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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선생들이 다 모이자 주임 선생님은 올해 예산의 실적을 이야기하며 집행률이 미진하니 신경 좀 써달라는 이야기로 회의를 시작했다. 조만간 별관 체육관에 배드민턴장을 설치할 계획인데 2코트로 할 건지 3코트로 할 건지 아직 못 정했다고 한다. 이제나저제나 교생 자르는 이야기가 대체 언제 나오는 건가 싶어 주임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학생 지도에 관한 이야기만 좀 더 하더니 회의의 끝을 고한다. 죽다 살아난 나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지애는 만세를 부르고 싶은 내 팔을 꺾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죠, 송 선생?"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이들의 시선이 한 손을 들고 있는 지애에게 향한다. 난 지애의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쪽으로 향하는 저 모든 시선이 날 비난하는 것 같아 온몸이 욱신욱신했다.
"지난번에 들어온 그 익명 투서는 어떻게 된 거죠? 저희 교생들의 행동이 문란하다고.... 지적한 그 투서 말입니다."
지애는 이 말을 하면서 "문란"이라는 단어에서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 짧은 시선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적의? 분노? 실망? 뭐라고 해야 하나 저건....
"담당 사수로서 제 교생을 믿고 싶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가는 것도 무리라고 보는데요."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러자 주임이 좌중을 진정시켰다.
"아, 그 문제는 말이죠."
모두의 시선이 주임을 향한다. 나 역시 마른 침을 삼키며 주임을 쳐다보았다.
"특별히 실명이 언급된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 분들이니 굳이 문제 삼아서 사기를 꺾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투서 문제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부디 남은 기간 동안 잘 해내 주시길 바랍니다."
교...장? 교장? 백 교장! 그래! 그래서 유미가 우리 교장이 누구인지 물어보았구나! 유미가 해냈구나! 어떤 방법을 쓴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 나름의 조치를 취한 모양이다. 그녀는 우리 교장이 누구인지 미리 알고 있었고 어쩌면 친분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난 살아났다! 아임 얼라이브!
"너무 좋아하지 마요. 난 다 알고 있으니."
"........네."
지애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약 3초간 좋았다가 다시 급속도로 저하된 기분의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교실에서 아침 조회를 하는 동안 난 유진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딱히 내 시선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히 날 바라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저 앞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여우 같은 계집애. 어휴.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고 그렇게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투서를 보내다니.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뇌회로면 그런 생각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건 녀석의 엄마가 그걸 또 막아주었다는 거다. 게다가 난 녀석의 엄마와 관계를 할 뻔하기도 했다. 하아. 세상은 요지경이라더니. 정말 그 말이 딱이네.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까 오전에 만난 태근이 형이 점심때는 체육관으로 오라고 했었다. 안 그래도 지애와 붙어있는 건 꽤나 곤욕스러웠기 때문에 종이 울리자마자 도망치듯 별관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이십여 명 남자애들과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먹는 일에는 잽싸구나. 한석."
"먹는 일이라뇨?"
"점심시간인데 먹어야지. 안 그래?"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아이들이 더 몰려들었다. 형과 꽤 스스럼없이 지내는 녀석들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각종 운동부 애들이 대부분이었고 운동부가 아닌 애들도 여럿 있었다. 잠시 후,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체육관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
"피자 시킨 분이요."
"아, 여깁니다."
아이들의 환호 속에 피자가 체육관 바닥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대충 열 판까지는 셌는데 그 이후로는 포기했다. 못해도 스무 판은 넘는 것 같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
형과 나도 피자 한 판을 챙겨 관람석 쪽으로 가서 먹기 시작했다. 뜨뜻한 치즈를 길게 늘어뜨리며 먹는 맛이 좋기도 하거니와 이런 의외의 장소에서 먹는 기분도 꽤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웬 피자에요?"
"뇌물이잖아. 뇌물."
"뇌물이요?"
"그래."
