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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사막보다 더 건조한 선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녀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평생.... 평생 남에게 고개 한 번 안 숙이고 뻣뻣하게 살던 당신이.... 지금 여기 누워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응?"
선영의 말투는 점차 격앙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난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쿨럭... 그래. 안 죽었다. 이년아...."
노인의 말문이 드디어 열렸다. 가쁜 숨소리와 잦은 기침 때문에 그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도 길게 말하지도 못하고 중간중간 한참을 쉬어가며 말해야만 했다. 그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흰자위만 가득한 눈이 우리를 보는 건지 아닌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말자... 그년이 죽고 나서.... 3년만인가......"
"엄마 이름 함부로 말하지 마!"
선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노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래? 그럼 뭐라고 부를까. 니 에미를 말야... 내 마누라를....."
"당신은... 당신은 엄마 이름을 부를 자격 없어."
"쿠쿠. 내가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있느냐. 에미를 버리고 도망간 딸년인 네가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선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외쳤다.
"난 도망친 게 아냐. 아니라구. 당신이야말로 도망쳤지! 가족이라는 것에서! 의무라는 것에서! 그렇게 가족을 내팽개치고, 필요할 때는 와서 빼앗고, 눈에 보이면 발로 차버리고..... 그게.... 그게 당신이 우리 가족에서 도망친 거잖아. 비겁하고! 잔인하고! 또... 또!!!"
선영의 울부짖음은 노인의 단 한마디에 딱 멈추고 말았다.
"미안하다."
노인의 말이 천천히 이어진다. 선영은 노인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멍하니 있었다.
"널 도망치게 해서.... 그렇게 만든 건 나다. 미안하다......"
그러자 선영이 노인에게 와락 달려들어 멱살을 쥔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깡마른 노인네의 몸이 상할까 봐 얼른 선영을 뜯어내어 제지했다. 나의 품에 안긴 선영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고?! 그게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야?! 끝이냐구! 인제 와서.... 인제 와서 그런 소리를 뭐 하러 해! 그럴 거면 차라리 엄마를 살려내! 이 자식아! 살려내라구!!!"
무어라 더 외치긴 했으나 그녀의 울음소리가 말소리를 삼켜버렸다. 내 품에 안긴 선영은 한없이 울었다. 그녀가 우는 것을 여태 몇 번 보아오긴 했지만,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처음 본다. 그녀가 진정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인은 천장을 보며 뜨문뜨문 말을 이어갔다.
"말자를 그렇게 보내고.... 장례에서 널 마지막으로 보고......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널 찾기가 힘이 들어 길바닥에 주저앉았지..... 그래도 천주님이 보살펴주셔서.... 이렇게 보는구나."
선영의 훌쩍거림이 잦아들어간다.
"말자는..... 네가 보낸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두었다..... 아무리 개망나니인 나도 그건 쓰지 못했다.... 내 베개 밑에 통장하고 도장이 있을 게다..... 내가 가거든 네가..... 쓰도록 해라."
"엄마 쓰라고 보낸 돈이야. 내가 쓸 일은 없어."
"말자는 이제 없다... 그건 나도 알고 너도 알잖아......."
선영은 눈물을 닦아냈다.
".......엄마 기일에 못 온 건 여기 누워있느라 그런 거야?"
"쿨럭...쿠.... 흐흐. 수녀님들 아니었으면, 그냥 길바닥에서 죽어 나자빠졌을 텐데.... 그래도 어찌하니 모진 목숨 안 죽고 살아가는구나...."
그제야 생각이 났다. 선영과 벽제에 있는 산소를 찾아가던 날, 그녀는 관리사무소에 누군가 왔다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어머니 산소에서 찾던 건 아마도 이 사람의 흔적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지난 어머니의 기일이면 이 사람이 낮에 왔다가 간 듯하다. 선영이 밤늦게 어머니 묘지를 방문하는 건 아마도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서였나 보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수녀 한 분이 오셔서 식사를 하라고 불렀다. 선영은 생각이 없다고 하기에 나만 수녀님을 따라 나섰다. 아직 거동이 가능한 노인 몇 분과 수녀님이 모여 앉아 조촐하기 짝이 없는 식사를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 역시 한자리 껴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한 잔 더 달라고 하고는 선영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한 그녀는 마치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선은 한결같이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노인의 흉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노인은 간간이, 아주 간간이 자신이 여태 살아온 이야기와 지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잠자코 앉아 있는 선영에게 녹차를 건넨다. 그녀는 그걸 조금 마셨다.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이미 빛을 잃고 번뜩이는 흰자위가 날 향한다.
"자넨.... 이 애 남편인가?"
"네? 아, 예....."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잔을 입에 대고 있던 선영이 눈만 치켜뜨고 날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군..... 이런 꼴 보여서 미안하군...... 사위 보면 주려고 담가 놓은 술도 있었는데....허허..."
웃던 노인은 기침을 해댔다. 타구통에 가래를 뱉는다.
"선영이를 부탁하네. 내가 애비로서 해준 것도 없는데..... 자네라도......"
"알겠습니다. 아버님."
노인은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이내 격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그의 몸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선영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수녀님을 불러왔다. 수녀 두 분이 달려와 노인을 진정시키고 한 명이 주사를 놓았다. 들썩이던 몸은 어느덧 가라앉았다. 노인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선영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수녀님들이 노인의 몸을 바로 눕히는 것을 도와드린 나는 조금 뒤늦게 따라 나갔다. 선영은 아까 그 에스더라는 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수녀님의 태도에서 직감적으로 뭔가 깨달았다. 그리 멀지 않은 게 분명하다.
"가자."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선영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와 나는 차를 세워둔 곳까지 함께 걸어갔다. 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괜찮아?"
"그럼, 괜찮지. 내가 뭘."
애써 태연한 척하는 그녀의 태도는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힘들어 보여."
"밤에 일하니까 그래."
"그게 아니라.... 잠깐 앉아봐."
내려가는 길가에 나무를 깎아 만둔 조잡한 의자가 하나 있어 선영을 앉혔다.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심이 가득한 그 얼굴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나야 사정을 잘 모르니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 아버지잖아.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 본 건데 이런 표정이면 어떻게 해?"
"저 인간은 아버지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냥 개자식이지."
"선영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 니 마음이 더 아프잖아."
"자기야....."
선영이 고개를 떨군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난....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니 기분을 잘 모르겠어. 아까 들은 이야기를 볼 때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저분이 네 아버지라는 건 사실이잖아. 네 어머니가 사랑했던 분이고 널 이 세상에 있게 한 분이야. 아무리 밉고 또 미워도 얼마 안 있으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되는 분이라고."
선영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이내 그녀가 팔을 뻗어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
"으아아앙...."
내게 와락 안긴 선영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 온 원망과 미움이 어찌 한순간에 없어질 수 있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사슬에 묶여 그것을 아예 모른 척할 수 없는 그녀의 통한이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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