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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맨바닥에 자느라 온몸이 쑤셨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다 된 것을 보고 아침인 줄 알았다. 손바닥만 한 환기구를 통해 들어온 빛은 실내를 제법 밝게 해주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팔을 베고 잠들어 있는 소란이가 깨지 않도록 머리를 가만히 들어다 옆에 내려놓고 신문지를 쌓아 만든 베개를 괴어주었다. 선명한 눈물 자국이 못내 가여웠다. 창살로 다가가자 미애도 일어나 이쪽으로 왔다. 철창 너머로 있는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형제여."
"그럼 니가 내 형이냐? 암만 봐도 나보다 나이는 많아 보이니까 말이야."
어제 그 여자다. 이번에는 대동하는 사람 없이 혼자 찾아왔다. 내가 이죽거리며 도발해보았지만 그녀는 딱히 내가 바라는 표정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제가 말씀드리는 형제라는 건 영적 형제 자매를 이야기하는 것이랍니다. 육체적 나이는 무관합니다."
"그럼 무관하니까 난 말 까도 되겠네? 그치?"
미애가 옆구리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너무 까불지 말라는 신호겠지. 쳇.
"좋으실 대로 하십시요.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쳇. 대단한 대인배 나셨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옆에 있는 미애를 쳐다보았다.
"미애 신도님은 이제 마음이 좀 바뀌셨는지요."
무슨 소리일까 싶어 미애를 쳐다본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기도원에 있다면서요. 기도원으로 보내주세요. 김 권사님."
그러나 이번에는 김 권사가 고개를 젓는다. 단호하게.
"그곳은 정말 신심이 넘치는 분들만 입소가 허락된 곳입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제 갓 입교한 미애 씨는 너무 과한 요구를 하고 계세요."
"기왕 기도하는 거 언니와 함께하고 싶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크게 문제인가요?"
"목사님께서 크게 쓰일 인재들만 골라 보내주시는 곳인데 그렇게 떼를 쓴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가고자 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선택받은 분들이 아니고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원? 여기 말고도 또 다른 장소가 있는 모양이고 미애는 자신을 그곳에 보내 달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김 권사라 불린 마른 여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미애를 설득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완강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소소한 분란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래서 징벌실에 갇힌 것이고.... 결국 김 권사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제 선에서 어떻게 설득이 안 되는 분이군요. 나중에 목사님과의 면담을 주선해드리겠습니다. 그분이 결정하시는 대로 따라 주십시요."
"알겠습니다."
"지난번처럼 다른 신도들을 선동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주시면 지금 바로 꺼내드리겠습니다."
미애는 내 쪽을 보았다. 그리고 김 권사에게 물었다.
"이분들은요?"
"이분들은... 조금 다른 이유로 들어와 계신 분들이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지요. 어때요, 약속하시겠습니까?"
"그야...."
미애가 조금 주저하며 날 쳐다보자 이내 김 권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게 와서 박힌다. 따가울 지경이다.
"저 마귀 들린 한석 씨가 마음에 걸리시는 건가요? 원래 소란 양은 이미 지난번 저희 교회에서 입교식을 마치고 잠시 정리를 위해 나가 계셨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최한석 씨가 일을 어렵게 만들고 계시더군요. 모처럼 마음으로 하늘에 닿는 기도를 드리고 겨우 바른길로 접어들려는 소란 양까지 흔들고 계십니다."
자고 있는 소란이를 돌아보았다. 그때 소각장에서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를 찾으러 온 자기를 잡아두고 나가지 못하게 하던 교회에서 겨우 빠져나왔었다고. 아마도 소란이는 억지로 입교 약속을 해놓고 몸만 빠져나왔던 모양이다. 어제 새벽 내내 울다 지쳐 아직도 잠들어 있는 소란이를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난 창살을 쥐고 김 권사에게 소리쳤다.
"흔들긴 누가 흔들었다 그래. 오히려 저 아이를 흔든 건 당신들 아냐?"
"진정한 영을 접한 소란 양의 선택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요."
부아가 치밀었다. 난 창살을 거칠게 두드리며 외쳤다.
"진정한 영? 저 어린아이가 종교에 대해서 대체 뭘 안다고 바른길이니 영이니 뭐니 하겠어! 저 아이는 이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착실하게 살고 있는 녀석이야! 니들 같은 사기꾼이 쥐고 흔들어도 되는 그런 아이가 아니란 말야!"