형은 핫소스 봉지 하나를 뜯어 피자 위에 듬뿍 뿌린다. 내 쪽으로는 못 뿌리게 말렸다. 난 그냥 먹고 싶어, 이 사람아. 형은 피자 하나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지난주에 애들이랑 치킨 내기로 농구를 했었는데 말이야, 반응이 좋더라고.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피자 내기로 했지. 물론 내가 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먹겠다고 애들보고 사오라고 할 순 없잖아. 그래서 내가 사는 거야."
"근데 그게 왜 뇌물이에요?"
"너 모르냐? 최종 평가에 학생들 의견도 들어가는 거?"
세상에나. 그건 그냥 형식적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었나? 그것도 이렇게 관리까지 해야 하는 거였어? 좀 감탄스러운 마음이 들어 말했다.
"형답지 않게... 지능적이시네요."
지능적이라는 말에 좋아하던 형은 잠시 후,
"인마! 그럼 나답지 않게 지능적이라는 건 내가 지능적이 못 된다는 말이야?!"
"......알아들으셨으니 이제부터 지능적이십니다."
한 차례 꿀밤이 날아왔지만, 피자를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하아. 그렇다고 학교에서 치킨에 피자라니."
"뭐, 어때. 선생님들도 가끔 음식 배달시켜 먹고 그러잖아."
"그래도 그렇죠."
피자 스무 판이 처음에는 많아 보였는데 굶주린 십 대들은 그걸 무서운 속도로 먹어치웠다. 금방 손가락을 빨고 있는 녀석들에게 남아있는 우리 피자까지 내주고 만다. 아이들이 빈 박스를 치우는 것을 보고 형이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자, 이제 먹은 값은 해야지?"
"뭐가요?"
"농구 한판 하자고. 너랑 전부터 하자고 말만 해놓고 한 번도 못했잖아."
"하하. 그랬었죠."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하여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형에게 운동복 하나를 빌려 윗도리만 갈아입고 코트로 들어선다. 먹고 나서 바로 뛰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모두 같은 조건이다. 금세 치즈 피자 팀과 불고기 피자 팀이 만들어진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잊고 금방 스포츠에 몰두한다. 몸을 움직인다는 건 참 좋다. 땀을 흘린 만큼 생각이 가벼워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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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분간은 ROSE에 못 간다고?"
"응. 미안. 나한테 맡긴 일인데...."
"아냐. 무리해서 부탁한 건 나니까 자기가 미안할 필요 없어."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온 나는 선영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투서 이야기는 빼고 학교에서의 입장 때문에 ROSE에 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선영은 쉽게 수긍해주었다. 요즘 으레 이 시간이면 호출이 오고 내가 전화를 건다. 어제는 호출이 오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선영이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음... 그 사람 경과가 안 좋아."
"그래? 그렇구나...."
"모르겠어. 난.... 그 사람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는데,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선영아."
그녀의 목소리는 꽤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짧은 침묵 후에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난 말이지. 혈육이라는 건 저주라고 생각해. 벗어날 수 없는 속박 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마."
"아니. 여기에서 그걸 더 크게 느껴. 그 사람은 그나마 내가 여기에 있으니 기댈 수 있기라도 하지만 연고도 없는 다른 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분들은 자신의 혈육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고..... 그렇게 그 저주에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까워."
"다른 분들도 돌보는 거야?"
"응. 아무래도 눈에 밟혀서... 수녀님들도 애쓰고 있는데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말야."
"그렇구나. 고생 많겠다."
"고생은 무슨. 자기가 더 고생이지."
순간 유미와의 행위가 떠올라 뜨끔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 선영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암튼, 뭐 필요한 거 없어? 이번 주에 내려갈 때 가지고 갈게."
"그러면 말이야. 우선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선영은 식료품과 냄비 같은 생활용품과 붕대와 연고 같은 의료품의 목록을 한참 동안 불러주었다. 역시 받아 적어야 했다.
"지난번에 내가 준 돈 있지?"
"응."
"그걸로 좀 부탁할게."
"그래, 알았어."
지난번 내려갔을 때 그녀에게도 급여를 전달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돈을 쓸 일이 없노라며 나에게 돈을 맡겼다. 전화를 끊기 전 선영은 묘한 소리를 했다.
"수녀님들이 왜 머리에 두건을 얹고 베일로 가리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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