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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꿈을 꿨다. 요새 들어 꿈을 자주 꾸게 된다. 바텐더의 약을 먹은 후유증인가 싶었다. 꿈속에서 리사가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는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려는데 리사는 그대로 멀어졌다. 그리고 내 귀에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어깨가 축축하다. 여기가 귀곡산장도 아니고... 마리의 서글픈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니 마리가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펑펑 울고 있었다. 이 녀석이 침대에 대체 언제 기어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렇게 서글프게 우는 건 처음 본다. 늘 밝고 명랑하던 녀석이 이렇게 울고 있으니 더 처연한 느낌이다. 마리를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마리야, 왜 그래?"
한참을 어르고 달래도 쉬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라가 망한 구한말 백성들이 이렇게 울었을까 싶다. 문가에 인기척이 느껴져 쳐다보니 그 윤가희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의사 꼬맹이 아가씨가 서 있었다. 본인 입으로는 애 아니라고 빠득빠득 우기면 뭐하나. 입고 있는 토끼 모양 잠옷이나 들고 있는 인형은 대체 어쩔겨.... 그나저나 그녀에게까지 울음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 모양이다. 비몽사몽한 채로 서 있는 그녀에게 입 모양으로 괜찮다고 전해주고는 마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리는 정말 한참 만에 겨우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깨는 여전히 들썩거리고 있었고 끅끅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왜 그래? 슬픈 꿈이라도 꿨어?"
마리의 눈동자가 날 향한다. 그러나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공허한 눈빛이다. 박제된 동물에게 박혀있는 유리 눈알 같은 투명한 느낌이다. 숨을 가다듬느라 마리의 대답은 한참 만에 나왔다.
"모...몰라예. 제가 와 우는지...."
"뭐?"
"모르겠다구예. 그냥 막... 가심이 먹먹하고..... 뭔가 허전하고....... 그러면서....."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귀신 울음소리 같은 걸로 깨워놓고 한다는 소리가.... 거참. 입맛을 쓰게 다시던 나는 어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뭐랄까. 뒷골이 당기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온몸을 훑어 내리는 느낌이다.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아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떠오른다. 조금 전 꿈에서 이 녀석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건 이별의 인사였다.
"마리야. 얼른... 예린에게 전화 걸어. 빨리."
"이 새벽에예?"
"어쨌든, 빨리!"
마리가 자신이 울고 있는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왜 초조해하고 답답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선전화기를 가져와 번호를 누르고 있는 마리의 모습이 너무 느리고 답답해 보여서 짜증이 났다.
"빨리하라고!"
"....알았심니더. 소리는 지르지 마예."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번호를 다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다 댄 마리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몰라예. 통화권 이탈이라는 데예."
"혹시 꺼둔 거 아냐?"
"글쎄예. 원래 언니들 일할 때는 핸드폰 끄기도 합니다만 통화권 이탈이라니.... 잘 모르겠네예."
아랫입술을 깨문다.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의 정체를 도무지 모르겠다. 온 정신이 날카롭게 있다 보니 바깥에서 들리는 아주 사소한 소리 하나에 귀가 번쩍인다.
"마리야. 밖에 무슨 소리가 났어. 얼른 나가 봐."
"네? 잠시만예."
마리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는 동안 팔에 꽂힌 바늘을 뽑았다. 바늘에 피가 맺히는 걸 보고 제대로 뽑은 게 맞나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반대편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바늘이 꽂혔던 자리를 누르며 창가로 다가갔다. 마리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는데예?"
"그런가..."
시계를 본다. 이제 겨우 새벽 다섯 시.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 옷차림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걸 알았다. 아래는 팬티뿐이고 위에는 가슴을 풀어헤친 잠옷 차림이다. 마리는 얼굴을 붉히더니 기왕 일어났으니 아침을 차리겠다며 방을 먼저 나갔다. 옷을 찾아 입고 방 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다가 이내 방을 나섰다. 복층으로 된 실내구조라서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부엌이 나타났다. 신문을 보고 있던 가희가 날 보고 벌떡 일어난다. 이 아이도, 아니, 아이가 아닌 이 아가씨도 참 일찍일찍 일어나는구나....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예."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렇게 허리까지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국민학교 "바른 생활"은 제대로 공부한 게 맞는 거 같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피하다가 마리 옆으로 도망갔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거실로 나가 커다란 창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마리가 짓는 밥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쯤, 맞은편 산에서 해가 떠올랐다. 찬란하게 뻗치는 햇살을 받아 이 별장 주변에 있는 수목들이 푸르름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꽤 깊은 산 속에 자리한 별장인가 보다.
