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12화 (21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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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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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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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약물 및 신경정신계통으로 박사학위를 따신 재원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수년 전부터 후원해 온 의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기도 하구요. 2년 전 부산에서 바텐더의 칵테일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나마 선방할 수 있었던 건 닥터 윤 덕분이에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가희를 내려다보며 송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리사는 결코 허튼소리를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제가 오늘 아침 급히 호출하여 서울로 모셨습니다. 당분간 채 검사님의 상태를 보면서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예요."

"도움이라니?"

"해독, 말입니다. 지금, 별로 정상은 아니시죠?"

송화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리사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다고는 하나 자꾸만 식은땀이 나고 괜스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판단이 뭔가 미심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답을 못 하는 송화를 대신하여 리사가 말을 이어나갔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번 칵테일과는 똑같지 않을 거예요. 짐작컨대 더 독해지고 더 강해졌겠지요. 곧 구해올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채 검사님의 협조가 필요해요. 닥터 윤의 치료에 응해주세요."

"곧 구해온다고....? 네가 말하는 오빠라는 사람은 한석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덮쳤을 때... 아쉽게도 한석은 이미 없었다. 원 목사는 물론 바텐더도 그렇고.... 소란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무슨 수로 찾겠다는 거야?"

송화가 고개를 들고 리사를 보니 여전히 웃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전처럼 활짝 웃는 얼굴까지는 아니었다. 살짝 미심쩍은 생각과 혹시나 하는 생각에 리사를 다그친다.

"뭔가 알고 있구나? 그렇지?"

"제가..."

리사가 뭔가 이야기를 하려 할 때 웨이트리스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원두커피에 살짝 입술을 적신 리사는 그제야 송화를 보고 한마디 했다.

"검사님도 커피 시켜드릴까요?"

"빨리 말이나 하란 말이야!"

송화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내려치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한다. 저 쪼그마한 의학박사는 리사의 등 뒤로 얼굴을 숨겼다. 벌떡 일어나 있던 송화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리사가 말?다.

"것 보세요. 지금 많이 격렬해졌어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송화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네가 말하는 치료인가 치질인가를 받도록 할게. 저 꼬맹이 의사 말을 들으면 된다는 거 아냐? 자, 이제 되었으니 빨리 아까 하려던 이야기나 계속 해봐."

꼬맹이가 반박한다.

"꼬맹이 아닌데...."

"아무튼!"

불만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던 가희는 다시 리사의 등 뒤로 숨었다. 리사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공짜로 알려드리기 싫다고 한다면요?"

"뭐라고?"

"바텐더를 잡으려고 꽤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더군요. 그런 놈을 눈앞에서 놓쳤으니 얼마나 원통하시겠어요. 저도 그놈에게 볼일이 있으니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지금 당장 쳐들어가 놈의 모가지를 따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저도 적잖이 피해를 보게 될 거고.... 그랬다가는 제가 상처 입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능구렁이 한 마리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니까요."

"...바텐더의 소재를 알고 있다? 그 말이지?"

"결재 받느라고 하루를 낭비하신 대한민국 검사님과는 달리 저희는 바로 따라 붙었으니까요. 지금 예린 언니가 놈들의 뒤를 밟고 있습니다."

그제야 송화는 리사의 그림자, 예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사님 어쩌구 하면서 자신을 비꼬는 게 역력한 리사의 말에 배알이 뒤틀리기는 했지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좋아. 조건을 말해봐. 듣고 판단해주지."

"후후. 너무 쌀쌀맞으시다. 저는 의사부터 붙여드리는 호의를 먼저 베풀었는데 검사님도 통 크게 수락하고 시작하시죠."

지끈거리는 머리와 리사의 빙글거리는 표정이 송화를 미치게 만들었다. 또 폭발하려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백기를 들어 올리기로 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해줄 테니 빨리 소재나 불어. 그리고 조건이고 나발이고... 다 말해봐."

"다 들어주시는 거죠?"

"불법적인 것만 아니라면."

"좋아요."

리사는 그제야 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녹음기를 꺼내놓았다. 이미 버튼이 눌려 돌아가고 있는 기계를 내려다보며 송화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지랄 맞게 치밀한 년 같으니. 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우선 바텐더는 말세교의 기도원에 숨어있습니다. 원 목사도 그곳에 있구요. 확인은 안 되었지만, 우리가 찾는 두 사람도 거기에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양소란과 최한석 말인가?"

