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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87화 (28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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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시선은 땅을 향하고 있지만, 중간 중간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훔쳐보곤 한다. 아라를 쳐다보자 녀석이 대신 대답했다.

"얘는 수영이래. 김수영."

"수영이? 예쁜 이름이구나."

무심코 손을 뻗어 수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녀석은 나지막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을 뿐인데, 내민 손이 괜히 뻘줌해졌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침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가 잘못 봤으면 애를 때리려고 한 걸로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아라가 반 발자국 나서 내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아빠는 애를 왜 놀래키고 그래?"

아라의 질책에 괜히 머쓱해졌다.

"아닌데...."

"아니더라도 얘가 놀랬잖아."

내 변명에도 불구하고 딸은 내 본심을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했다. 아라는 날 향해 눈을 한 번 흘기고는 수영이라는 애를 돌아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수영아, 괜찮아? 우리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냐. 그냥 생각이 별로 없을 뿐이지."

수영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라는 녀석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달랬다. 저런 어처구니없는 말로 위로하다니! 사뭇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마치 여동생을 쓰다듬는 것 같은 아라의 능숙한 손길이 순간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라에게 어디서 만났느냐고 물어보았다.

"놀이터 입구에서 울고 있더라고. 이모랑 같이 왔는데 잃어버렸대."

"그래? 그럼 고객센터로 가서 방송해달라고 하면 되려나? 이모 이름이 뭐니?"

이번에는 놀래키지 않으려고 무릎을 굽히고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수영은 이내 아라의 뒤로 숨어버렸다. 내가 무슨 말만 꺼내도 질색하며 뒤로 물러서는 통에 대화는커녕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수영이는 아라의 뒤에 바싹 붙어 귓속말로 지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수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내게 말했다.

"얘 배고프대."

".....이모 이름 말한 거 아니었어?"

"근데 나도 배고파."

생판 모르는 아이를 어디선가 주워 온 아라도 기가 막혔지만 그걸 또 졸졸 따라와서 지 위장 상황까지 말하는 녀석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니가 무슨 복화술사가 들고 있는 인형이냐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 딸이라도 복화술사가 뭔지는 모를 것 같아서 참았다.

근처에서 간단한 거라도 사 먹일까 싶었는데 둘러보니 마트 앞에 작은 카페가 하나 보였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가 앉혀놓고 와플과 우유를 사주었다. 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혀가며 와플을 먹고 우유를 마셨다.

"천천히 먹어라. 안 뺏어 먹는다."

두 여자애끼리 무슨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워낙 작은 목소리라 들리지도 않았다. 나도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사온 책을 보며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배가 불렀는지 수영이는 다소 불안감이 사라진 듯 보였다. 그제야 이모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물론 내게 직접 말했다는 게 아니라 이번에도 아라를 거쳐서다. 생전 처음 보는 애의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도 아라는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곳에서 만난 또래 친구가 기쁜 모양이었다.

"이모 이름이 뭔데?"

"선미래요. 박선미."

"박선미?"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그런 걸까. 그리고 뭔가 이상했다.

"수영이 성이 김 씨라고 하지 않았어? 이모인데 왜 성이 다르지?"

"이모면 성이 같아야 해?"

"...됐다. 뭐, 그냥 아는 사람이거나 하는 걸지도 모르지."

전화를 걸자 꽤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에게 놀라지 말라고 전제한 후 여기의 위치와 전후 사정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전화를 끊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는 기세를 보아 분명 수영을 찾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카페 문을 부술 것처럼 밀고 들어온 여자는 곧장 우리 테이블로 달려왔다.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자 수영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모!"

외친다고 해봐야 겨우 다른 사람의 보통 말하는 목소리 정도였지만, 여태까지 낸 목소리의 데시벨이 모기소리를 이길까 말까 싶었던 녀석이니 이 정도면 큰소리지 싶었다. 선미라는 여자는 수영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곤 고개를 꾸벅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느라 수영이를 놓쳤거든요."

"감사는 제가 아니라 이 녀석이 받아야 할 겁니다. 제 딸이 댁의 아이를 데리고 왔어요."

