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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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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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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이 저들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기자재의 작동 상태를 몇 가지 더 점검해보고 벽에 붙어있던 종이 한 장을 내려 거기에 뭔가 열심히 적어내렸다. 원심분리기를 비롯한 각종 실험기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열고 입력해놓은 데이터와 자신의 공책을 번갈아 보며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기도 했다. 저멀리 아련하게 들리던 찬송가 소리가 잦아들었다. 산 속의 적막이 사방을 감싼다. 바텐더는 모처럼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꼼짝도 하지 않고 약품 분석과 혈액 분석을 병행하던 바텐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펴고 팔을 쭈욱 당겨본다. 온몸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체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목을 좌우로 꺾어보고 바텐더는 지하실을 나왔다. 달이 뜨지 않은 산 속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미리 가져온 랜턴을 켜고 땅을 비추어 본다. 사방을 한 번 비춰보고 자신이 목표한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 예배가 이루어지던 강당을 지나치며 안을 슬쩍 살펴본다. 벌거벗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한데 엉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은 강당 바닥에 잠들어 있었지만, 남자 몇 명은 여자들의 입과 엉덩이를 향해 열심히 좆질을 하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가있는 여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 태윤에게 다그쳤던 반출량 부족의 원인을 알 것도 같았다. 바텐더는 가볍게 혀를 차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목표하던 곳에 도착했다. 랜턴으로 한쪽을 비추자 나무에 기대앉아졸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바텐더는 다가가 발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어이, 이봐!"
"어허업.... 아... 박사님..."
사내는 벌떡 일어나며 입가에 흐르던 침을 닦았다.
"불침번이 자고 있으면 그게 불침번이냐? 침번이지."
"시...시정하겠습니다."
"됐고, 다른 하우스나 둘러보고 그래. 또 구석에 쳐박혀서 자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꾸벅하고 허둥지둥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바텐더는 혀를 찼다. 돈으로 사온 녀석들인데도 전혀 돈 값을 못 하는 게 불만이었다. 물론 지금 시각이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 몹시 피곤할 시각이라고는 하나 돈을 받고 일하는 거면 돈 값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바텐더는 이번 겨울만 지나고 나면 원 목사에게 받을 만큼 받아 챙기고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경비로 고용한 저 어중이떠중이 조직도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 가량 전에 있었던 서울에서의 예린 침투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아무리 부산 주먹계에서 수위권을 달리는 에이스라고는 하지만 겨우 하나였고 게다가 여자였다. 이쪽은 떼로 덤비면서도 잡지를 못 하다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바텐더는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보자... 13번 하우스였나. 시로시빈 매직 머쉬룸이 있는 게..."
그는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고 랜턴으로 비추어보며 내용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각종 식물의 목록과 재배지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도원의 진짜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수십개의 대형 하우스가 있었고 바텐더가 필요로 하는 각종 식물을 키워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옆에 가설된 건물에서는 이러한 원료를 말리고 찌며 가공하는 처리장은 물론 이 재료들을 바탕으로 칵테일의 분말 형태를 만들어내는 수공업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점에서 바텐더와 원 목사의 이해가 일치했다. 둘은 동업의 형태로 엮여 있었다. 바텐더는 기술과 약을 제공했고 원 목사는 자금과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칵테일은 은밀한 유통책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되었다. 막대한 수익금은 1:1의 비율로 원 목사와 바텐더의 몫으로 돌아갔다.
원 목사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에서 말세의 가르침에 푹 빠진 사람들만을 엄선하여 낙원이라 이름 붙인 이 기도원에 입소시켰다. 입소 조건 중의 하나는 강한 신앙이기도 했지만, 두 번째 조건은 전재산을 헌납하는 것이었다. 되도록이면 가족 전체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형편 없는 식사를 제공받고 육체를 혹사시키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성노리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몸 바쳐서 믿어야할 신앙의 시련이라 생각하고 달게 받아들였다. 설령 이곳의 정체를 깨닫고 나가고자 하더라도 주위를 둘러싼 3미터에 가까운 담장을 넘어갈 재간이 없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감시하는 바텐더의 하수인들을 이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재산을 다 잃고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설령 여기서 나간다 하더라도 사회로 돌아갈 길이 막막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며칠에 한 번씩 치뤄지는 칵테일에 의한 환각파티로 인해 그들의 정상적인 판단력은 극도로 쇠퇴하고 있었다. 오래 지낸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의 가족이 병이나 영양실조로 죽어 넘어지더라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탈출하려다가 맞아죽은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그의 시체와 가족들을 걷어차며 비난했다. 자신들에게 이러한 낙원을 열어준 원 목사를 열렬히 찬양하며 그를 노래하는 것으로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이곳은 살아있는 자들의 지옥인 동시에 천국이 되었다.
"에잉... 쯧쯧... 물 주는 양을 조절하라고 했거늘...."
바텐더는 하우스 바닥에 고인 물의 양을 손으로 재보고 투덜거렸다. 이곳 기도원을 총괄하고 있는 부목사 김태윤은 전직 깡패로 교회와 기도원을 비호하고 있는 조직의 행동대장 출신이었다. 말이 좋아 부목사지 하는 짓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그는 농장의 경영이나 기도원의 신앙보다도 여신도를 덮치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잔소리를 한다고 해도 원료 작황은 좋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한 번 다 갈아 엎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쳇."
바텐더는 혀를 차며 바닥을 발로 찼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것들로 골라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썩 들게 자라난 것이 별로 없어 계속 투덜거리며 작업을 했다.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 그가 하우스를 벗어나려고 할 때 누군가 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구냐? 아까 너냐?"
랜턴을 비춘다. 하얀 빛 아래 드러난 상대의 얼굴을 보고 놀란 바텐더가 랜턴과 비닐봉지를 떨어뜨렸다. 랜턴이 꺼진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한줄기 빛이 사라지고 나니 완전한 어둠이 이곳을 감싼다. 그 어둠 속에서, 엉뚱한 소리가 들려온다.
"공자왈, 유붕자원방래, 부역락호?"
바텐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실루엣과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질린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씨...바... 뭐라는 거야?"
"공자 가라사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셨지."
송화의 취미 중에 하나가 고전읽기였다. 공사가 다망하여 예전만큼 자주 읽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여러 취미 중에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부분이었다. 바텐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뒤로 걸어봐야 닿는 건 벽 뿐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젠장, 니가 내 벗이냐? 도망친 실험대상 주제에 여길 어떻게..."
그러자 송화의 실루엣이 흔들거렸다. 고개를 젓는 모양이었다.
"많은 도움과 협력 끝에 도착했지.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나니, 즐겁기 짝이 없군 그래."
차분하게 말하는 송화의 등 뒤로는 몇 명의 사내가 더 서 있었다. 송화가 손으로 바텐더를 가리키자 두 명의 남자가 달려들어 바텐더를 결박했다. 팔을 등 뒤로 돌리고 수갑을 채운다. 손목에 와닿는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이 놀란 바텐더가 송화를 보며 악을 썼다.
"뭐야! 넌 짭새였던 거냐!"
"으음? 그거보다는 조금 높이 나는 새라고 해야 하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욕을 할 때는 개새라고는 하니 새는 새겠지."
송화는 바텐더를 붙잡고 있는 경찰들에게 몇 가지 더 지시했다.
"그놈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이야. 손에는 구속구를 채우고 입에는 재갈을 물려. 옷은 팬티까지 전부 벗겨서 뭐하나 숨긴 게 없나 샅샅이 훑어봐. 아주 작은 침으로도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다루는 놈이니까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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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 틀린 건 지적 바랍니다... 아직도 검사기가 먹통이에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