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89화 (28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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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희경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에 도착하고 나니 복도를 따라 한참 더 걷는다. 거기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내가 혼자서 1층부터 5층까지 돌아보면서 대표 사무실을 못 찾은 이유를 알았다. 대표 사무실은 지하에 있었다. 그것도 건물 측면이었다.

"특이하네요."

"뭐가요?"

계단을 내려가며 희경에게 말을 걸었다.

"대개 대표 사무실이라고 하면 최상층에 있거나 아니면 건물 중앙에 있거나 하지 않나요?"

"그거야 대표님이 좀 특이하셔서 그래요."

"특....이요?"

"네, 몹시 특이하세요."

이쯤에서 희경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계단을 다 내려가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까닭 모를 연민이 가득했다. 아까부터 그녀가 날 쳐다보는 눈빛이 영 심상치 않았다.

"저기... 아까부터 절 되게 불쌍하게 쳐다보시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묻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약간의 한숨을 덧붙이며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금 불안해서 그래요. 대표님이 본인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경우는 일주일에 한두 번 뿐이에요. 어지간해서는 본인의 사무실 겸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는 분이고요,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닌 누군가를 자기 사무실로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저희야 결재 같은 걸 받으러 종종 들어가긴 하지만 그분에게 불려가는 분들은 뭐랄까..."

"...뭐랄까?..."

"정상이 아니게 된다거나 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서..."

"네엣?"

방금 사무실 겸 연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뭔가 연구하고 있다는 사람이라는 소리인데 불려간 사람이 멀쩡하지 않게 된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설마 매드사이언티스트라거나 그런 건가. 사람을 상대로 막 실험을 해대는? 아침 내내 들던 불안감이 다시 증폭되었다.

"위험...한 분입니까?"

"아니, 위험까지는 아니지만요..."

"그러면?"

"되도록이면 대표님이 주시는 음식물 같은 건 먹지 마세요."

첩첩산중이다. 이거 완전히 매드사이언티스트에게 제 발로 걸어가는 인간 모르모트로 확정이로구나.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유념하겠습니다."

"좋아요. 이쪽이에요."

다시 걷기 시작하는 희경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길고 좁은 복도는 꽤 어두웠다. 몇 미터 간격으로 붙어있는 희미한 조명이 가슴 속 불안감을 더 증폭시켰다. 복도의 끝에 이르자 커다란 미닫이문이 나타났다. 희경이 가볍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희경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고 내가 뒤따라 들어갔다. 환한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좋은 아침이에요, 희경 씨. 그리고 최한석 씨. 반갑습니다."

아까도 들었지만, 직접 들으니 더 어린 목소리였다. 목소리만큼이나 해맑은 표정의 어린 여자가 서서 우릴 맞이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살짝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무실 겸 연구실이라는 그곳은 무척이나 넓었다. 건물 지하실 전체를 혼자 다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좌측 벽은 일반 가정집의 부엌과 거실을 합친 것 같은 모양새였고 우측 벽은 각종 비커와 샬레 등이 가득한 선반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싱크대에는 이런저런 음식 찌꺼기가 붙은 그릇들과 이름 모를 시약들로 가득한 시험관이 마구 섞여서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연구소 대표, 가희라는 여자는 목소리만큼이나 어린 모습이었다. 언뜻 보아 이제 스물도 채 되지 않았을까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저렇게 어린 사람이 이런 연구소의 대표라고? 그게 말이 되나? 그러나 굳이 내색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꾸벅여 예를 표했다.

"안녕하세요. 최한석이라고 합니다."

"이쪽에 앉으세요. 희경 씨는 나중에 총무팀장과 소장님 출근하시는 대로 이곳으로 불러오시고요. 그동안 저는 한석 씨와 이야기 좀 나눌게요."

"예."

날 이런 정체 모를 곳에 밀어 넣은 희경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그대로 나가버렸다. 가희가 가리킨 소파에 앉자 그녀는 손바닥만 한 버너에 손잡이 달린 비커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저희 연구소는 찾기 어렵지 않던가요?"

"버스 정거장에서 금방이던데요."

"버스 타고 오셨구나. 헤에, 낯선 곳에서도 길을 잘 찾으시는군요."

"늦을까 봐 미리 일찍 나온터라 길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일찍이요? 대체 얼마나 일찍?"

"여덟 시 정도에..."

"어머나, 우리 연구소는 열 시까지 출근인데요. 너무 일찍 오셨네요."