얼굴은 이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인상이었는데 눈빛이 무척이나 맑았다. 길고 풍성한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 하나같이 검은색이었다.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그녀의 옷차림이 예전 선영이 즐겨 입는 옷차림과 비슷해서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선미는 아라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네가 수영이를 보살펴 주었구나. 어쩐지..."

선미는 몹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지? 어른도 아닌 아이가 자기의 애를 보살펴 주었다는 것에 안도하는 걸까.

"아라라고 했지? 정말 고마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걸요."

"정말 의젓하구나. 기특하네."

"감사합니다."

어휴... 내 딸이지만 이럴 때 참 얄밉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찌나 의젓하고 얌전하게 구는지 지 애비에게 쏘아붙이는 것의 절반만 밖에서 하고 다녔어도 저런 칭찬은 절대로 못 들을 게 분명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선미는 수영이를 데리고 나가며 우리 테이블의 음식값을 모두 지불했다. 내가 마다하려고 했지만, 옆에서 아라가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헛숨만 삼켰다. 수영이는 선미의 손을 잡고 나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녀석의 팔에 달린 레이스가 나폴거렸다. 그 둘이 그렇게 떠나고 난 뒤 우리는 다시 테이블에 남았다. 와플이 좀 남았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사온 책을 한쪽에 밀어두고 카페 입구에 놓여있던 신문을 펼쳐드는데 아라가 말했다.

"아빠. 그러고 보니까 말야."

"뭐가?"

"이모면 원래 성이 다른 거 맞아. 쟤가 김수영이니까 이모가 박선미인 게 이상한 게 아니라고. 이모면 외가쪽 친척이잖아. 아빠, 또 착각했어."

"어? 어....아...."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처럼 쏘아붙이는 말투도 아니고 그저 차분하게 말했을 뿐인데도, 아라의 말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쿡 찌른다. 그래, 외가쪽 친척이면 성이 다른 게 맞다. 내가... 내가 이상한 거다. 문득, 선영이에게 우리 집안 내력을 털어놓았을 때가 떠오른다. 아마도 내가 그녀의 오피스텔에 무작정 들어가 얹혀 살 때였을 거다. 하루는 그녀와 가득 몸을 섞고 누워서 쉬고 있다가 내가 엄마와 같은 성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럼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성이 같았던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단 한 번도 그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참을 주저하던 나는 겨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결혼을 하신 적이 없어. 그냥 날 가지신 거야. 난 내 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몰라. 엄마는 내 아버지가 몹시 나쁜 사람이라고만 이야기하셨고, 단 한 번도 어떤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 내 삼촌들도 철저히 함구하고 있고..."

"아... 그랬어?"

"응. 아무래도 고명딸이 시집도 안 가고 가진 자식이니 세상에 부끄럽기도 하겠지. 우리 집에서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금기사항이야. 아버지 이름을 모르니 성도 엄마 쪽에서 따서 지은 거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엄마는 고명딸도 아니었다. 이십 년 넘게 모르고 살아왔는데... 나에겐 이모가 있었더랬다. 리사와 마리가 생일잔치를 열어주던 날, 그 밤에 엄마가 내게 털어놓은 사실은 꽤나 내게 충격적이었다. 엄마에게 여동생, 그러니까 내게 이모가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선영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줄 순 없으니까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놓였다. 내게 그런 집안 내력이 있다고 해서 그녀가 날 달리 보거나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선영 역시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집안 내력을 가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 다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에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함께 찾아뵈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자기가 나한테 그런 식으로 위로했었구나. 나에겐 아버지가 계시기라도 하지 않냐고. 그러니 잘 해드리라고...."

"응. 그랬지."

"혹시 자기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원망해?"

"원망?"

"응. 뭐랄까. 정상적인 집안에서 자라지 못하게 한 책임이 있는 거잖아. 그렇게 만든 부모님을 원망한 적 없어?"

"원망이라...."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어린 시절에는 남들에게 다 없는 아버지가 왜 나한테 없냐고 대들다가 엄마한테 많이 맞기도 했다. 그러나 자라면서 보고 느낀 사실은 아녀자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 고생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걸 보고 있으면서 차마 엄마를 원망할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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