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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선영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곧바로 내가 직접 하는 수업 실습이 시작되었다. 연습도 많이 못 해보고 바로 시작하느라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지만, 지애가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주고 도와주어서 큰 실수를 하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의 짓은 질문에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금세 익숙해졌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종 평가는 합격. 마지막 금요일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체 회식을 했고 또 그다음 날 토요일에는 실습 동기끼리 모여 서로를 축하하며 식사를 했다. 4주가 지나면서 태근이 형은 현아에게 들이대는 모양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겁만 내던 현아도 점점 그런 형을 덜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뭐.... 은애의 표정이야 뭐 씹은 표정이겠지만.
"나중에 임용고시 붙으면 연락해요.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담당 사수였던 지애와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와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게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녀는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그렇게 그녀와는 끝이 났다.
유진의 과외는 다시 재개되었다. 녀석과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교생이 끝나고도 내가 과외를 가지 않고 있자니 녀석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안 잡아먹을 테니 순순히 따라오라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나마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따라갔다. 녀석은 날 잡아먹지 않는 대신 본격적으로 수업을 칼같이 진행하는 과외를 시작했다. 학교 진도는 물론이고 어디선가 영어로 된 문제집까지 구해 와서는 그걸 풀겠다고 도와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녀석의 목표는 S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외국에 있는 대학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녀석은 날 힐끔 보더니,
"꼴 뵈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아예 한국을 뜨려구요."
라고 답했다. 계집애가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마리와 리사는 그 이후로 전혀 보질 못했다. 교생 실습이 끝날 때쯤 앞집은 비어졌고 얼마 뒤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지나가다 넌지시 물어보니 마리는 부산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기 위해 자퇴를 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녀석도 녀석이지만 리사가 가끔은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커다랗고 선량한 눈망울에 한가득 실망을 담게 한 사람이 바로 나이기에 차마 보고 싶다는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더 이상 그 빌라에서 살지 않게 되었다.
교생실습이 끝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기말고사에 돌입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거의 준비도 못 하고 시험에 임하게 되었지만, 어찌되었건 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 하는 순간, 나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강의실을 나온 다음 기말고사 동안 혹사당한 정신을 쉬게 하고자 태근이 형에게 연락을 했다. 교생 실습을 마치면서 형은 나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었다. 여름 방학 전까지는 현아를 꼬셔 볼 테니 그 결과를 알려주겠노라고 말이다. 전화를 걸어보니 학교 안에 있다고 했다. 30분 후에 도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저런 생각하며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태근이 형이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혼자가 아니었다.
"여어, 한석 군. 시험 다 끝난 거야?"
"방금이요. 형은요?"
그러자 형은 옆에 있는 현아를 가리키며 웃었다.
"난 다 끝났는데 우리 꼬맹이가 아직 덜 끝나서 말야. 내일까지는 학교에 나와야 할 것 같아."
"한 과목이니까 굳이 따라 나오지 마요. 오빠."
"그래도 우리 공주님 혼자 다니게 할 수는 없지. 누가 채어가서 주머니에 넣어 가면 어떻게 해. 이렇게 쪼끄마한데."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건 부끄럽다고 형을 가볍게 투닥거리는 현아를 쳐다보면서 뭐 먹으러 갈지 묻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참 보기 좋았지만, 염장질은 부담스러웠다. 메뉴 결정에 대해서 몇 마디 나누다가 별안간 형이 호기롭게 외쳤다.
"아구찜 맵게 잘하는 데를 찾았어. 가자!"
맛있겠다며 좋아하는 현아를 보며 난 알았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맵다... 이 말이지.
"호의는 고맙지만 전 여기까지... "
정중히 사양하고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형에게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으악. 제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로 먹으러 가자구요! 네에?
그렇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고문과도 같은 식사를 맞이했다. 어느 정도 먹고 나서 입과 속에서 일고 있는 불길을 다스려가며 먼저 일어섰다.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 즐겁게 데이트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내가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방학이 되면 가겠노라고 미리 약속해놓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ROSE로 향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유미가 있었다.
"어머, 한석 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아, 오늘부터 방학이라 서요. 전에 말씀드린 대로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흐흠. 낭군님 너무 험하게 굴린다고 선영이한테 욕이나 안 먹을려나요?"
"하하, 설마요."
교생이 끝나고 3주 정도 지났을 무렵, 유진의 과외를 하고 있으려니까 유미가 나타나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선영이 보름 정도 무단으로 나오질 않아서 가게가 점점 안 굴러가고 있다고 하소연이다. 예전에 선영이 없어도 잘 굴러갈 가게라고 말한 것은 아무래도 허세였던 모양이다.
사실 유미만 그녀를 못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장례를 치른 날, 밤을 함께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되어 선영이 날 내보낸 이후, 거의 한 달을 그녀를 못 보고 살았다. 한 번 보러 가고 싶었지만, 완고한 그녀의 고집이 날 또 다시 밀어낼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유미의 말을 들어 보니 연락도 안 받고 집에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길로 유미 모녀와 함께 선영을 찾아갔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별수 없이 내가 도어 락을 열고 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열린다. 내가 선영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유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방바닥에는 빈 보드카 병과 음식 찌꺼기 등으로 개판이 되어있었다. 눈물 자국이 얼굴에 선명한 선영이 방 한구석에 폐인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딱히 자살을 기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문불출하는 동안 불규칙한 식사와 폭음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길을 향해 특급으로 달려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약간의 영양실조 기색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었다. 선영은 입원까지 필요 없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일어나면 정말 안 볼 거라는 엄포를 놓는 유진이까지 동원하여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약 이틀간 링거를 맞아가며 요양한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나 역시 준비해두었던 짐을 가지고 그녀 집으로 같이 들어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짐 푸는 데?"
"그러니까 그 짐이 뭐냐고."
"내 짐."
내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 몇 벌과 책이 다였다. 어영부영 눌러 앉은 날 보고 선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날 밀어내진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방 안 가득한 곰 인형들과 살고 있던 그녀의 방에 가장 큰 곰 한 마리가 더 얹어진 셈이다. 가게에 나가지 않는 선영 대신 내가 유미에게서 일거리를 받아와 집에서 처리했다. 내가 하는 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선영은 중간 중간 잔소리를 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녀가 다시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ROSE에 나가지는 않았다. 집에 가져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제약이 많았다. 유미는 나에게 방학이 되거든 본격적으로 ROSE에서 일해주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고 관리하는 일에 슬슬 재미가 붙던 참인 나는 선영과 의논한 끝에 수락했다. 그래서 지금 방학 첫 날이 되자마자 난 ROSE에 와 있는 것이다.
"유미 씨. 요새 미수금이 많아요. 아직 현금 흐름에 여유는 좀 있지만, 영업 쪽 회사 위주로 빨리 청구하는 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전 싫은 소리 같은 건 어려워서...."
"아무리 그래도 어음 같은 걸로 받아오지는 마세요. 요새 명동 분위기 안 좋다고 할인도 잘 안 해줘요."
"안 해주면 말죠, 뭐."
"속 편한 소리 하실래요! 가게 망하는 꼴 보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입을 삐쭉 내민 유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젠 제법 유미를 다루는 법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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