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31화 (23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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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텐더의 낯빛이 흙빛이 된다. 사람들의 고함와 함께 비명소리,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등이 한데 섞여 엄청난 소음이 된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해 답답했다. 더욱이 문제인 건 저 소음이 이쪽을 향해 점점 가까워져 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구별이 잘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소리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젠장!"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가려던 바텐더는 뭔가 본 듯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 둘에게 빠르게 무어라 명령한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더니 내가 누워있던 침대를 끌어다가 문 앞에 바리케이드로 막기 시작한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인마! 빨리 와서 이걸 도와!"

"네? 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바텐더가 시키는 대로 책장과 온갖 잡동사니를 가져다가 문 앞에 쌓아둔다. 문밖에서 들리는 악다구니 소리가 제발 이쪽으로 향하지 않기를 빌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몹시 두렵게도... 이쪽을 향한 소리는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걸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어쩔 수 없군."

바텐더를 돌아보니 그는 뭔가 이상하게 생긴 것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주 작은 총처럼 생겼는데 총구 대신 주삿바늘이 달린 이상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걸 몇 개 만들더니 조끼에 달린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으아아악!"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정체 모를 습격은 이미 문밖까지 이르렀다. 원래 이 방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이들의 비명소리일까, 그게 아니면 습격자의 비명일까. 그러나 그 바로 다음 순간 엄청난 힘이 문을 강타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원래 이 방을 지키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나 짐작할 수 있었다.

"바텐더!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당장 나와!"

.......여자? 방금 들린 목소리는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조금 낮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게다가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푸칵-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며 문짝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장정 네댓 명이 달라붙어 문을 부순 건가 싶었는데 문 너머 나타난 사람은 아까 낮은 목소리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자 하나뿐이었다. 뭔 여자가 저렇게 힘이 좋나 싶어 몹시 경악스럽다. 급조한 바리케이드는 삽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뒤로 주르륵 밀려난다. 바텐더를 불러 힘을 합해 침대를 도로 밀어붙여볼까 생각도 했지만,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나까지 참담한 기분이 들어 곧바로 포기했다.

크가가가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마침내 침대가 밀려났다. 문이 열렸다! 아니, 열렸다기보단 거의 뜯겨 나갔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드디어 또 만났군, 바텐더."

조금 전 그렇게 힘을 써댔으면서도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를 보니 바텐더가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문에 나타난 여인은 검붉은 형상을 하고 우뚝 서 있었다. 원래는 검은 옷이 분명했을 텐데 옷에 물든 피로 인해 검붉게 보이는 거였다.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데다가 조금 전 어마어마한 괴력을 선보여놓고도 표정에 그다지 변화가 없는 것까지 보아 저건 사람이 아니라 터미네이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몸매는 호리호리한 게 전혀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닮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자의 손에는 야구 배트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에 묻은 현란한 무늬는 아무리 봐도 빨간색 매직으로 칠한 건 절대로 아닌 것 같다.

여전히 바깥에서는 비명소리와 부산한 소리가 잔뜩 들려오고 있었지만, 여기 이곳만 싸늘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감돈다. 시선을 여자에게 고정한 채로 뒤로 슬금슬금 걷는다. 다른 건 몰라도 소란이라는 소녀만큼은 내가 지켜내고 말 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저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여인이 내게 달려든다면 난 1초라도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버티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단 1초면 1초라도, 난 소란이를 지키고 싶었다.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에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이 불쌍한 아이를 지켜내고 싶었다.

"바텐더, 멈춰. 허튼짓 말고 이쪽으로 와라. 네가 협조한다면 죽이지는 말라고 아가씨에게 건의 드려 보지."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방에 들어서며 날 한번 힐끔 본 여자는 그 이후로 곧장 바텐더에게 뚜벅뚜벅 다가가고 있었다. 방구석에 몰린 바텐더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여자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누구였더라. 예지라고 했던가? 뭐더라?"

"예린이다."

"아아, 그래. 예린. 부산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었는데 내가 깜빡했구만 그래."

부산? 부산에서 여기까지 바텐더를 잡으러 온 걸까. 바텐더라는 놈이 대체 얼마나 나쁜 놈이기에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부산에서 여기까지 잡으러 왔다고 한다면 정말 대단한 정성이지 싶었다. 게다가 예린이라니..... 무시무시한 인상치고는 꽤나 여성스러운 이름이다 싶었다. 하긴 모시고 있는 사람도 정말 여성스럽지. 그녀의 드레스 차림을 처음 봤을 때는 참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몹시 익숙......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저 검은 옷의 여자를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릿속, 그리고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일렁이며 내 안쪽을 두드리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터질 것 같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투항하고 날 따라와라. 그럼 여죄는 묻지 않는다."

바텐더 한 걸음 앞에 선 여자는 마치 칼로 겨누는 자세처럼 야구 배트로 바텐더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애써 웃고는 있지만, 이마에 삐질삐질 흐르는 땀이나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으로 볼 때 그가 어느 정도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갔다. 지금은 그녀가 날 협박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까지 오줌을 지릴 정도의 무시무시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바텐더는 딱딱한 목소리로 애써 답한다.

"하핫. 굳이 날 잡아가려는 이유는.... 해독제라도 만들어 내라고 할 셈인가?"

그러자 선글라스의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 그런 셈이지. 송 부장하고 대체 무슨 수작을 했기에 살아남았는지도 한번 캐보고."

"싫다면?"

"아가씨는 굳이 네놈을 살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 데려오라고만 했지. 그렇다면 시체라도, 딱히 상관은 없겠지."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이번엔 내 표정이 저 바텐더처럼 하얗게 질렸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저건 대놓고 죽여버리겠다는 소리잖아?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아아, 어차피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은 안 보이는구나. 암튼, 말투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싶었다. 평상시에는 그다지 말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그녀가 한 번 입을 열면,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싶었다가... 내가 저 여자 평소에 말 없는 걸 또 어찌 아나 싶어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아까 눈을 뜬 이래 계속 느껴온 이 까닭 모를 불편함과 이질감은 내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무어라 표현은 못 하겠는데 분명 내 기억에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기시감이 수시로 들고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다. 내가 머리를 감싸 쥐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동안 바텐더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우. 알았다. 내 안전만 보장해준다면야 못 할 것도 없지."

그러자 바텐더의 턱을 치켜세우고 있던 야구 배트가 뒤로 물러난다.

"좋아. 얌전히 있도록."

예린이라 불린 여자는 이제 이쪽을 돌아본다. 몸이 빳빳하게 긴장되었다. 이...이제, 내 차례인가? 그런 건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 나의 태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말투는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최한석 씨?"

"에에?"

........ 내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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