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18화 (21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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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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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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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몸이 좋지 않아 늘 방에만 있던 그녀에게 남몰래 책과 과자를 사다 주곤, 날씨가 따뜻하여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면 다른 사람 몰래 데리고 나와 뒷산에 함께 가주던 막내 아저씨. 그 아저씨와의 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저씨의 끝을 그녀가 지시하고 있다.

태호가 휘두른 방망이가 병구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리사는 끝까지 거기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병구의 마지막 눈빛을 묵묵히 견뎌낸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잠시 후, 창고에서 나온 리사는 백당의 모든 인원을 불러들였다. 예린은 없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모두의 눈빛을 받으며 리사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실종되신 제 아버지나 방금 지병으로 눈을 감으신 송 부장님도 항상 걱정을 하고 계셨죠. 우리 백당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다들 매한가지였고 그를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고 생각합니다.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 서로 무릎을 맞대고 논의를 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게 결과적으로 조직에 분란을 일으키고 싸우지 않아도 될 사람들끼리 서로를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리사는 허리를 숙여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송 부장의 반란과 김 회장의 죽음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리사가 사고와 지병이라고 언급을 한 이상 그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리사가 자신의 잘못이라며 자책을 했지만, 그렇다고 리사를 비난하는 이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조직의 수장인 동시에 아버지를 잃은 한 사람의 딸자식이기 때문이었다. 리사는 고개를 들고 모든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직이 삐꺽거리고 사람들이 많이 상했습니다. 재건을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협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지난 과거에 누구를 지지했고 또 누구의 편에 섰는가는 전혀 따지지 않겠습니다. 앞으로의 백당이 커 나가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분이라면 귀하게 여기고 능력을 높이 사겠습니다. 제 비록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일천하지만 여태까지 해오던 일과 등에 업은 위명이 있으니 부족하나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지휘하겠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앞으로의 백당의 노선이 탐탁지 않은 분은 떠나셔도 상관없습니다.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약속하죠. 제가 먼저 이 조직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도 않고 차분하게 백당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뒤이어 조직원들의 처우와 사업의 방향성도 담담하게 설명한다. 항상 조직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챙기던 브레인이었던 그녀였기에 백당의 조직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서 진정성을 발견했다. 누구 하나 그녀를 어리다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없고 여자라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리사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의 선창으로 인하여 리사의 이름을 드높여 부르기 시작한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두 분파라 나뉘어 싸우며 두 쪽으로 갈라질 위기에 처했던 백당이었지만, 이제 리사의 기치 아래 모두 하나가 되어 한목소리로 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리사가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추게 했다. 그녀는 좀 주저하며 이야기했다.

"다만... 미리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이 한 가지는 먼저 말해놓고 나야 제가 조직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저.. 임신 중입니다."

모두들 술렁거리며 리사의 배를 쳐다보았다. 리사의 손은 자신의 배를 가만히 덮고 있었다. 전혀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생명의 품은 사람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상대가... 뉩니까?"

아무도 묻지 못해 주저하고 있는데 눈치 없는 누군가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양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 문디 새끼가!" 하며 쥐어박는 시늉을 하지만 궁금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안상... 말씀드릴 수 없는 걸 양해해 주세요. 그리고 미리 말했다시피 전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애비에게 보낼 수도 없어요. 그분이 지금 많이 아프시거든요. 그래서 이 아이는 저희와 함께 있을 겁니다."

다들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사에게 아이라니. 물론 그녀도 여자이니 언제고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고, 또 엄마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뜬금없기는 했다. 무엇보다 리사는 아직 미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도 밝히지 않았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아이를 백당 내에서 키울 심산이었다.

"부디... 이 아이가 보고 자랄 우리들의 모습이 모범적이고 바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길 바랄 뿐입니다. 그걸 부탁드리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모두 숙연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깊이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리사 역시 뒤돌아서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예린이 리사의 어깨에 숄을 덮어준다.

"춥습니다. 아가씨."

그러나 리사는 어깨를 비틀어 숄을 거부했다. 몸을 돌려 예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흐음. 아까는 막 흥분해서 리사 어쩌고 하더니... 이젠 안 그러시네요?"

".......죄송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엄히 다스리겠어요. 그래야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백당의 기강이 바로 세워질 테니까요."

예린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지만, 근처에 서 있던 태호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리사의 입에서 예린을 질책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참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사는 원래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태호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신 사과한다.

"누님이 결코 나쁜 마음을 품고 그런 게 아닙니다. 아가씨. 누님은 그저 흥분해서..."

"흥분하면, 사람도 한 대 치겠던데요. 아까 하는 짓 보니까."

"그게 그러니까!!"

안절부절못하는 태호와는 달리 예린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었다. 리사는 손을 들어 태호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예린에게 말했다.

"성예린 씨.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새로운 백당에는 당신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 해고입니다."

태호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잠시 후,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안 그래도 커다란 그의 입이 사과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크게 벌려졌다.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 리사가 예린을 자른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린을? 그녀의 수족이라 평가받던 이를? 그러나 그런 사실에 쐐기를 박듯이 리사는 예린에게 딱 한마디를 보탰다.

"떠나세요."

예린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로 떠났다.

"누님! 잠깐만! 아니, 누님! 왜 그렇게 바로.... 아가씨! 정말입니까? 방금 하신 말씀인 참말인가요? 누님! 자꾸 어딜 가요!"

등을 보인 누님과 해고 명령을 내린 보스 중에 누구를 말려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태호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리사 역시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리사와 예린, 결코 떨어질 리 없다고 여겨지던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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