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34화 (23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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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 안은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선배님! 깨셨는교?"

익숙한 사투리. 그래. 저건 마리의 목소리.

"부...불을 켜줘."

"잠시만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서 환한 빛이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명암 차에 눈을 찌푸렸다. 가늘게 뜨고 바라본 시선의 끝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현실인가. 그런가. 정말인가. 알 수 없다. 도무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다.

"꿈 꿨어예?"

"어? 어......"

"허이구야. 이 땀 좀 보소. 참말 괜찮아예?"

"아아... 괜찮아. 그냥... 그냥......생각이 나버렸어.....모든 생각이 다.... 한꺼번에....."

마리가 건네준 물컵을 단숨에 비워냈다. 타는 듯한 갈증도 갈증이지만 배와 머리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린. 좀 좋게 설득해서 데리고 나갈 것이지, 암만 급해도 그렇게 실력 행사로 나오다니. 하아. 무섭다, 무서워.

"뭔 생각을 그리 해예?"

"그...그런 게 있어."

그제야 사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은은한 파스텔톤의 벽지와 천장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일반 가정집처럼 보였다. 누워있는 자리도 꽤 널찍한 침대였고 가구라던가 인테리어도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었다. 내 팔에 꽂힌 링거만 아니라면 무척 평화스러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여긴, 어디야?"

"양산이라꼬예. 저희 별장인데예.... 쪼까 사정이 있어가 이리로 모셔왔슴다."

"양산? 그게 어딘데?"

"부산 바로 윗동네입니더."

기가 막혔다. 내가 눈을 감은 게 서울 한복판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부산 근처라고? 뻗어있는 사람을 데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내가 정신을 잃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따지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소란이는? 걔는 어디 있어?"

그러자 마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그 아이를 그냥 두고 왔단 말야?"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려니 말끝이 갈라진다. 목이 텁텁하다.

"그럼 우짭니까. 예린 언니 말로는 거동을 못 해가 호흡기 없으면 애 옮기도 몬한다 카던데예."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으윽...."

화를 버럭 내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그런 격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워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애써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리자니 마리가 나를 제지한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도 거들었다.

"저기... 일어나시면.... 안 되는데요...."

벌새 울음소리, 아니, 벌새는 우는 게 아니고 날갯짓으로 소리를 낸다고 했던가. 암튼 그런 소리라고 착각할 만큼 아주 작고 여리여리한 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라보니 아주 쪼끄만 소녀가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인상적인, 이제 겨우 열 몇 살 되었을까 싶을 정도의 아이였다. 얘는 또 누구지, 싶어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마리 뒤로 후다닥 숨는다. 아니, 그게 숨는다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또 고개를 내밀어 날 보다가 다시 또 숨는다. 숨바꼭질 놀이라도 하자는 겐가? 영문을 몰라 마리에게 물어본다.

"저 애는 또 누구야?"

"저 애 아니에요!"

마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리의 등 뒤에서 볼 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니, 그런 소리를 하려면 좀 나와서 하든가.... 몸은 나서질 못하고 머리만 삐죽 내민 채, 그 아이는... 아니, 본인이 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애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고.....의학박사이고..... 또......."

주저주저하며 무언가 말하긴 하는데 말하는 투만 놓고 보자면 꼭 요만한 아이가, "너는 아빠하고, 나는 엄마하고, 넌 애기하고, 자, 우리 이제 소꿉장난 시작하자."라는 투라서 기도 안 찼다. 아무리 들어도 신뢰감 제로인 저 소리에 내가 어이없어하자 마리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기는 윤가희 언니라고 하는데예... 저희 집에서 후원받아가 공부하시던 분이라예. 겉은 마, 이래 보여도 사실은 박사입니더. 머리도 원체 좋아가 월반도 수시로 하구, 막... 참말루예."

꼬마 신동, 뭐 그런 건가? 아니. 본인 주장에 의거하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꼬마는 아니지. 아니, 근데 겉모습만 보자면....

".......유진이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긍까예. 언니가 지 나이로 보일 때가 되믄 롯데가 우승 먹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입니더."

비유가 어째 좀....? 고개를 갸웃한다.

"난 야구 안 보는데, 롯데가 야구 되게 못 하나봐?"

"하아. 선배님은예, 그런 소리 부산에서 하면 절대루 안됩니더. 알았지예? 사달 납니다. 올해도 마, 아주 죽쓰고 있는데...."

"그러니?"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았다. 그러나 야구 이야기와는 별개로 가희라는 아이, 아니, 아이 아니라고 했지. 암튼 그녀는 꼼지락거리면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저기.. 피 뽑으셔야 하는데요...?"

"뽑으세요."

"가...감사합니다."