"식사하세요."
"아, 예."
어쩔 줄 몰라하며 내게 다가온 가희를 따라 식탁으로 갔다. 세 사람이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반찬과 찌개가 몹시 맛있어 보였지만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간신히 한 숟갈 담아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처럼 텁텁했다. 눈물 자국이 아직도 역력한 마리의 얼굴 역시 좋은 편이라 하기 힘들었고 가희는 부부싸움을 하고 난 집의 아이처럼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온 신경이 바깥에 쏠려있고 머릿속은 딴생각 중이라 맛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차 소리가 들리자마자 숟가락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예린!"
새벽의 찬 공기가 뺨을 때린다. 영업용 택시가 마당에 서 있었다. 운전석 쪽 창문은 깨져있었고 운전석에는 예린이 앉아있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그녀의 민얼굴을 처음으로 본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마치 망부석처럼 핸들을 잡은 채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았다. 푸른 눈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사야!"
차로 달려가 조수석 쪽 문을 왈칵 연다. 의자를 뒤로 젖혀 기대 누운 자세의 리사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아.....아......"
흠뻑 젖은 드레스의 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창백한 안색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이제 결코 품 안에 그녀를 안고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리사야.... 리사야....."
그녀의 차디찬 몸 위에 엎드려 운다. 내 눈물은 이리도 뜨거운 데 그녀의 몸은 정말로 차가웠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다음 어떻게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와 지난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정도로 안정이 되었을 때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내일 아침에 예린의 주장대로 별장을 떠나기로 했다. 마지막 밤. 1층에 있는 욕실에 있는 대형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 드러누운다. 얼굴만 내밀고 김이 가득 서린 욕실 천장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내가 리사의 주검을 안고 울고 있는 동안 별장에서 나오던 마리는 언니와 내 모습을 보고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가희가 그녀를 치료하고 의식을 차리게 했지만, 사실 치료랄 것도 없었다. 정신적으로 자기 일부나 다름없는 언니를 잃은 그녀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예린이 리사의 시신을 염하기 전, 마리는 단둘이 있게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안방에 리사를 눕혀놓고 마리를 뺀 모두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언니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또 다른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마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약 두어 시간 후,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예린이 방으로 들어가 리사를 씻기고 염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낯빛이 어두운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처리해나갔다. 예린과 뒷마당을 파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과묵했던 예린은 더더욱 말이 없어졌고 하루에 한마디도 채 꺼내지 않았다. 마리 역시 아무 말도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나마 가희가 나서서 제사상 비슷하게나마 차려놓았다.
리사는 별장의 뒷마당, 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주었다. 관도 없이 평소 그녀가 좋아했다는 옷을 입혀, 덮고 자던 이불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높지 않은 봉분을 만들었지만,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가희가 차린 상을 앞에 두고 술을 따랐다. 소리 없이 우는 마리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우는 예린. 그리고 그저 말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는 가희를 데리고 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했다. 모두 한 잔씩 받아 봉분에 부었다. 자기 아버지를 닮아 말술이었다는 그녀에게 이 정도 술이 성에 찰까 싶었지만.... 절차를 모두 마치고 일어서기 전, 난 어떤 생각이 들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술병을 가희에게 주고 한 잔 더 따라 달라고 했다.
"왜요?"
나는 말없이 한 잔을 붓고 또 다음 잔을 청한다. 그것마저 붓고 일어났다.
"모르겠어요. 그냥... 리사 말고도 더 잔을 받아야 애들이 있는 것 같아서...."
지난밤 꿈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가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모두들 별장으로 돌아가 그곳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비할 게 따로 없는 나는 1층 욕실에 물을 받아 놓고 욕조에 들어가 창밖을 내다본다. 그곳에 그녀가 있다. 그렇게 리사는 우리 곁을 떠났고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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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김리사. 향년 2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