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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57화 (25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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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어쩔까 싶다가 일단은 방에서 나왔다. 화장실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맸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 볼일을 보고 나니, 위층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알았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막아섰다. 검은 정장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아마도 그는 내가 지나가도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수고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불 켜진 방이 있었다. 안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예린이었다.

"위치를 파악했다."

방에 모인 사람은 대략 오십여 명. 문가에 서서 안쪽을 둘러보니 생김새는 가지각색이었지만, 눈빛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린의 선글라스 너머 눈빛은 저러하리라. 백 개에 가까운 눈빛이 예린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연산동에 있는 금부빌딩. 송 부장의 사무실은 물론 바텐더의 연구실도 거기 있다고 한다."

"수안동에 있는 지물빌딩은예?"

"수안동, 다대동, 전부 위장건물이야. 송 부장은 자신이 있는 곳에만 경비를 집중시키면 그곳이 도드라진다고 생각해서 인원을 정확히 셋으로 나눴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도리어 약점이 되리란 걸 미처 몰랐겠지."

예린은 어떤 종이 하나를 벽에 붙였다. 그것은 금부빌딩을 중심으로 한 도심지를 상세하게 표시한 지도였다. 예린은 종이에 미리 표시된 마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성민이가 다섯을 데리고 이쪽 출구를 지킨다. 지평이가 다섯을 데리고 건물 주차장 입구를 지킨다. 상규도 마찬가지로 다섯을 데리고 이쪽 길을 막는다. 태호는 열 명을 데리고 옆에 있는 은부빌딩에서 대기하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정문을 친다."

그녀의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외에는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연락하고 경찰이 오는 경로는 어느 쪽이며, 그들이 출동하기까지의 시간 등을 계산하며 움직일 것을 당부했다. 조폭들의 싸움이라고 하면 그냥 각목 하나씩 챙겨 들고 와하고 소리 지르며 쳐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예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약간 갸웃하다가 손짓했다. 내가 다가가자 내게도 임무를 주었다.

"한석 씨는 차량에서 대기하며 경찰 무선을 듣고 있다가 그들이 이쪽으로 온다 싶으면 저한테 전화하십시오."

"경찰...?"

"일단은 다른 지역으로 쳐들어간다는 식으로 거짓 정보를 흘릴 겁니다. 저쪽에 혼란을 주는 동시에 경찰들이 우릴 막을 수 없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대응이 기민하여 우리 쪽으로 너무 빨리 넘어오면 그 전에 우리가 빠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검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송 부장이나 바텐더를 넘길 순 없습니다."

예린이 송화와 협력하면서도 검찰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여기 있는 사람의 대부분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옥에 있었지만, 송화의 도움이 아니면 이렇게 나오기 힘들었을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예린은 송화를, 아니, 검찰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예린은 믿지 못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 기회에 백당이고 뭐고 전부 일소하고자 할 겁니다. 뿌리를 뽑겠다는 거죠. 저희는 차라리 제 손으로 해산을 할지언정 그런 치욕을 당할 순 없습니다. 게다가 송 부장이나 바텐더를 뺏겼다가는... 앞으로 몇 년 안에 그들을 또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겠지요."

예린의 생각은 확고했기에 내가 어떻게 말한다고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예린은 그 밖에도 각자 필요한 물건과 도구 등을 분배하며 시간을 보냈다. 회의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잠이 안 오십니까?"

문가에 예린이 서 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그녀는 인기척이 없다. 마치 유령 같았다. 입고 있는 차림도 그렇고, 얼굴에 쓴 선글라스도 그렇고... 어둠에 녹아든 그녀를 그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예린 씨는... 잠이 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내일 일이 부담인 모양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뭡니까."

"만약 송 부장과 바텐더, 바텐더와 송 부장... 둘 중 하나만 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예린 씨는 누굴 잡을 건가요?"

예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들고 있는 걸 바텐더에게 던지고 송 부장을 잡겠습니다. 바텐더는 일단 다리만 묶어두면 되는 놈이고, 송 부장은 제가 직접 처리하는 게 아무래도 수월하니까요."