그녀는 허리까지 꾸벅하며 인사를 하고는 내 팔을 고무줄로 묶고 주사기를 가져다 댔다. 피를 뽑게 해주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다니. 대체 이유가 뭘까. 그녀에게 팔을 맡기면서 하도 어리게 생긴 걸로 보아 좀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그녀의 손놀림이나 처치는 완벽했다. 능숙하게 혈관을 찾고 바늘을 찔러 내 피를 주사기에 담는다. 따끔하고 얼얼한 그 느낌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그 바텐더라는 놈도 그랬지만, 제 피는 어디다 쓰시게요?"

"바텐더를 직접 만나셨어요? 바텐더가 한석 씨 피를 뽑아갔다구요?"

주사기를 가늠하던 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되물었다. 안 그래도 동안인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 더 동안이 된다.

"만난 정도가 아니라, 그 자식이 먹인 약 때문에.... 으음. 암튼, 좀 그랬어요."

괴로운 기억이다. 고개를 떨쳐낸다. 그러자 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리사 씨가 날 불렀구나...."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침대 옆에 놓인 앰풀에 내 피를 나누어 담는다. 그리고 가희는 마리에게 뭔가 귓속말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간 다음 마리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몰래 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을 뿐인데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긍까예... 뭐, 그런 게 있심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다.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도저히 앉아있을 기력도 없다. 다시 침대에 드러눕자 마리가 의자를 끌어다 침대에 바짝 다가앉는다.

"많이 안 좋아예?"

"모르겠어. 계속 빙글빙글하고... 제정신도 아니고... 기억도 뒤죽박죽이고.... 하아. 뭣보다도.... 소란이 걔는...."

"예린 언니가 부산 일 끝나는 대로 해결해 주겠다고 했어예. 쫌만 기달려 달라꼬...."

"나한테도 그런 소리는 했어. 그렇지만... 하아..."

아무것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내 자신이 서글펐다. 차오르는 울분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야 예린의 "강제 구출"에 의해 이런 편안한 곳에 드러누워 간호를 받고 있다지만 소란이는 그 지옥 같은 교회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의식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 아이에게 올바르고 꼼꼼한 처치를 해줄 사람이 과연 그곳에 있을 것인가. 예린이 끌고 온 사람들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그곳에서 그 작디작은 아이를 신경 쓸 사람이 정말 있을 것인가. 생각만으로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드는 하나의 의문은... 일단 풀고 가야겠다.

"마리야."

"야."

"하나 묻고 싶은데... 답해 줄 수 있어?"

"뭔데예?"

마른 침을 삼켰다.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처음이라 자못 긴장되었다. 그래도 내 궁금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너희 집..... 그러니까 리사나 예린이나....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지?"

"그기야... 그건....."

마리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주저했다.

"조폭이나 뭐... 그런 거야?"

"......마... 머... 그렇지예. 이미 알고 계셨네예....저희는 그냥 단체생활이라고 표현합니다만...."

"하아. 설마설마 하고 있었는데...."

검은 옷의 예린이 한 번씩 풀풀 뿜어내는 귀기 어린 살기, 그리고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는 리사의 카리스마, 이번 교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사태를 볼 때 리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전부터 어느 정도 면모는 보여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 굳이 설명하자면 참 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 사람들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일이에요.

.....라고 말하던 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것이 당연히 "조직"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야 하는데... 나도 참 멍청하다. 물론 내심 짐작이라든가 추정은 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리사의 활짝 웃는 표정이나 기품 있는 태도에서 그런 예측을 많이 상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사는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 제 원래 계획은 오빠가 제게 푹 빠져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다음에, 그다음에야 제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려고 했었거든요.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 고백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푹 빠지게 만든다는 계획까지 세운 리사. 어찌 보면 참 얄밉고 어처구니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또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게다가 그녀는 나를 구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여 서울에서 그 난리를 피우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소란은 구출하지 못하고 나만 이렇게 빠져나와서 입맛이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리사를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리사는 최선을 다했고 예린은 예린 나름대로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을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다. 비록 그 방법이 좀 거칠어서 내가 요 모양 요 꼴을 하고 드러누워 있지만, 말이다.

"실망했어예....?"

자기 잘못도 아닌데 주눅이 들어있는 마리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팔을 뻗어 녀석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화들짝 놀라는 마리. 그러나 손을 빼내진 않았다.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아냐. 실망이라니. 그냥 좀 특이한 직업이라 놀랐을 뿐이야."

"특이한.... 직업이예?"

"응.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잖아."

그제야 마리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예린 씨가 약속했다고 했지? 소란이를 반드시 구해오겠다고...."

"하모요."

"그래. 그럼... 일단은 믿고 기다리자."

아까부터 덮쳐오던 피로감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꼭 술 마신 것 같은 기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밀려들어온다. 거기에 수마까지 얹어진다.

"불을 꺼줘... 마리야. 난 좀 잘게...."

"야."

불이 꺼졌다. 눈을 감아서 깜깜해진 건지, 아니면 불을 꺼서 깜깜해진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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