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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눈을 반쯤 감고 있던 정석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후다닥 움직이느라 미자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하체는 물속에 풍덩 잠기고 만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그런 거에 관심 있을 나이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보아하니 여자친구도 있는 거 같던데요?"
"뭐어? 여자친구?"
정석은 머리를 짚었다. 대개의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아이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 때는 그래도 애써 챙기려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그다지 여의치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다른 일이 많이 바빠 아이들에 대해서는 거의 미자에게 일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미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굳이 이야기하면 여자친구라기보단, 태근이를 따라다니는 애 정도? 왜요. 태근이가 말끔하게 생기고 애가 귀티가 나잖아요. 후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미자는 몸을 일으켰다. 욕실 한쪽에 걸려있는 가운을 걷어 몸에 두른다. 정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녀석이 지 엄마를 닮아서.... 매끈하게 생기긴 했지만.... 하아....이제 겨우 열 살 넘은 녀석이..."
"그 나이면 알 거 다 아는 거죠. 뭐."
"한번 불러다 혼을 내야겠어."
"에이,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아저씨는 그 나이 때 여자한테 관심도 없었나요, 뭐?"
"관심이 있는 거랑.... 이상한 책 보는 건 다른 문제지."
미자는 깔깔거리며 머리를 정돈했다. 욕실 거울 너머 정석을 쳐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너무 뭐라 그러지 마세요. 괜히 혼내고 이러면 몰래 숨어서 더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려나.... 에휴....."
정석 역시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자가 건네주는 대형 타올로 몸을 닦던 정석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미자에게 말했다.
"전에 말했던 대로 서울에서 춘천 쪽의 땅 대부분을 매입했어. 거기 도로라도 생기는 거야?"
"아마도요."
미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석은 늘 그녀의 말 하나하나를 마음속 깊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녀가 본다는 '앞'에 대해서 그녀는 자주 이야기하거나 명확히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어느 지역을 사는 게 어떠냐, 혹은 거기가 보기 좋아 보인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자금이 풍부한 정석은 그 대지를 매입해두었다. 그러면 대개 몇 달 이내에 그 지역 부동산에 호재가 생겨 값이 뛰어오르는게 보통이었다.
이제 정석은 땅장사를 통해 투자금의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 벌어들이는 것은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다. 개중에는 아직 오르지 않은 지역도 있었지만, 그다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정석은 그것들은 그대로 두었다. 언젠가는 오르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외에도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고 어음을 매입하며, 원래 하던 물류 일도 계속 하고 있었지만 이는 미자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일은 정석 자신이 가진 사업의 감으로 행하는 것으로, 그는 마음 한켠에서 너무 미자에게만 의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자가 그에게 넘겨준 자본금이 엄청난 규모이기도 했지만 그걸 불과 1년 사이에 몇 십배로 키워낸 것은 정석의 능력이 지대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번 주 수요일에 태근이 운동회예요. 오실 수 있죠?"
가운을 벗고 하늘거리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미자가 정석에게 물었다. 정석은 달력을 한번 스윽 보곤 대답했다.
"수요일? 글쎄...."
"뭐예요. 태근이가 아저씨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일이면 모르겠지만... 의뢰한 일에 대해 그날 보고 받기로 했어. 윤희가 그날 와."
"의뢰?"
"그래, 의뢰."
정석의 굳은 표정을 본 미자는 무엇에 대한 의뢰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정석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정석은 미자를 꼭 안아주었고 미자는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이내 눈을 감고 잠든 정석과 달리 미자는 한참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불도 켜지 않아 캄캄한 밤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수요일.
종로에 위치한 정석의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이 춘희의 안내를 받아 실내로 들어섰다. 정석은 미리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 회색의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손윤희. 정석의 사업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그가 고용한 변호사였고 주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석이 벌이는 물류 사업 중 핵심 사업은 일본에서 생산되는 각종 정밀기계와 화학물질의 수입이었다. 일본에는 정석 회사의 현지 법인이 있었고, 윤희는 그곳의 총괄 책임자인 동시에 정석이 개인적으로 시키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윤희는 춘희에게 차는 됐다고 말한 후 정석과 마주 앉아 가지고 온 서류를 꺼냈다. 귀국하자마자 이곳에 온 이유는 빠른 보고를 위해서였다. 윤희는 인사도 생략한 채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도쿄 신주쿠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목격자들을 만나본 결과 거의 틀림없이 그 근처에 있는 모양입니다. 거주지를 알아보기 위해 민단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정석은 윤희의 보고를 들으며 인상을 썼다.