"네."

한석의 이름이 나오자 리사의 얼굴이 살짝 그늘지는 것을 본 송화는 자신도 울적해지는 걸 느꼈다. 정신 차리자.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리사 역시 자신의 슬픔을 크게 내비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기도원의 위치는 계룡산 깊숙이 자리한 부남리라는 마을 근처예요. 지세가 험하고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천혜의 요새 형국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경비도 삼엄하고 내부는커녕 입구를 뚫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는군요. 예린 언니도 접근하는 게 고작이라고 할 정도로요."

그 밖에도 경비인원이라든가 주변 지형 같은 것을 줄줄 늘어놓는 리사를 보며 송화는 혀를 내둘렀다. 단 하루 만에 그들의 뒤를 밟고 이 정도의 정보를 캐오는 걸 보면 이 녀석이나 예린이나 매한가지로 무서운 놈들이었다. 아니, 년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송화는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네가 가지 않고 나 보고 거길 쳐달라? 너희가 직접 하려면 피해가 막심할 게 뻔하니까?"

"그런 셈이죠. 그런 나쁜 놈들 잡으라고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고 계신 거짆아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하는 리사를 보며 송화는 기가 찼다.

"웃지 마. 정드니까."

그러자 리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아직 안 드셨단 말이에요? 전 이미 정 많이 들었는데..."

"헛소리하지 마."

"헛소리라뇨. 저희는 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요. 남자들은 한 여자랑 했던 걸 가지고 구멍 동서라고 한다던데... 저희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막대동서라고 해야 하나? 저는 마땅한 용어를 잘 모르는데 혹시 검사님은 아세요?"

"너 정말!!"

송화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리사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데다가 테이블로 인한 간격이 있어서 무리였다. 대신 손에 잡히는 대로 카페 성냥갑을 집어던졌다. 어렵지 않게 그걸 받아든 리사는 자기는 담배는 피지 않는다며 그대로 내려놓았다. 송화가 씩씩거리고 있자니 리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정말... 부탁합니다. 부디 오빠를 구해주세요. 검사님이니까 믿고 부탁할 수 있어요."

".....네 남자라면서."

"그렇기도 하지만요. 전... 오빠 하나만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이미 오빠를 한 번 실망시키기도 했구요."

리사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얼마 보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자신의 마음을 이리도 휘젓는 남자. 한석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얼빠진 얼굴. 같이 놀이동산에 갔을 때의 얼굴. 자신이 유혹했을 때 어쩔 줄 몰라하던 얼굴. 본의 아니게 리사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우물쭈물해 하며 전봇대 뒤에서 나오던 얼굴. 그리고 자신이 차를 몰고 교회로 돌진했을 때, 헤드라이트에 비친 한석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온몸이 피에 절어 아귀 같은 모습으로 송화를 구해내던 그의 표정을 운전석에 앉아 지켜보면서 리사는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다시 눈을 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어떤 비아냥도 아닌 말 그대로 예의를 다한 인사다. 오히려 송화가 당황했다.

"야... 너, 안 어울리게 왜 그래."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리사가 허리를 폈다.

"제 일이 정리되면, 오빠를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검사님이 챙겨주세요.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빌려드리는 거니까 잘 쓰고 상처 없이 돌려달라고요."

"쓰긴.... 뭘 써."

송화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리사는 가희에게 몇 가지 더 부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카페를 나서자 저쪽 도로에 줄지어 대 있던 고속버스들이 시동을 걸었다. 그녀는 맨 앞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리사가 카페를 나가고 나서 송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희가 따라 일어섰다.

"저...저기...."

"응? 왜 그러죠?"

"피...피를 좀 주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송화는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가희가 뱀파이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가희는 송화를 데리고 한 대학병원으로 갔다. 거기에서 채혈을 마치고 송화는 검찰청으로 향했다. 건물을 들어서기 직전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말서를 쓰기 전에 병력을 한 번 더 지원해 달라고 해야 한다. 아무래도 시말서 말고 써야 할 게 하나 더 있을 것 같았다.

"미쳤지, 미쳤어."

두 손으로 뺨을 두드리고 그녀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더 미친놈들을 잡으러 가야하는데 여기서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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