"....뭘 들고 있는데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아마도 예린은 야구 배트든 칼이든 손에 든 걸 바텐더에게 던져서 다리를 부러뜨릴 모양이었다. 애초에 내가 물은 건 둘 중 어떤 놈을 잡는 데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는 건가였지만... 우문에 현답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백당을 재건할 건가요? 그리고 전처럼 그 생활... 조폭 생활하는 건가요?"

예린은 즉시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평소 태도처럼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리사 아가씨는... 아니, 리사는."

한참 만에 말문을 연 예린의 이야기는 애틋한 이름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한스러워 여겼습니다. 태어나 집에서만 죽 자라온 그녀가 철 들고 보니 자기 집안에서 하는 일이 남을 해치고, 이권을 두고 싸우고, 사람을 거래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늘 가슴 아파했던 부분입니다."

그런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리사는 자신이 하는 일을 내게 철저히 숨기려고 했다. 결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구상대로라면 원래 지금쯤 법인화 계획에 착수하고... 내후년이나 아무리 늦어도 사오 년 후에는 조직을 해체하고. 합법적인 회사로 전환하는 게 완성되는 청사진이 있었지요. 어디 문서로 남겨놓거나 한 건 아닙니다. 저한테만 이야기한 거니까요."

"아..."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은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모두에게 리사의 유지를 전하고 개별적으로 권해 볼 생각입니다. 만약 새 출발을 위해 자금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걸 지원해줄 생각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 예린 씨는, 예린 씨는 뭘 하고 싶어요?"

이번에도 예린은 대답을 주저했다. 아무래도 오늘 내가 하는 질문은 어째 그녀에게 전부 곤란한 질문인 듯싶었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요."

"아닙니다. 그냥... 그저... 부끄러워서..."

"자신의 미래가 남에게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어요. 말해봐요."

예린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얘기했다.

"저는... 저는 원래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간호사라든가, 보모라든가."

"풉-"

이런.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여기서 웃으면 안 되는 건데, 웃고 말았다. 선글라스 너머 예린의 표정이 험악해진다고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착각이 아니겠지.

"그럼, 쉬십시오. 저는 나가 보..."

"미안해요. 예린 씨. 잠깐만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예린의 손을 잡았다. 여자 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정말 컸다. 그리고 단단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주먹 아래 쓰러진 사람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내가 여태 살면서 손을 잡아 본 여자 수보다도 많을 것이다.

"지금 이미지랑 너무 달라서 잠깐 놀라긴 했지만, 그래요. 예린 씨, 하면 잘할 것 같아요. 만약 시간이 된다면 나중에 우리 애 봐주는 것도 도와줘요."

"우리 애라고 하시면 어떤 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아.... 어.... 둘 다요."

내 씨앗을 받아 잉태된 아이가 지금 둘이나 있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서울 어딘가에 있을 마리와 소란을 생각한다. 그녀들의 배 속에 있는 내 아이를 생각한다.

"마리 아가씨의 아기라면 당연히 도울 생각이었습니다만... 저도 언젠가는 아이를 낳게 될 테니 그 연습 삼아서라도."

이번에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예린도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게 아니란 걸 지금 처음 알았다. 물론 그녀는 근사한 몸매를 가진 젊은 아가씨이니 언젠가는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여태 내가 봤던 그녀의 모습은 어지간한 남자 한두 명 정도는 우습게 때려눕히고, 수십 명의 사람을 호령하는 장군 이미지였기에 미처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지금 내가 이 불 꺼진 방 안에서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상태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황급히 손을 놓았다. 기분이 묘했다.

"아아, 예린 씨도 결혼... 생각이 있으셨구나. 솔직히 몰랐어요."

"결혼 생각은 없습니다."

"에? 그렇지만 방금 아이를 낳겠다고..."

"아이는 씨를 줄 남자만 있으면 낳을 수 있는 거니까요. 굳이 결혼은 필요 없죠."

"....생물학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들 생각이 범상치 않은지 모르겠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예린도 별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그녀는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쉬십시오. 결행은 새벽이니까요."

"네. 예린 씨도 좀 쉬세요."

예린이 방을 나간 후,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불러 보는데, 그것은 저 멀리서 서성거리며 내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밤의 수면은 마치 멀고도 오래된 미래 같았다. 내게 다가와 현실이 되었을 때는 잊혀진 과거처럼 부서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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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이 루트도 이제 슬슬 끝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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