미애가 다가와 나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한층 톤이 낮아진 김 권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을 접하지 못하고 바른 것을 보고 살지 못하면 그건 영적으로 죽은 삶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죽어? 죽긴 누가 죽어? 니들이 하는 사기 행각에 얘들 엄마가 통장 들고 나가는 바람에 가족들이 죽을 맛이지!"
"소란의 어머니께서는 이곳에서 최고의 행복을 맛보고 계십니다."
"행복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행복하려면 혼자 행복할 것이지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왜 쥐고 흔드는 거냐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가여운 분이군요. 일부러 성회의 자리까지 모시어 직접 보고 듣게 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귀 들린 채로 계시는 건가요? 안타깝네요."
"안타까워? 내가 다 안타깝다, 이 미친년아! 어제 그 미친 짓거리를 보고 있느라 내 눈이 썩어 빠지는 줄 알았다구! 내 눈깔 물어내!"
"보십시오. 지금 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열리면 어떤 세상이 열릴지 두고 보십시오. 지금처럼 물질과 탐욕에 찌든 세상이 아닌 맑고 순결한 영혼들을 위한 세상이 열리고 말 것입니다!"
"어떤 세상이 오든, 착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지 너희 같은 쓰레기 사이비 광신도들이 있을 세상이 아냐!"
내가 어떤 욕을 해도 미동도 안 하던 김 권사는 사이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쭉 찢어진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가 하는 짓을 정확히 찌르는 말에 가장 아파하는 법이다. 입가를 씰룩거리며 노여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도님이 감히......"
"나보고 니네 신도라고 하지 마! 이딴 걸 누가 믿어? 그래, 난 한석교 교주다! 신도라고는 나 하나뿐이지만 니들이 믿고 섬기는 목사 새끼보다 훨씬 위대한 새끼라구!"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그녀는 노여움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석 씨! 제발 좀요!"
날 부둥켜안다시피 하며 철창에서 떼어내는 미애 때문에 김 권사와 멀어졌다. 그러나 김 권사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 없이 똑바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굳은 어조로 말했다.
"뼛속까지 마귀에 물든 분이로군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겠습니다."
그녀는 그런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떴다. 소란도 어느새 일어나 구석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난 소란을 품에 안고 달래주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미애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징벌실 안을 서성였다.
"제가 일 좀 크게 만들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잖아요. 그걸 또 못 참고 버럭 하세요? 원래 그렇게 성질 안 좋아요?"
"미안해요, 미애 씨. 나도 모르게....."
"덕분에 저 여자가 나도 안 꺼내주고 그냥 가버렸잖아요. 내 계획이..... 아휴, 진짜."
미애가 자기 머리를 헤집으며 짜증을 부리자 소란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우리 선생님 너무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여기 오신 것도 다 저 때문인데...."
그러자 미애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왔다.
"미안. 소란아. 너나 선생님을 나쁘다고 하는 게 아냐. 나쁜 건 저 사람들이지... 휴우."
미애는 쭈그리고 앉아 내 품에 안긴 소란과 눈을 마주했다. 소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가 이상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이나 최근에 큰 수술 같은 거 한 적 있어요?"
"에? 그건 왜요?"
아무래도 이 여자는 의사라든가 약사라든가... 암튼 그런 사람들의 말투와 비슷하다. 본인 입으로 의사는 아니라고 했으니 설마 약사인가?
"어제도 말했지만 저들 수법 중에는 약을 쓰는 것도 있어요. 듣기로는... 향정신성 약물도 쓰는 것 같더군요. 저들이 한석 씨 병력까지 챙겨가며 투약할 것 같지는 않거든요."
무심하게 말하는 미애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긴 지들 말 안 듣는다고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다가 사설감옥 같은 곳에 처넣는 인간들이다. 마귀 들린 사람을 연출한답시고 약이 묻은 침으로 사람을 찌르기까지 하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특단의 조치"라고 한다면 대체 뭘 말하는 걸까. 두려움이 일었다.
"서...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러자 미애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건 장담 못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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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도 왜 여러분이 159회에서 "6번이 선영이 루트!"라고 생각하고 찍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