그래서 그 시간에 사람이 아무도 없던 거였구나....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희는 찬장에서 두 개의 잔을 꺼내더니 서랍에서 꺼낸 티백을 넣었다. 그리고 비커를 들어 팔팔 끓고 있는 물을 잔에 부었다. 설마 지금 저게 차를 끓이는 건지 아니면 연구시약을 만들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물어볼 수는 없어 잠자코 있었다. 가희는 두 잔을 손에 들고 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예상대로 한 잔은 자기 앞에, 다른 한잔은 내 앞에 놓았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마...마셔야 됩니까?"

"음?"

먼저 잔을 입게 가져가던 가희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어려 보이는 인상이 더욱 그래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깔깔 웃기 시작한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는 한참 웃다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 내게 말했다.

"아아, 너무하는 걸요? 희경 씨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에게 내민 약에 이상한 차를 넣지는 않아요."

"...방금 뭔가 말을 잘못하신 거 같은데요?"

"음? 제가 언제요?"

가희는 방금한 말실수를 감추려는 듯 서둘러 차를 마셨다. 고개를 내려 잔을 들여다본다. 평범한 녹차티백에 평범한 찻잔이었다. 옅은 녹색으로 우러난 찻물에서 구수한 현미녹차의 냄새가 올라온다. 손님용 약에는 차를 넣지 않는다는 가희의 말을 믿기로 했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예상외로 평범한 차였다.

"암튼 반가워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뵈니 더 반갑네요."

"이야기를 많이 듣다니요?"

"아? 아... 그게... 아직은 말하면 안 되는 거구나. 음. 방금 한 소리는 잊어줘요."

아무래도 그녀는 가만히 놔주면 말실수를 연이어 하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평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소리가 무지하게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내 상관인 셈이라 잠자코 있기로 했다.

"저희 연구소, 그러니까 휴먼오토엔지니어링 연구소, 줄여서 HAEL에 대해서 들은 거 있나요?"

"아뇨. 전혀요. 나름대로 찾아보았습니다만... 나오지 않더군요."

"그럴 거예요. 생긴 지 이제 3년이 채 되지 않은데다가 아직 연구 성과랄 것도 내놓지 못하고 있거든요. 간단히 설명하면 인체에 대한 하이브리드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에요. 관절대체용 인공관절도 만들고요, 면역체계나 약물저항에 대한 연구도 동시에 하고 있죠."

인공관절과 약물이라니.

"전혀 다른 분야 같은데... 왜 그걸 같이하죠?"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같아요. 인공관절이든 독물이든 간에 사람 몸에서 보면 결국은 외부물질이거든요. 관절의 경우는 그게 성공적으로 안착되려면 몸의 저항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고요, 독물이라면 몸의 저항을 키워서 그걸 막아내야 하니까요."

"아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자동제어에 관한 연구부서가 두 팀, 약물연구에 관한 연구부서가 두 팀이 있어요. 한석 씨라면 어디보자...."

그녀가 옆에 있는 서류 하나를 끌어다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그건 내가 보낸 이력서가 분명했다. 저걸 지금 보는 건가? 보낸 지가 언제인데...? 가희는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어공학을 전공하셨네요? 논문은 DC모터에 대한 걸 쓰셨고요. 그렇다면 저희 PPT쪽에서 근무하시면 되겠군요. 자세한 건 이따 소장님이랑 의논해봐야겠지만."

"PPT요?"

"네. 프로세스 프로젝트 팀이요. 임베디드 프로그래밍이나 로직구성은 잘 하시는 편인가요?"

기분이 묘했다. 저런 질문이라면 대개 입사 전에, 그러니까 면접 단계에서 물어봐야 하는 질문 아닌가. 그렇지만 저쪽은 이미 나에게 채용통보를 보낸 후다. 그렇다는 건 내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단 채용부터 했다는 거 아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가희라는 여자의 태도도 뭐랄까. 크게 신용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마음속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상대의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쪽부터 털어놔야 한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대학졸업 후 여태까지 다른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예전에 배웠던 거라...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이 회사에서 절 덜컥 채용하셨다고 하기에 솔직히 처음에는 의아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괜찮아요. 한석 씨에 대해서는 두 명의 이사 님이 추천하셨으니 채용이 된 거예요."

"두 명의 이사님이요?"

이사라니.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뭘 알고 추천했다는 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그리고 다른 일이요? 뭘 하셨는데요?"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요?"

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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