤 빽이 있어서 이사님들의 추천을 받고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총무팀장과도 구면이라고요?"
"아니, 지혜 하고는 여기서 처음..."
"그래서, 모르는 사이입니까?"
그의 날카로운 말투에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학벌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연구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최하가 석사입니다. 박사도 다수 있고요. 제가 무슨 학력지상주의자라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 배우기만 해 본 사람과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연구해 본 사람은 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을 연구팀에 턱 데려다 놓는다? 글쎄요. 연구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이 사람 가르치느라 연구가 더 더뎌질까요?"
말문이 막혔다.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차피 이제 내년이면 원래 있던 학교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라 연구소 운영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여를 안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분명 방금 제가 한 문제 제기를 똑같이 말할 사람이 나올 겁니다. 장담해도 좋습니다."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의 말투가 조금 공격적이고 날이 서 있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난 누군가가 제공한 빽을 메고 이 연구소에 떨어진 낙하산이었다. 대졸이라고는 하나 석박사가 넘쳐나는 연구소 인력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다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일부러 멀리까지 날 보내어 이사 시킨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영을 잃고 근 일 년 가까이 폐인처럼 살아온 나를 억지로 내당리에서 밀어낸 엄마의 마음이 어디 그리 쉬운 것이었으랴. 울컥한 마음과 자괴감이 한데 섞여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무언가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럼 일단 저희 팀에서 데리고 있죠."
지혜였다. 그녀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연구팀에 당장 넣는 게 어렵다면 저희 총무팀에서 그를 쓰겠습니다. 안 그래도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총무팀인데, 여자 둘이서 하려니 힘들었어요.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영제 씨랑 대범 씨 부르는 것도 미안하고. 아시다시피 우리 팀은 학력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장 팀장인 저부터 대학 근처도 못 가본 고졸인걸요."
그렇다. 지혜가 날 구원했다. 문득... 그녀와 두 번째로 자던 날이 생각났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던 그녀의 목소리가 언뜻 생각났다. 나 소장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죠. 아니면 총무팀에서 이 기회에 연구소 뒷산에 텃밭이라도 하나 만드시는 건 어떨까요."
여전히 냉소적인 그의 말투에 적잖이 가슴 아팠다. 농사에 무슨 원수라도 진 걸까, 이 양반은. 그런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농사는 중요해요. 소장님."
뜻밖에도 가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빙글빙글 돌려 만져가며 천천히 말했다.
"저도 직접 해 본 건 아니고 저희 부모님이 하시던 걸 구경만 해본 사람이지만, 농사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선 부지런해야 해요. 그 부지런함은 우리의 생각과 급이 다릅니다. 그저 우리처럼 아침 열 시에 맞춰서 출근하고 다섯 시면 퇴근하는 그런 부지런함이 아니죠. 작물이 크는 것에 맞춰서 새벽에도 일어나야 하고 밤늦게까지 물길을 잡아야 되기도 하죠. 주 5일 근무니 하는 건 사치에 불과하고요."
그녀는 날 가리키며 말했다.
"한석 씨가 여태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꽤 성실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꾸준히 임해야 할 연구팀에도 좋은 인재가 되리라 싶었는데요. 기왕 총무팀장이 그를 쓰겠다고 정했으니 일단은 총무팀에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장님도 이의 없으시죠?"
"그러죠, 뭐."
가희의 중재로 내 업무 배치에 대한 협의는 끝났다. 가희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지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나 소장은 담배 한 대 피우고 가겠노라며 건물 밖으로 나갔기에 복도를 따라 걷는 건 나와 지혜뿐이었다.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그녀를 어떻게 부를까 한참 고민했다. 지혜...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다. 고민 끝에 그녀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저... 팀장님."
그러자 지혜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녀와 나 사이는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아직 그녀가 내게 완전히 다가온 건 아니지만, 그녀의 튀어나올 듯한 가슴은 내 배에 닿을락 말락 했다.
"뭐야, 한석. 그렇게 어색하게 부르고."
"아니, 일단 여기는 회사고 또..."
지혜의 손이 올라온다.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살짝 어루만지더니 이내 볼을 꼬집는다.
"아얏."
"남 있을 때나 그렇게 불러. 둘이 있을 때는 전처럼 불러도 뭐라 안 그럴게."
"....그런 말은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냐? 왜 남의 볼은 꼬집고 그래?"
"후후, 반가워서 그래. 반가워서."
"반가우면 악수를 청하든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그랬어."
그녀와 난 악수를 나누었다. 예전에 그녀는 다소 통통한 편이어서 손가락도 통통했는데 지금은 어쩐지 좀 말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왼손. 왼손 약지에는 얇은 금색 반지가 끼어 있었다.
"그럼 한석이, 오늘부터 내 쫄따구네? 우리 연구소는 일이 많으니까 잘 따라와야 해. 알았지?"
"알았어. 지혜."
"어허, 지금은 업무 지시를 내릴 거니까 팀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조금 전엔 둘이 있을 때 이름 부르라며!"
지혜는 환한 얼굴로 웃으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이제 둘 다 서른이 넘었는데도 예전의 치기 어린 대화는 고스란히 우리 사이에 남아있었다. 꼭 풍만한 가슴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밝은 표정과 환한 웃음을 보며 그녀의 남편은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쪽이야. 일단 희경 씨에게 일을 배우도록 해."
"윽... 아침에 희경 씨가 날 부려 먹은 건... 이렇게 되리란 예고였나?"
"무슨 소리야, 그게?"
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지혜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지혜는 깔깔거리며 내 등을 몇 번 때렸는데, 꽤 아팠다. 덕분에 그녀가 부산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 연구소의 이사가 대체 누구인지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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