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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58화 (25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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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새벽이라고 해서 당연히 동틀 무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해 뜨는 건 고사하고 아직 달도, 별도 다 사라지지 않았을 시각에 예린과 그의 일당은 행동을 개시했다. 모든 인원이 총출동한다. 그래서 소연은 빌딩에 혼자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메모를 남길까 하다가 어차피 그녀는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 자는 그녀를 깨워서 이야기했다.

"지금 저희는 다 나가요."

다 나간다는 이야기만으로도 그녀는 어느 정도 짐작한 눈치였다. 자다가 깬 사람인데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약간 신기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 건강히 돌아오세요."

"저는 할 일이 딱히 없는데요."

"그래도요."

소연이 바닥을 더듬어 뭔가 찾나 싶더니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돌아오시면, 잘 지내보고 싶어요. 사장님이랑."

그녀가 날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사실 전 사장이 아니에요."

"알아요. 이름이 한석 씨였죠? 성은 뭐죠?"

"최한석이요."

"그러면 최한석 씨."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잡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옛날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전쟁에 출전하는 주인공에게 신전의 여신관이 입 맞추며 축복해주는 장면... 비록 내가 싸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소연에게서는 그런 여신관 같은 신성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 영화의 끝 부분이 어떻게 되었더라. 잘 생각이 안 난다. 소연은 빙긋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날 만큼 상큼한 미소였다.

"잘 다녀오시라고 도장 찍어 드렸어요."

"고맙습니다."

"어머? 별로 안 고마워하는 말투인데? 이마로 만족 못 하시면, 어디 다른 곳도 찍어드릴까요?"

그녀가 말하는 "다른 곳"이 대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자못 기대되기도 하지만 일단은 거절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녀의 제안에 담긴 에로틱한 어감을 확인해보고 싶기는 한데 말이다.

"아뇨. 괜찮아요."

소연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니 예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출발한 모양이었다. 예린의 차에 올라타 출발했다. 등 뒤에서는 소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일 리는 없겠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지금부터 저희가 갈 곳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아요. 송 부장...이 있는 곳 말이죠?"

"네."

예린은 차분한 어조로 우리가 지금 갈 곳과 해야 할 일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어제 이미 들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복습하는 차원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언덕에 이르자 예린은 차를 세웠다. 그녀는 대시보드 위에 얹어진 작은 앰프를 켰다. 잡음만 흘러나왔다. 예린은 수납박스를 열더니 거기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책자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숫자가 잔뜩 적혀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빼곡한 숫자가 한가득이었다.

"그게 뭐죠?"

"경찰 무선 주파수 변경 방식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늘 날짜에 맞추면..."

예린이 앰프에 달린 다이얼을 돌리자 어느 순간 잡음이 사라지고 낮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오고 가는 목소리 사이로 출동이니, 상황실이니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예린에게 뭐냐고 묻자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찰 전체에 내려지는 상황실 무선입니다."

"이...이런 게 가능해요?"

"아날로그 방식이라 수신기가 있고 주파수만 알면 도청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거... 불법 아닌가요?"

그러자 예린은 살짝 웃었다.

"저희는 존재 자체가 불법인데요."

"그...그런가요."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싸움. 나도 모르게 입안이 바짝 말라간다. 여태까지 살면서 법에서 정한 걸 어겨 본 거라고는 기껏해야 무단횡단 정도였던 사람에게는 모든 게 부담스러웠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린은 무심한 태도로 카폰을 내밀었다.

"단축 번호 1번을 저로 설정했습니다. 무선 내용 중에서 연산동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나오면 저한테 전화를 하십시오. 받으면 그 사실을 전하시고, 받지 않더라도 두 번은 걸지 마십시오."

"내가 할 일은 그게 다인가요?"

"네. 한석 님이 저희처럼 할 순 없으니까요."

"당신들처럼 한다는 건..."

남자 네 명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던 예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도 최일선에서 싸우고 상대를 다치게 하는 걸 말하는 거겠죠?"

"....네."

