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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73화 (27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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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이렇게 가슴 깊이 와 닿은 적이 없었다. 흥분하여 날뛰는 호랑이와 깊은 물 속에서 여의주를 품고 또아리고 있는 용이 지금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일개 인간인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싸움이다. 굳이 객관적으로 서로의 전력을 따지자면 호랑이의 전투력도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나와바리가 아닌 곳에서 날뛰다 보니 기세가 한풀 꺾이는 감이 없잖아 있다. 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송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됐어요. 더 듣고 싶지도 않고 더 볼 것도 없군요."

지애는 뺨이라도 후려칠 기세로 날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 앞에서 난 고양이 앞의 쥐와 똑같은 모양새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네요."

지애의 살벌한 기세와는 전혀 상반된, 한가롭고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요? 당신 지금 재미있다고 말했어?"

"그래요. 재미."

그러면서 유미는 내게 다가와 남방의 단추를 하나씩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동작은 전혀 급하지도 않았고 마치 단추 하나하나의 문양을 손에 익혀보기라도 할 것처럼 나긋나긋하고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당황한 나는 그런 유미를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렇잖아요. 당신이 그냥 한석 씨 담당이라면 한석 씨가 이런 가게에 들어가는 것만 확인해도 충분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도 굳이 대개의 여자들이라면 별로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을 가게 안까지 쳐들어왔군요. 들어와서 어떻게 노는가까지 다 봤으면 그냥 돌아가서 보고서나 쓰면 되는 문제 아닌가요? 근데 여기 서서 굳이 한석 씨를 몰아세우고 흥분하고 열 받고 있군요."

유미답지 않게 꽤 차분하고도 논리 정연한 태도였다. 지애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허둥댄다.

"그...그거야 최 선생은 내 담당이니...."

"담당이라고 한들, 그렇게까지 합니까? 당신 태도를 보고 있으니 흡사...."

"흡사?"

지애의 시선이 유미의 입에 박혀 떨어질 줄 모른다. 유미는 굉장히 오래 뜸을 들이며 듣는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애인 노는 거 잡으러 온 여자 같네요. 하는 짓이 꼬옥. 저희는 그런 분들을 제법 많이 만나봤어요."

"뭐라구요?! 지금 말 다했어요?"

기절할 듯이 놀라는 지애. 그러나 더욱 차분한 유미.

"아뇨. 아직 다 안 했어요. 아까의 우리를 보고 있던 당신의 눈빛은 뭐랄까. 부러워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알았죠. 아, 이 여자는 아직 한석 씨랑 못 자봤구나. 하고는 싶어 하는데. 내 말이 틀렸나요?"

"미친 소리 작작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지애는 소리를 꽥 지르고 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부서져라 닫히는 사무실 문을 보면서 걱정도 걱정이지만 황당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한석 씨는 몰라도 되는 소리예요. 그나저나 괜히 제 욕심 채우느라 일이 복잡하게 되었네요. 어쩌죠?"

"어쩔 수 없죠."

어깨가 축 늘어진다. 유미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묻는다.

"저희 유진이가 다니는 학교라고 하셨죠?"

"네."

"거기 교장 선생님이 백 씨였던가요?"

"아마도요."

"흐음. 그럼 뭐, 괜찮겠죠?"

우리 교장이 백 씨인 거랑 내가 교생에서 짤리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관관계를 파악하기에는 내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마저 하자는 유미에게 사양과 인사를 고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계속해서 후회를 거듭한다. ROSE에 간 것은 둘째 치고 유미와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다. 삐삐를 들여다본다. 만약 지금 선영에게 호출이 온다면 난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호출은 오지 않았다. 섹스를 한 것도 아닌데 그 후보다 더한 노곤함이 그제야 날 덮쳐온다.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젯밤의 일이 꿈속의 일이었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현실 그 자체였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옷을 갈아입고 출근 준비를 마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보다 나을 것이 없는 걸음걸이로 학교까지 간다. 학교에 가까워져 올수록 조금씩 보이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대로 아무도 날 탓하지 않고 있는 괜스레 혼자 위축이 되어서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 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는 화들짝 놀라다 못해 기절할 지경이었다.

