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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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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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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이 없습니다. 거의 다 나왔지만..."
"아니요. 언니도 수고 많이 했어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온 것만 해도 용해요. 쉬세요."
한강 상류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도로에 그들의 차가 세워져 있었고 예린과 리사는 그걸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데군데 긁히고 라이트가 깨져있었다. 앞범퍼는 박살이 나 있고 보닛이 잔뜩 우그러져 있었다. 지난밤의 격렬하고 미칠 듯한 추격전을 지난 것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리사는 평했다. 예린은 리사의 지시에 따라 차로 돌아가 뒷좌석에 드러누웠다. 그녀도 몸이 아주 성한 편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십 수명의 상대를 향해 무용을 펼친 후다. 예린이 자리에 눕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이가 차에서 내려 리사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김리사."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리사는 애써 웃음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나중에 다 잘 정리되면 제대로 인사 드리러 갈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채 검사님."
두 사람의 눈빛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비록 어젯밤의 그 격렬한 탈출극을 함께 겪었기에 일종의 동지의식은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해묵은 앙금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리사가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것에 송화는 애써 차갑게 대답했다.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몸만 놀러 와. 커피 한 잔 정도는 타줄 수 있어."
"어머, 저는 원두커피 아니면 안 마시는데... 검사실에는 인스턴트 밖에 없지 않나요?"
"네가 오겠다고만 하면 커피메이커 하나 사둘 테니까 미리 연락만 해."
"후후, 그럴까요?"
으르렁거리는 송화의 말투와는 달리 리사의 말투는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두 여자는 나란히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침묵을 깬 건 리사였다.
"약... 했어요?"
뜬금없지만 통렬한 질문이었다. 무심하게 던지는 질문에 송화는 자기 몸이 송두리째 꿰뚫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송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눈을 감을 때마다, 뒷머리를 어딘가에 댈 때마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애써 고개를 젓는다. 동작이 몹시 거칠다.
"아니야, 하지 않았어."
"예린 언니가 바텐더에게 들은 걸 이미 말했어요. 오빠나.... 검사님, 둘 다 이미 약에...."
그러자 송화는 눈을 부릅 뜨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하지 않았다고! 내가 하지 않았다는데 무슨 잔말이 그리 많아!"
"......검사님 답지 않게 금방 화를 버럭 내시는 걸로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는군요. 그때도 약에 취한 사람들이 그랬어요. 아주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결국은 폭력적으로 변해서 남은 물론, 자기 자신을 파괴하곤 했죠. 바텐더의 약은 결코 단순한 뽕 수준이 아니에요. 사람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해요."
"난.... 하지 않았어..... 하지 않았다고....."
애써 부정하는 송화의 어깨를 끌어다가 리사가 안아주었다. 송화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조직의 수장급 인물과 검사, 두 여자의 묘한 관계는 지금 여기에 없다. 상처 입은 자와 그 아픔을 아는 사람의 서글픈 위로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한참 만에 진정된 송화는 길가에 놓인 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리사 역시 그녀의 근처에 앉았다. 시선은 한강에 고정시켜 둔 채, 송화가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바텐더를... 정말 잡아 죽일 셈이야?"
"봐서요. 그리고 그 전에 해야 할 일도 있구요."
"최한석... 말인가?"
"네. 당연하죠. 제 남자니까요. 제가 구해야죠."
당당하게 내 남자라고 말하는 리사의 말을 들으며 송화는 은근한 부러움에 사로잡혔다. 한석과 리사는 대체 어떤 사이일까 궁금하다. 오래 사귀었을까? 깊은 사이일까? 모르긴 몰라도 자기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예린을 보내 구하게 할 정도면 정말 보통 사이가 아닐 것이다. 속으로 생각한다. 자기야 기껏 약에 취해 억지로 한석에게 범해졌을 뿐이다. 그다음에는 소란이, 그 아이와의 행위에 덩달아 흥분해서 한석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교회를 탈출하기 직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덤벼들어 한사코 송화를 구해낸 그의 처절한 몸짓을 떠올린다. 가슴이 욱씬거렸다.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괜찮았죠?"
".......뭐?"
송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치켜들고 리사를 쳐다보았다. 한결같은 표정의 리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단둘이 갇혀 있었다면서요. 게다가 약도 했겠다... 충분히 재미 보셨겠는데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왜요? 안 했어요?"
"......"
경악에 찬 눈빛으로 리사를 쏘아보았지만, 그녀의 생글거리는 얼굴은 여전했다. 오히려 송화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간신히 변명 아닌 변명을 생각해 낸다.
"...나만 그런 건 아냐. 그 아이도... 그랬으니까...."
"아이...라뇨?"
"소란이라고.. 한석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아이가 하나같이 있었어. 그 아이도 우리와 함께 약을 했고... 예린이 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끌려갔었어."
"아!"
리사의 안타까운 외침에 송화는 고개를 들었다. 리사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유진이... 친구 말이죠? 그 아이도 찾고 있었는데...."
유진이? 송화는 그 이름은 몰랐지만,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한다.