그녀가 건네준 카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난 고개를 들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예린 씨. 하나만 물어볼게요. 사실대로 대답해주세요."

"대답할 수 있는 거면,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식이 아니라, 정말 있는 그대로 대답해줘요. 이게 예린 씨와 제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잖아요."

예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싸우러 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없던 불안도 생깁니다."

"아, 맞다. 미안해요. 미안."

내 실수를 깨닫고 멋쩍게 웃어보았지만 예린은 웃지 않았다. 실례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여전히 밉나요?"

"무슨 말씀이죠?"

"리사가 죽고 나서 저한테 그러셨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제가 밉다고. 지금도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계속 고민해왔다.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그렇지만 꼭 확인해야만 했다. 고개를 들고 예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날 사우나에 보냈잖아요. 일부러 그들과 만나게끔."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주 작은 표정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름 직구를 던졌다고는 생각했는데, 상대는 산전수전 지상전 공중전까지 마스터한 역전의 용사라서 그럴까. 전혀 먹히지 않았다. 미묘한 변화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왕 꺼낸 이야기는 끝까지 해야 했다.

"한참 생각해봤어요. 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얼굴을 보내야 하니까 예린 씨의 부하 중에서는 무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야 하니까 날 보내야 한다는 예린 씨의 주장은 타당했어요. 그렇지만... 나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 내 얼굴이 완전히 노출되지 않았던 게 아니었어요. 마리가 옆집으로 이사 오던 날, 그날 짐을 나르던 사람들은 백당 사람들이었죠. 그러니 내 얼굴을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거란 이야기는 거짓말이었어요."

"...."

나의 추론에 예린은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면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하는 예린의 성격상, 이 침묵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잡히고 나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놈이 있었어요. 거기서부터 예린 씨를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매사에 꼼꼼한 예린 씨가 그런 사실을 까먹었을 리 없는데... 그러다가 거의 시차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걸 보고 확신했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작고 납작한, 고급스러운 무늬가 박힌 호텔 사우나 회원권 카드. 예린이 내게 주었던 것.

"나는 미끼였다는 걸. 그들을 낚기 위해서 예린 씨가 던진 살아있는 미끼라는 걸 말이에요."

"....."

"뜯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 카드에는 위치를 발신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을 거예요. 그들의 행동 요령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예린 씨니까, 자기들의 뒤를 캐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가서 그 배후를 캐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겠죠. 실제로 잡혀간 날 구출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본거지 하나를 소탕했잖아요."

"...."

"그러니 대답해줘요. 아직까지 날 미워하나요?"

예린은 내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카드를 반으로 쪼갰고, 안에 든 납작한 카드형의 발신기를 뽑아내더니 손가락으로 짓눌러서 망가뜨렸다.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사람은 두 손으로 힘을 주어야 부술까 말까한 기판을 손가락만으로 부러뜨리는 예린의 힘은 이제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카드 안에서 그런 걸 꺼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았다. 예린은 부서진 것들을 창문 밖으로 던지고 말했다.

"이거 말고도 대답이 필요하십니까?"

"대답해달라고 했잖아요. 날 아직도 미워하냐고."

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날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녀의 선글라스가 유난히 더 선명해 보였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딱히 좋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이었다. 역시 그녀다웠다. 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정도면 됐어요."

"...화내지 않으십니까?"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되었잖아요. 나쁜 놈들은 잡았고, 잡혀간 나도 예린 씨가 구해주었고."

예린은 날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사과받자고 물어본 게 아니니까요.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이제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 괜찮아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에이, 설마..."

나는 예린의 어깨를 잡아서 그녀의 자세를 바로 해주었다.

"예린 씨의 의도를 아주 잠깐 의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린 씨가 날 구해주러 오리란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요."

그때 예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태호의 전화였다. 아마도 돌입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은 예린은 차에서 내렸다. 그녀를 따라 내려서 악수를 청했다.

"꼭 돌아와요. 마리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나도 예린 씨가 필요하니까요."

예린은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여리지만 단단한 손이었다. 악수를 마친 그녀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지켜보았다. 그것이 내 유일한 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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