"으악!"

"어라? 인마, 나야. 형이야."

태근이 형이었다.

"혀....형이었군요. 안녕하세요."

"그래, 난 안녕하다만 닌 결코 안녕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둔한 남자가 알아차릴 정도로 내 표정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 보이나요...."

"응. 이따가 곧 죽을 팔십 먹은 노인네처럼 굴고 있어."

한숨이 푹푹 새어 나온다.

"죽을 거니까요."

"뭐? 진짜?"

"말이 그렇다구요."

이 사람한테도 말조심해야 한다. 죽는다고 그러면 어, 그러냐. 그러면서 조의금 봉투부터 준비할는지도 모를 사람이다.

"참나, 나이도 어린놈이 팍팍하게 굴기는. 아, 참. 나 이상한 소리 들었는데 말이야. 너도 들었냐?"

"무슨 소리요?"

"얼마 전에 우리 학교에 투서가 하나 들어왔는데.... 음. 그 대상이 우리 교생들이던데?"

"네에? 투서요?"

찔리는 게 있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응. 뭐래더라. K대부속고에서 교육 실습중인 모 군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끌고 다니고 실습생으로서 부적합한 곳에 출입하고 있다나. 게다가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 뭐라더라."

눈앞이 노래졌다. 얼마 전 선영에게 받은 이후로 내가 끌고 다니는 선영의 차를 떠올린다. 좋은 장소라고 말하기는 차마 쉽지 않은 ROSE도 떠오른다. 게다가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라니! 설마 그 투서라는 게.....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태근이 형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근데 실습 중인 모 군이라고 하면 너랑 나밖에 없잖아?"

"그... 그렇죠."

두려움에 떠는 나와 달리 형은 태연했다. 으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러나.

"대체 누가 날 꼰지른 거지?"

"..........형을요?"

의외의 반전에 조금 맥이 빠진다. 형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응. 지난번에 친구들이랑 안마 갔던 게 걸린 건가?"

"그런데도 다니세요?"

"다닌다고 하면 어감이 이상하잖아. 한 번씩 몸 풀러 다니는 거지. 넌 안 가?"

몸은 저도 다른 곳에서 풀었습니다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뭐, 아무리 그래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설마 짜르기야 하겠어? 현장이라도 들키지 않는 이상 말이야."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으악! 현장을 들킨 나는 이제 어쩌냐!!

"안 그래? 어라? 니 표정이 왜 그러냐? 똥 마려?"

"아, 예. 에에.. 그러니까...."

"아직 시간 있으니까 갔다 와라. 보고 있는 내가 다 똥이 마렵다."

형의 참으로 고마운(?) 배려에 바늘방석 같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화장실에 앉아 나오지도 않는 똥을 기다리며 나는 끙끙거려야만 했다. 투서라니.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너무 딱 한 사람으로 수렴되다 보니 의심할 여지도 없다.

내 차와 ROSE, 그리고 유진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러면서 나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유진이 본인뿐이다. 게다가 내용을 들어 보니 날 노린 게 너무 티가 난다. 태근이 형은 자신을 노린 게 아니냐고 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 분명 나다. 나밖에 없다. 지애가 뜬금없이 그런 경고를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투서를 본 그녀는 현아를 불러다 놓고 나에 대해 물어보았을 것이다. 물어본 게 뭐였을지 짐작이 간다. 내가 그런 곳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현아는 나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자신이 본의 아니게 갔던 ROSE에 대해서도 털어놓았을 테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지애는 현장을 덮칠 수가 있었다. 그 이후는 내가 겪은 일이니 새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예비종이 울렸다. 가기 싫지만, 교무실로 가야 할 시간이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지애를 만나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사형수의 발걸음이다.

"아.. 안녕하세요."

"........."

어렵게 꺼낸 내 인사를 가볍게 씹어버린 지애는 날 노려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때 교무주임이 회의한다고 모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본 지애는 코웃음을 치며 먼저 회의석 쪽으로 갔다. 걸을수록 힘이 빠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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