"한석이가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도 눈앞에서 그 아이가 당하는 걸 보고 참지 못해서 대들다가 그런 거야. 그 자식들은 정말이지... 사람도 아냐. 난 이번에 바텐더뿐만 아니라 그놈들도.."
"그놈들도? 교회 놈들 말인가요?"
"그래. 그 자식들도 모조리 잡아버리겠어. 증거는 충분해. 내가 증인이다."
그러나 리사의 어두운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잡아넣으면... 그러면 다 해결되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무슨 소리야."
"아녜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리사가 고개를 젓는 걸 보고 송화는 자리를 털고 먼저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날 좀 서울까지 데려다 줘. 미리 대기시켜둔 병력이 있어. 원래는 내일 치기로 되어있지만, 오늘 바로 쳐서 놈들의 씨를 말려야겠어."
"출동은 언제죠?"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 대체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리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도 제 볼일이 있잖아요. 오빠도 구해야 되고 바텐더도 잡아야 되고."
조금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송화에겐 포기하지 못하는 마지노선이 있었다.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한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바텐더는 안 돼. 그놈은 잡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저런. 채 검사님 말씀은 결국은 살려주겠다는 거잖아요. 그런 개자식을. 교회 놈들도 마찬가지구요. 고마 다 쎄벼 쥑기뿌려도 시원찮을 점마들을 말이죠."
생글거리면서 말하는 "개자식"이라는 단어는 송화에게 쾌 커다란 이질감을 주었다. 게다가 리사는 사투리를 안 쓰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송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만큼 너희들의 방식이 탐나는 때도 또 없을 것 같다만... 그래도 난 대한민국 검사야. 니들이 활개 치게 둘 수는 없어."
송화가 뜻을 확고하게 천명하자 리사는 더는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렴요. 일단 타시죠. 모셔다 드릴게요."
두 사람은 차로 돌아갔다.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예린을 보고 더 쉬라고 이르고는 리사가 운전대를 잡았다. 미행은 없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좀 둘러서 갔다. 차가 달리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각자의 생각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핸들을 잡은 리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리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이 느낀 불안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나. 단순히 한석이 잡혀갔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초조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감은 닥칠 미래에 대해서 그녀 생각보다도 더 멀리 보고 더 깊게 보고 있었다. 바텐더가 살아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린이 한 소리다. 그녀가 맞다고 한다면 맞을 것이다. 예린이 가져온 정보를 통해 리사는 단번에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처리했다고 믿은 적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신뢰하고 있던 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다.
송병구 부장. 백당에서 아버지 다음의 사람을 꼽으라고 할 때 리사와 대비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동안 비록 수상한 기색이 보여도 아버지 항렬의 어르신이니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게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조금 불편한 듯해도 딸뻘의 여자아이에게 지시를 받는 게 불편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니... 내심 혀를 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바텐더를 잡아 족치고 한석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이제 예린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녀의 부상도 살펴야 한다. 결국 부산에 있는 인원을 빼내어 이쪽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만한 병력이 이동한다면 분명 부산의 세력은 동요하게 될 것이다. 송 부장은 감추고 있던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그 이빨은 리사의 등에 꽂혀 그녀를 난자할 게 분명하다.
"저기, 세워주면 될 거야."
어느덧 종로서 근처에 도착했다. 리사는 송화가 지시한 곳에 차를 세웠다. 송화가 지금 입고 있는 가운 비슷한 것은 이미 넝마가 다 되었기에 예린이 가지고 있던 여벌 옷 중 하나를 내주었다. 팔복과 발목을 여러 번 접어야 했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들어갔다. 송화는 차에서 내리며 감사를 표했다.
"농담이 아니라, 나중에 정말 놀러 와. 다 잘 해결되고 나면."
"잘 되겠어요?"
"되고말고. 내가 하는 일인데."
리사는 빙긋 웃으며 기어를 바꾸었다. 조수석 창문을 올리려는데 송화가 다시 얼굴을 들이민다. 리사가 물어본다.
"왜 그러시죠?"
그러나 송화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굉장히 우물쭈물해 했다. 한참 동안 고민하며 머리를 북북 긁어대던 그녀는 뱉어내듯이 말했다.
"아마도 오늘 밤 열한 시 정도에."
"네?"
"열 한시 정도에 종로가 조금 시끄러울지도 모르겠어. 차 막힐지도 모르니까 오지 마라."
리사는 순간, 마리를 생각했다. 마리라면 아마 이 말을 듣고 정말 열 한시에 종로에 가질 않겠지. 그렇지만 그녀는 마리가 아니라 리사였다. 리사는 빙긋 웃으며 송화에게 말했다.
"커피 메이커 좋은 걸로 사세요! 원두는 제가 사가지고 갈게요."
송화는 대답 대신 차 지붕을 두드렸다. 리사가 운전하는 차가 그곳을 벗어났다. 송화는 몸을 돌려 종로서로 들어갔고 리사는 예린을 재촉하여 부산의 병력을 움직이도록 했다. 한 놈을 잡고 또 다른 한 남자를 구출하기 위한 두 여자의 준비는 그렇게 차곡차곡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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