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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이제 어지간한 업무는 그녀에게 대부분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삐진 얼굴로 나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남은 전표들을 살핀다. 반대쪽에는 아가씨와 주방의 요구사항을 적어놓은 공책이 있었다. 한편에는 등기부등본과 부동산 관련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선영의 충고에 따라 요새 유미의 자산관리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후아아... 진짜 다들 힘들긴 힘들 구나."
아직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나와 달리 학교에서 구직활동을 벌이는 4학년들이 죽는 소리를 하는 걸 보고 요새 경제가 불황이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현금의 흐름으로 대번에 표가 났다. 선영은 지난 몇 년간의 자금 흐름을 굉장히 충실하게 잘 정리해두었고 나는 그걸 전산화 시키는 과정에서 확실히 올해의 분위기는 작년과 다르다는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기업들이 판공비나 영업비를 줄이고 있었고 그 여파는 이곳에도 찬바람을 불어오게 하고 있었다. 나는 유미를 닦달하여 가게의 규모를 줄여 내실을 기하고 쓸데없는데 돈을 못 쓰도록 감시하는데 집중했다.
여름부터 느낀 나의 불길한 예감은 그 해 11월, 기말고사를 한창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현실로 닥치고 말았다. 졸업논문 심사를 위해 과사로 들어간 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TV를 가리킨다. 과사 한쪽에 놓인 구형 텔레비전에는 긴급뉴스라는 나오고 있었다. 앵커는 IMF다 뭐다 하는 소리를 계속 쏟아냈다.
"저게 무슨 말이에요?"
팔짱을 낀 채로 TV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선배 한 명에게 물어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답했다.
"우리나라가 망했대."
"네에?"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TV든 라디오든 신문이든... 모두 그 이야기만 주구장창 해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회사 하나둘 망하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큰 뉴스거리도 못 되었다. 그 후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졸업논문은 의외로 쉽게 통과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교수들도 정신이 없더란다. 기말시험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흘러갔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졸업뿐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던 내 예정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선영에게 털어놓았다.
"나, 어디 좀 다녀오려고."
"어디?"
"어딘지는 나도 아직 모르는데 기간은 약 28개월 정도야. 2년 하고 4개월."
선영은 잠시 멈칫했다.
"군대.... 말야?"
"응."
"하아.. 언제 가는데?"
"몰라. 아직은. 난 여태 연기신청만 계속 해오고 있던 터라 다음에 병무청에 가서 신청을 좀 해봐야 할 거야."
"신청하면... 바로 가는 거야?"
"나야 모르지."
선영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내 곁에 항상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있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땐 그때고... 지금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녀의 텅 빈 마음을 가장 크게 채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자긴 거짓말쟁이야."
딱히 심하게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선영을 꼭 안아주었다. 병무청에 가니 자원입대의 경우 날짜를 정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졸업식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3월로 정했다. 내년 3월 첫째 주 월요일이 내 입대일로 정해졌다.
"3월 2일?"
"응."
"알았어."
내 입대 일을 듣고도 선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한 번 내려갔다 왔다. 엄마에게 군대 간다고 이야기하고는 삼촌들과 술을 마셨다. 연이은 술에 간덩이가 붓기 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선영과 함께 지냈다. ROSE에 가지 않는 그녀였지만, 가끔씩 아침 일찍 나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올 때가 있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말을 얼버무리곤 했다. 나도 자세히 묻지 않았다.
입대까지 별다른 일이 없는 나는 대부분 그녀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선영이 먹을 아점을 차린다. 같이 밥을 먹고 외출을 했다. 마트를 가거나 근처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겼다.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이도저도 아니면 공원에서 산책을 즐겼다. 집에 들어와 몸을 섞었다. 콘돔은 쓰지 않았다. 항상 그녀의 안에 나를 쏟아넣었다. 오후에는 비디오를 빌려와 같이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때로는 그녀의 몸을 마사지해주었다. 그녀는 내 손길을 즐기며 잠이 들었다. 그런 생활이 겨우내 이어졌다.
그녀와 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대개는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영화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정작 같이 살고 있는 우리임에도 서로의 가족이라든가 과거라든가...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다. 몸의 대화는 많이 나누었지만 말이다. 군대를 가고 나면 나를 기다릴 것인가 어쩔 것인가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그녀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현재만이 존재했다.
