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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거기 분들은 자기가 내 남편인 줄 알고 있는데 유부녀가 어떻게 수녀가 돼? 안 그래?"
"그... 그런가."
남편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썩 나쁘지 않다. 선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작년 봄에 거기서 몇 주 지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햇볕 아래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기분 말야. 다시 서울로 가서도 늘 여기가 생각나서 종종 내려오곤 했었어."
그녀는 나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더니 몸을 돌려 나와 마주한다.
"자기야. 난 전혀 순결하지 않아. 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자기를 그저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다릴 자신이 없어. 아무도 잡아주지 못한다면 난 아마도 금방 흔들리고 말 거야. 그래서 그분들에게 몸을 맡기는 거야. 내가 그분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그분들이 날 돌봐주게 될 거야."
"선영아...."
넘어가기 직전의 햇볕이 그녀를 비추었다. 낮도 밤도 아닌 그 경계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 역시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그걸 굳이 말하는 이유가 뭐야?"
"그럼에도 난 내가 순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뭔 소리야, 그건."
"마찬가지로 너도 순결하다고 생각해."
"......자기는 내가 하던 일을 모르지 않잖아."
난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건 지난 일이야.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과거라고. 난 이제 앞일을 보며 살 거야. 내가 선영이 너한테 순결한 사람이 되듯이 너도 나에게 순결한 사람이 되어주면 돼. 그걸 약속해줘."
내 말을 들으며 가만히 강가를 바라보던 선영은 마침내 내가 바라던 말을 해주었다.
"약속할게. 그리고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와줘."
대답 대신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서로의 입술을 찾아 빨아본다. 한 번 붙은 두 입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해가 저문 뚝방을 떠나 방으로 옮길 때까지도, 우린 서로를 탐하고 또 탐했다. 달빛이 모두 사라지고 새벽녘이 다가오고 나서야 우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몸 안의 정액이 고갈되어버린 느낌이다.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선영의 안으로 완전히 옮겨져 버렸다. 헐떡일 힘조차 없어 숨을 간신히 가누며 그녀를 끌어다 안아본다. 등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사랑해."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내 팔에 그녀의 손이 얹어진다.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며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넌 결코 혼자가 아니게 될 거야. 늘, 나와 함께야."
선영이 잠시 꿈틀거리더니 몸을 돌려 나와 마주한다. 십 센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간격을 두고 그녀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잘 다녀와."
나 역시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속삭였다.
"다녀올게."
다시 입을 맞추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내 안이 꽉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 밤이 영원했으면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선영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던 그녀가 잠에서 막 깨어 상체를 일으킨 나를 보고 웃었다.
"자기 머리 너무 웃겨. 꼭 까까머리 중학생 같아."
모텔 천장에 거울이 붙어 있었다.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눕자 천장에 내 모습이 비쳤다. 어제 밤새 하느라 옷도 입지 않고 잠들었다. 머리카락은 아주 짧았다. 거기에는 내가 봐도 낯선 내 모습이 있었다.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그 다음 가사를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킨다.
"어서 일어나. 들어가기 전에 밥이라도 먹어야지."
날 재촉하는 선영을 보며 고개 저었다.
"밥보다 중요한 거 먹고 싶은데."
"뭔데?"
"밥은 들어가서도 먹지만, 이제 들어가면 못 먹는 거 먹고 싶어."
선영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비상한 그녀였다. 이불을 들춰내고 다리 사이의 물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밥보다 이게 중요해?"
"네! 그렇습니다!"
씩씩하게 경례까지 올려붙이며 대답하자 선영은 폭소했다. 그녀는 내 다리 사이로 오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심스럽게 입으로 물었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 장면이 너무도 섹시했다.
"하아..."
쮸웁- 쮸웁- 소리를 내가며 빨아주는 선영의 모습을 천장에 비춘 거울을 통해 보고 있다. 이제 들어가면 이런 극상의 서비스를 한동안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뭘 그렇게 생각해?"
상의는 그대로 입은 채 하의만 벗은 선영이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손을 뻗어 선영의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
"이 감촉을 잊지 않으려고."
"그래. 나도 그럴게."
아침이라 더욱 단단해진 물건이 그녀의 안에서 꿈틀대었다. 그대로 녹아버리고 싶었다. 입소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우린 서로 떨어질 줄 몰랐다. 입소 시간에 늦기 직전까지 몸을 섞다가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타고 훈련소로 향했다.
입소할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분명히 선영이가 울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누구보다 더 높이 손을 들어주었다. 기초 군사훈련과 병과교육을 마친 뒤에는 파주로 배치 받았다. 가능하면 본가와 가까운 쪽, 하다못해 충남과 가까운 쪽이라도 배치받기를 내심 바랬지만, 그런 행복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대에 배치받자마자 하계 유격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나이 많은 후임이 왔다고 선임들이 마뜩찮아 하는 터라 훈련에서는 욕먹는 일이 없도록 누구보다 이 악물고 뛰어다녔다. 다른 건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하강훈련이었다.
"훈련병 번호 복창합니다!"
"훈련병 122번!"
다리가 후들거린다. 높은 데 올라와서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올라오기도 전에 신 나게 구른 탓이다. 이 악마 같은 조교들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높은 데 올라오면서 다리에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하라구. 만약 다리에 힘이 풀려 자빠져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지들이 책임질 거야? 아니다. 조교를 탓할 일이 아니다. 탓을 하려면 우리 훈련조에 있는 저 미친 고문관 새끼를 탓해야 한다. 마지막 구호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이 미친놈은 "스물!", "마흔!", "여든!"을 외쳤다. 아오, 내가 진짜. 대체 그놈 때문에 팔벌려뛰기를 몇 번이나 한 거냐. 숨이 턱까지 차올라 단순한 덧셈도 잘 안 된다. 우리가 얼마나 빡시게 팔벌려뛰기를 했는지 원래 막타워 층마다 PT를 하게 되어있는데 이미 죽을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를 본 조교들이 PT를 경감시켜 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 시키지는 않는다! 이 악마 같은 놈들!!
"애인 있습니까?"
"있습니다!"
분명 교육받을 때는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11미터라고 했거늘.... 뭐야, 이건 20미터는 충분히 넘겠구만. 되도록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정면을 바라본다. 내 발 아래 높이에 있는 나무에 앉아있던 새와 눈이 마주친다. 오오.
"그렇다면 애인 이름! 힘차게 3회 부릅니다!"
"선영아! 선영아! 선영아!"
"기세 좋습니다! 올빼미 하강!"
"으아아아악!!"
이를 악문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티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뛰어내린다. 어차피 가야 할 길, 제 발로 가는 게 속편하다. 내 바로 앞에 있던 121번 훈련병은 버티고 버티다가 아주 친절하신 조교님의 발길질을 받고 나서야 뛰어내렸다. 아니, 밀려 떨어졌다고 해야 정답이겠지.
막타워에서 땅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대에 돌아가면 선영이 편지가 와 있으려나. 지난 편지가 유격 오기 사흘 전에 받았으니 돌아가면 당연히 있을 리라는 기대가 절로 든다.
"착지자세가 불량한 올빼미들은 이쪽으로 집합! 다시 PT 시작하겠습니다!"
"으악!"
"목청 봐라! 집합!"
"으악!!!!"
온몸 비틀기를 하면서 올려다본 1998년 6월의 하늘은 맑았다. 젠장! 비가 오란 말이다. 제발 비!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고, 훈련은 여전히 고되었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건 수시로 날아오는 선영의 편지와 면회였다. 그러는 동안 국방부 시계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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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는 뭘 써도 재미가 없으므로 그냥 휙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