"작년에 박통 죽고 나서 민단 사람들 술렁거린다고 들었어. 조직 정비가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인애 그년은 조총련계하고도 끈이 있었어. 거길 더 파보지 그래."
"접선을 위한 여지는 남겨두고 왔습니다. 다음 주 중에 간부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역시 윤희의 일처리는 빈틈이 없었다. 정석은 더 물어볼 게 없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중정 사람들한테도 내가 이야기를 넣고 있으니 조만간 지원을 보낼 수도 있을 거야. 수고했어."
윤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하는 일이 변호사의 본분과는 거리가 제법 있는 일이긴 하지만 정석의 밑에서 일하며 꽤 많은 보수를 받고 있기에 불만은 없었다. 서류 가방을 챙기는 윤희를 보며 정석이 물었다.
"간만에 귀국했으니, 집으로 가나?"
"네. 동생들 보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야겠지요."
"춘희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동생들 선물을 준비시켰어. 갈때 가지고 가도록 해."
윤희는 다시 한 번 정석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동생들을 회장님께 인사 시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집도 먼데.... 됐어. 어서 내려가봐."
윤희가 사무실을 떠나고 정석은 앞에 놓인 서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거기에는 인애의 행적을 추적하며 윤희가 기록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꼼꼼한 성격의 윤희는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었고, 그걸 읽은 정석은 뭔가 감지했다. 인애의 도주를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디 있는 거냐... 인애....'
미자의 능력에 대해 처음으로 고백 받던 밤,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이 정석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긴 했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담겨있었다.
- 그러면 태근이 아버님은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저에 대해 실망을 하고 그대로 이 집을 나가버려요. 그리고 인애라는 여자를 불러내어 그녀에게 빚진 것을 갚으려 하다가 그녀 손에 죽고 말죠.
미자와 맺어진 이후, 정석이 땅장사 이외에도 물류 사업을 계속 한 까닭은 인애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정석에게 그러했듯 그 역시 같은 방법으로 그녀를 압박해나갔다. 자본금이 막강한 정석의 압박은 성공적이었다. 인애가 이끄는 승화물류는 서서히 고사했고, 정석은 인애를 불러내어 승리를 선언하고자 했다.
그러다 그녀가 사라졌다.
정석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치도록 미운 그녀였지만,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불륜상대이기도 하고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상대다. 어쩌면, 그를 죽였을 지도 모를 상대다. 그런 사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니 정석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미자에게 털어놓고 의견을 구했지만 그녀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 정석과 그녀와 얽힌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정석은 사람을 써서 그녀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러기를 벌써 반 년째..... 이제 슬슬 꼬리가 잡힐 모양이었다.
'이번에... 잡고 말겠어.'
정석은 인터폰으로 비서인 춘희를 불러 차를 준비시켰다.
"어디 가시게요?"
정석은 자켓을 걸치며 말했다.
"명동 미스터 최가 보자고 했었어. 늦지 않았나 모르겠군."
그러자 춘희가 우물쭈물하며 정석에게 말했다.
"아까... 사모님 전화 왔었는데..."
"사모님? 미자가 왜?"
"태근이 운동회는 어떻게 하시겠냐고..."
정석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시계를 한번 올려다보곤 춘희에게 물었다.
"학교 운동회는 몇 시까지 하지, 보통?"
"네? 아마도.... 점심 먹고... 서너 시까지는 하죠."
"알았어."
정석이 회장실을 나서자 춘희가 그의 옷을 살펴보며 매만져주었다. 정석은 춘희의 손길에서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했다는 걸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곁을 지켜준 춘희가 고마웠다. 그래서 그는 춘희에게는 물론 그녀의 동생에게도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춘희가 더 이상 일해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고집스럽게 일을 계속 하고 싶어 했다. 정석은 그녀에게 비서실장이라는 직무를 맡겼고, 이제 춘희 밑에는 열 명도 넘는 직원이 있었다. 비서실 여직원 전부가 나와 정석을 배웅했다. 정석은 그녀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미리 회사 건물 앞에 준비된 대형 세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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