쉬는 동안 ROSE에 잠깐씩 나가서 일을 도왔다. IMF 이후 잠시 휘청거리던 그 가게는 놀라울 정도로 발휘되는 유미의 지도력에 금방 자리를 잡아 나갔다. 심지어 다른 가게를 인수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것에 대해 놀라워하자 유미는 싱긋 웃으며 이런 게 공격적 M&A라는 소리까지 해댔다. 그냥 놀고 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 여자...
내 졸업식에는 유진이가 왔다. 선영과 함께 학교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진이가 선영의 오피스텔로 찾아온 것이다. 더 이상 이 방이 선영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오래전에 눈치 채었을 텐데도 유진은 그 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업을 축하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셋이서 학교로 갔다. 엄마와 큰 삼촌이 교문 앞에 와있었다. 엄마는 내가 예전 빌라에서 방을 빼고도 서울에 머무른다고 말했을 때부터 누군가와 지낸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한 모양이었지만,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다. 선영을 힐끔 보고 내게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라고만 물었을 뿐이다. 대답을 못하고 쭈뼛거리는 선영을 대신해서 내가 나보다 두어 살 많다고 했더니 애 낳기 안 좋은 나이라고 좀 싫은 내색을 했다. 애라니... 우리 엄마는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가서 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3월 1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나보고 나갈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더니 자기는 무슨 이삿짐을 싸듯이 짐을 챙겼다. 사실 난 논산으로 갈 준비는 이미 다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녀까지 왜 짐을 싸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선영은 비밀이라고만 했다. 함께 차에 올라타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차가 충남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행선지를 말해주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산속에 자리한 그곳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을 한 분이 나와서 맞아준다.
"어서 와요. 그동안 와 준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에스더...라고 했던가. 저 나이 드신 수녀님이. 그나저나 그동안 왔었다니, 항상 나가서 며칠씩 안 들어오던 건 이곳에 왔었다는 걸까. 선영을 힐끔 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당분간 신세를 지겠습니다."
선영은 수녀님께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에스더는 그럴 거 없다면서 선영의 손을 맞잡았다.
"신세는요. 저희가 다 고맙죠. 그런데 남편 분은 어떻게?"
그러자 선영은 날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이이는 좀 멀리 출장을 가서요."
"아, 그러시구나."
선영은 수녀님들이 묵는 방 한쪽에 자기 거처를 배정받았다. 그녀가 짐 푸는 것을 돕고 나서 수녀님들에게 양해를 얻어 다시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가까운 곳에 강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간다. 강가에 가니 모텔촌이 하나 있어 거기에 묵기로 했다. 내일 아침이면 훈련소로 들어가야 하기에 이게 민간인으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하루다. 저물어가는 해의 마지막 빛을 서쪽에 두고 선영의 손을 잡고 강가를 거닐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좀 쌀쌀했던 터라 재킷을 벗어 선영에게 덮어 주었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자기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그게 벌써 1년 전이야."
"그러네."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하기 그지없는 만남이었지. 나는 지나에게 한창 서비스를 받는 중이었고 선영은 소리도 없이 다가와 그런 모습을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이한테 과외 선생님 생겼고 남자라는 말을 듣고는 꽤 걱정했었어. 게다가 그렇게 마주치고 나니 아무래도 자기를 유진이 곁에 두기가 너무 겁났던 거야."
"알만하다."
"나중에 그때 ROSE에 와서 깽판 치는 걸 보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어. 자기를 유진이가 아니라 나한테 붙들어놓을 계획."
그러고 보니 그런 노예문서가 있었지. 정신없는 와중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마, 그럼 그게 진짜 그런 금액이 아니라...."
"어머, 정말 믿었던 거야? 그런 어처구니없는 청구서를?"
"끄응....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머리를 감싸 쥐는 날 보며 선영이 살포시 웃었다.
"후후. 그런데 말야. 어느 순간부터 자기를 나한테 붙들어 놓은 게 아니라 내가 자기한테 붙들렸다는 느낌이 들었어. 난 그런 자격이 없는데."
"선영아...."
"유진이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했어. 유진이가 처음에는 내가 미웠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때 아빠 돌아가실 때 자기가 내 곁에 있는 걸 보고 마음을 접었다고 하더라고. 유진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응? 으음...."
대답을 얼버무렸더니 선영이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뜨끔했다.
"이렇게 인기 많은 우리 자기가 군대 간다는 이야기한 이후로 수녀님이랑 이야기 많이 했어. 그리고 당분간 거기 일을 돕기로 했어."
"그래서 돌봄의 집으로 간 거야?"
"응."
"난 아까 니가 거기 가는 걸 보고 수녀 되겠다고 하는 건 줄 알고 기겁했어."
선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더없이 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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