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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56화 (25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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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눈을 떴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불은 하나도 켜있지 않았지만,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으로 방 안의 윤곽을 알 수 있었다. 전부터 지내던 산속 별장이 아니었다. 내가 누워있는 곳도 텐트 속 침낭이 아니었다. 커다란 침대였고, 난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목이 말랐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등짝과 허벅지에서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있었다.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심 속에 있는 높은 건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던 산속과 달리 이곳은 차 지나가는 소리와 취객의 고성이 가끔씩 들려왔다.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워낙 어두워서 상대가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내 눈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면 불을 켜겠지 싶었는데, 상대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똑바로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마치 불을 켠 것처럼 움직이는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서, 아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깨셨나요?"

"네. 깨버렸네요. 더 자고 싶었는데."

"호호. 이미 충분히 주무셨어요."

소연은 내 옆으로 와서 앉더니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뭔가 야릇한 행동을 하려고 그런 건 아니고, 손에 든 붕대를 가지고 내 허벅지를 감아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 등에도 파스 같은 게 붙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가 붙여주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소연 씨."

"뭘요. 저 대신 맞아주신 건데."

"꼭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 때문에 이런 일이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소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붕대 감기를 마쳤다. 압박 붕대로 상처 부위를 눌러놓고 나니 통증이 확실히 덜해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붕대의 상태를 몇 번 더 확인하고 나서 손을 뗐다. 은근하면서도 구석구석 포인트를 짚는 손길이었다. 부끄럽게도, 그녀가 내 허벅지를 만지는 동안 다리 사이는 이미 발기했다. 프로페셔녈한 손길도 손길이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진한 여자 냄새는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백당...이라고 하셨죠?"

"네? 네..."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그녀 앞에서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해버린 후다. 소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예전 백당의 회장님을 몇 번 모신 적 있어요. 김 회장님이요. 워낙 성품도 좋으시고, 풍채도 좋으셔서 좋은 손님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분을 손님으로 받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 알게 되었죠. 그분이 부산 바닥을 쥐락펴락하는 분이라고요. 그런데도 전혀 그런 티도 내지 않으시고, 저 같은 사람에게도 점잖게 대해주시고... 퍽 좋은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지금은 안 계신다면서요?"

"그...그렇죠."

김 회장이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최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분이 안 계셔서 그런가. 요즘 백당 분위기 심상치 않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있단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어요. 사장님이나 그 예린이라는 아가씨는 그걸 바로 잡으려는 거죠?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바로 잡으려 한다는 것까지는 모르겠고... 일단은 받은 만큼 갚아줘야겠죠."

"김 회장님의 복수?"

"그런 셈이에요."

"그럼, 리사라는 분은요?"

리사의 이름까지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게 약간 의외였지만, 생각해보니 잡혀 있을 때 이미 그들이 떠벌린 이야기만 미루어보아도 나와 리사의 관계는 훤히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몸이 아파서 그런가. 리사의 이름을 들으니 갑자기 슬퍼졌다. 난 아무래도 앞으로 평생동안 그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지금처럼 눈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미처 대답을 못 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데, 소연은 그걸 소리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손등으로 내 눈가를 닦아주며 달랬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요... 그냥, 리사가 보고 싶어서..."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소연은 두 팔을 뻗더니 내 뒤통수를 안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내 머리가 확 끌려간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얇은 원피스 너머, 그리고 가슴 바로 위까지 훅 파여있는 그 옷차림 덕분에 그녀의 윗가슴 사이에 코를 끼우고 얼굴의 아랫부분은 그대로 가슴 사이에 묻게 되었다.

"저, 저기..."

"쉬잇. 자자, 착하지?"

소연은 팔에 힘을 주어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푹신하고 아늑하기 짝이 없는 공간 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심정이야 행복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당황스럽기는 했다. 게다가 내가 그녀보다 앉은키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려면 상체의 포즈가 상당히 부자연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소연의 팔은 내가 벗어나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자, 착하지? 울지 마."

내 뒤통수와 등을 쓰다듬는 소연의 손길은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그것과 같았다.

