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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55화 (25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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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지난번에도 본 광경이지만, 여전히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문짝을 뜯어낸 건 예린 혼자였다. 그녀는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냥 뜯어내는 나쁜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아주 안 좋은 버릇이겠지만, 지금은 그 버릇이 날 구원할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예린을 보며 남자들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윽... 누님..."

조금 전까지 나와 소연을 괴롭히던 그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가 죽었다. 예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곤 남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성규, 예호, 진구, 청연, 태준."

예린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말로는 오랜만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도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방 안에 있는 남자들의 목소리에는 떨리는 기색이 완연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쩌긴. 니들이 잘 사나 보러 왔지."

"보러 온다면 온다고 얘길 하지 그러셨소."

"놀래켜 주려고."

저렇게 건조하고 무감각한 대화 방법이 예린의 유머 스타일일까. 평소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지금의 난 너무 웃겼다. 유쾌해 죽을 지경이다. 유감스럽게도 남자들은 별로 웃기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핫. 놀라다 못해 식겁했소."

그러자 예린이 손을 들어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근데 태준이 넌 정말 그걸로 할 거니?"

예린의 지적을 듣자 다른 남자들도 모두 태준이라는 남자를 보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떨고 있는 그의 손에는 길이 두 뼘 정도 되어 보이는 칼이 들려있었다. 그의 칼은 꽤 흔들리고 있었다. 저러다 자신을 찌르지나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자 옆에 있는 남자가 칼을 빼앗더니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칼을 뺏긴 태준이 항의하자 옆에 있는 남자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너 지난번에 누님한테 칼 들고 설친 새끼들 다 어떻게 되었는지 벌써 잊었어? 그냥 어디 몇 군데 부러지는 걸로 끝내자, 우리. 뒤지지는 말고."

그러자 태준의 항의도 누그러졌다. "누님한테 칼 들고 설친 새끼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지 퍽 궁금했지만, 애써 묻고 싶지는 않았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놓인 야구방망이를 슬쩍 집어 든다. 그리고 끝 부분을 반대편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청연이가 그래도 좀 똑똑하구나. 너부터 와라."

"영광입니다, 누님!"

청연이라 불린 남자가 먼저 뛰쳐나갔다. 그러자 예린이 그런 그를 향해 책상을 걷어찼다. 조금 전, 한 남자가 두 팔로 저 책상을 밀어다 문 앞에 갖다 둔 걸 봤었는데, 예린은 그게 무슨 빙판 위에 놓인 썰매를 밀듯이 발로 차서 밀어버렸다. 청연은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책상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아래로 쇄도하는 그가 각목을 휘둘렀지만, 예린은 유려한 허리 움직임으로 그걸 피해버렸다. 그리고 피하는 동시에 몸을 반대편까지 회전시켜 그대로 청연을 후려쳤다. 풀스윙이었다.

"으악!"

청연의 비명이 더 큰지, 그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더 컸는지 모를 정도였다. 트렁크에 방망이를 가득 넣어다니는 걸 보고도 예린이 야구를 좋아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다만, 그녀는 공 대신 사람을 사용할 뿐이었다.

"다 덮쳐!"

청연의 몸이 뒤쪽으로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남은 네 남자가 앞으로 달려갔다. 두 놈은 각목을 휘둘렀고, 다른 두 놈은 맨주먹이었다. 예린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앞으로 달려오더니 앞구르기를 하며 방망이를 좌우로 휘둘렀다. 두 놈이 정강이를 두드려 맞고 그대로 앞으로 자빠졌다. 놈들이 각목을 휘두른 자리에는 이미 예린이 있지도 않았다. 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싶은 각도로 예린의 몸이 뒤틀리더니 한 놈의 머리와 다른 놈의 등짝을 아작낸다.

"으헉!"

남자들의 비명이 이어지는 것과 달리 예린은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않고, 묵묵히 배트를 휘둘렀다. 개중에는 그녀가 미처 피해내지 못한 공격도 있었는데, 팔이나 몸으로 한 번 막아내고 나면 더 큰 공격을 반격으로 돌려주곤 했다. 빠른 속도로 남자들이 쓰러졌다. 남아나는 이가 없었다.

그런 사이 나는 소연에게 기어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죠?"

"우릴 구해주러 온 분이 있어요."

소연은 얼굴을 반쯤 돌려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곤 감탄했다.

"바람 소리가 달라요."

그녀가 말한 바람 소리라는 건 아무래도 예린의 주변에서 붕붕 일어나고 있는 돌풍을 말하는 거겠지? 소연의 옷을 똑바로 해주고 싶었지만 내 두 손은 뒤로 묶여있는 채였다. 소연에게 이걸 이야기하자 그녀는 내 등 뒤와 팔뚝을 몇 번 더듬더니 묶여있는 줄을 풀어주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내 옷을 챙겨 입고 소연에게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코트를 하나 걸쳐주고 나서야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바닥에는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는 남자 다섯이 누워있었고, 예린 혼자 서 있었다. 잠시 후, 문을 통해 또 다른 남자들이 들어왔다. 예린의 수하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누워있는 남자들을 끌고 갔고, 예린은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나쁘진 않네요."

"일어나시죠."

혼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끄응거리는 소리를 내자, 소연이 부축해주었다. 멀쩡히 두 다리를 가졌으면서도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소연 혼자서는 무리였던지라 예린도 내 옆으로 오더니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하며 부축해주었다.

"가시죠."

내 키와 별 차이가 없는 예린에게 질질 끌려갔다. 소연이 내 팔을 잡고는 있었지만, 딱히 부축을 한다기보단 그저 방향을 잡는 용도로 사용할 뿐이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면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복도 양쪽으로 문이 많았는데, 죄다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대부분 벌거벗은 남녀가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예린이 설명했다.

"여긴 매음굴입니다."

"매음굴...이요?"

뭔가 아주 오래전에 책에서 본듯한 단어여서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는 몸에 좋은 영양제나 강장제라는 식으로 약을 줍니다. 지친 사람이 저들이 파는 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힘이 나긴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탈진하고 더 강도가 높은 약을 요구하게 되죠. 그러면 그때부터 그들은 돈을 받고 약을 팔기 시작합니다. 약에 의한 만족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들은 약을 한 사람들에게 육체적 쾌락을 제공합니다. 약을 하고 가진 관계는 만족도가 남다르다고 하더군요. 한 번 그것에 맛 들인 사람들은 다시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모든 재산을 털어내고, 또 그가 가진 신용을 모두 동원해서 빚까지 져가며 저들에게 돈을 털릴 때까지. 그렇게..."

"그만 말해요."

평소와 달리 예린은 말이 많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 속은 편하지 않았다. 만약 그 교회에서 예린이 날 구해내지 않았더라면, 저기 동공에 빛을 잃은 채 알몸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약을 하고 가진 관계가 주는 만족감... 젠장.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예린은 저런 이야기를 대체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일까.

"실례했습니다."

예린은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걸 말할 기분이 아니어서 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리는 예린의 검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소연을 어쩔까 싶었는데, 예린은 그녀가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며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연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그녀는 너무도 흔쾌히 따라가겠다며 차에 함께 탔다. 푹신한 카시트에 몸을 대는 순간, 그동안 참고 있던 고통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예린이 소연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 채 듣지도 못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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