"남자는 함부로 자기가 우는 걸 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야."

"....네."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하고 만다. 그러자 소연이 깔깔거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전 괜찮아요. 어차피 안 보이니까. 제 앞에서는 울어도 된답니다."

"....그게 또 그렇게 이야기가 되나요."

"호호호."

소연의 팔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와 내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불과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것은 키스를 기다리는 여인의 표정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처음엔 그녀의 입술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떼려고 하자, 그녀의 입술이 벌려졌다. 내 것을 흡입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을 두드린다. 내 혀를 내놓으라는 의사표시에 따른다. 나 역시 꺼내어 그녀와 혀를 섞는다. 더욱더 벌려진 입술을 각도를 약간 비틀어 서로의 밀착을 더 공고히 한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 오고가는 것을 입 안쪽의 점막으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았다.

애매하게 어두운 방과 달리 눈을 감은 저편은 그저 까맣기만 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시각이 그렇게 차단되자 온몸의 신경은 오로지 촉각, 후각, 시각에 재편된다. 그녀의 몸냄새, 그녀의 입술에서 비어져 나오는 신음,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만지고 있는 내 손가락 끝의 감촉 하나하나가 시각보다 더 선명하게 도드라져 감각을 일깨운다. 눈을 항상 감고 있는 그녀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일까.

"하악...하아....하악...."

입술을 떼었을 때,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난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손은 그녀의 가슴 언저리를 주무르고 있었는데, 말캉하면서도 한 손으로 채 쥘 수도 없는 크기와 감촉은 정말 최상급이었다. 난 지금 어쩌고 싶은 걸까. 그녀를 침대에 뉘어 놓고 가슴을 주무르고 있으면서도 차마 옷을 더 벗기거나 내가 벗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을 가지런히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너무도 평온해 보였고, 그런 표정의 평온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저, 소연 씨...?"

"네?"

"이 상황에서 이런 말하면 웃기다는 거 알지만... 저 사실은 애아빠예요."

"에에?"

소연이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그녀의 어깨끈을 바로 해주었다. 가슴에서도 손을 떼고 나도 마주 앉았다.

"말하자면 사연이 긴데... 어쩌다 보니 지금 제 아이를 가진 여자가 두 명 있어요. 한 명은 서울에, 다른 한 명은 강원도에. 이 일이 끝나고 나면 그녀들에게 돌아가서 돌봐야 해요."

소연은 입을 딱 벌렸다. 어두워서 그녀의 표정이 세세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만큼은 잘 보였다.

"그래서 저한테 그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냥... 지금 분위기 타서 소연 씨랑 이런저런 짓을 하고 나서도 책임지지 못할까 봐 그래요."

그러자 소연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그녀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웃다가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더니 겨우 한 마디했다.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신 거 아니에요? 청춘 남녀가 분위기 좋고 눈 맞으면, 아, 맞다. 나는 눈을 못 맞지. 암튼, 필이 오면 악수 나누듯이 성기를 교환할 수도 있는 거죠. 저한테 서비스 안 받으신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건 다른 문제고요..."

"설마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저 같은 여자는 더러워서 하기 싫은 건가요? 정 마음에 걸리면 콘돔 쓰시면 되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입을 딱 벌릴 차례였다.

"아니, 소연 씨. 그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건요, 그놈들이 소연 씨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지어낸 이야기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에요."

"호호. 알아요, 알아. 농담이에요."

소연은 배를 잡고 웃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문으로 향했다.

"한 번 했다고 해서 딱히 책임지라거나 그러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약간 아쉽긴 하네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장님은 냄새가 정말 좋았다구요."

"네... 냄새 말이죠."

소연은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아! 그래! 이런 냄새를 가진 분이 또 있었어요."

"누구요?"

"김 회장님이요."

"그분도 저처럼 냄새가 좋았다는 이야기인가요?"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결국 그는 조폭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게 이야기하고, 추억하고 있다는 게 퍽 신기했다. 그런 그를 송 부장이 축출하고, 이제는 예린과 내가 그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고 나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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