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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전혀 예상치 못한 원군의 등장은 정석의 어깨를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정석이 출근하고 나면 미자가 효진이를 데리러 집으로 왔다. 학교에 갔던 태근이는 방과 후면 으레 맞은 편 미자의 집으로 가서 동생을 만나고, 거기서 저녁을 먹었다. 정석은 미자에게 몹시 미안해했지만 그녀는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할 뿐이었다.
미자가 아이들을 전적으로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정석은 한결 여유가 생겼다. 금전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회사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밖에서 걸어 잠근 집에 어린 딸을 혼자 두고 회사에 가는 일은 없게 되었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래. 언니 말 잘 듣고, 잘 놀고 있어. 알았지?"
"응."
씩씩하게 대답하는 효진의 볼을 한번 쓰다듬어 준 정석은, 효진의 뒤에 서 있는 미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을 한번 끔뻑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석은 차를 몰고 현장을 한 번 돌아본 후, 그동안 미루어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그가 차를 몰아간 곳은 관할 경찰서였다.
"어떻게 오셨죠?"
경찰서에 들어서서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던 정석에게, 한 여경이 다가왔다. 반듯한 외모에 각 잡힌 정복을 입고 있는 여경은, 옷차림만큼이나 표정도 딱 경찰다웠다.
"뺑소니 사고에 대해서 여쭈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교통계군요. 절 따라오세요."
여경의 봉긋한 가슴 위에 놓인 명찰에는 채은희라고 적혀 있었다. 정석은 은희의 안내를 받아 교통계로 갔다. 은희는 정석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신이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담당인 모양이었다. 정석은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약 넉 달 전에.... 제 안사람이 집 앞에서 뺑소니를 당했습니다. 그때 어떤 경찰분이 수사 의뢰를 하면 가해자를 찾을 수 있다고 해서 부탁했는데..."
"수사 의뢰를 하셨다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은희는 책상 뒤에 있는 캐비넷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육중한 철문이 달린 캐비넷은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은희는 정석을 돌아보고 말했다.
"피해자분 성함이...?"
"김양숙입니다."
"잠시만.... 여기 있군요."
은희는 산더미처럼 쌓인 파일더미에서 하나를 꺼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정석은 가슴 한쪽이 무거워졌다. 그가 의뢰한, 부인의 사고에 대한 조사는 이렇게 철제 캐비넷 속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간동안 먹고 사는데 바빠 미처 여기에 신경쓰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은희는 파일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정석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기재된 서류와 대조도 해본다. 정석은 초조했다.
아니나다를까, 은희가 꺼낸 이야기 역시 정석을 절망시켰다.
"딱히 수사 진행이 안 되고 있었네요. 무엇보다 증거가 너무 없고, 목격자도 없어서요. 아무래도 수사 종결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수사 종결이라는 말에 정석은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증거 수집을 하긴 한 겁니까? 아니면 목격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나요? 여태 뭘 했다고 수사종결입니까, 종결은!"
"그야..."
"물론 저도 먹고 사느라 바빠 여기에 신경쓰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당신들은 이거 한다고 월급 받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저희 사정도 생각해 주십시요. 여기 보시다시피 밀린 사건만 해도..."
"밀리고 자시고는 당신들 사정이고, 난 말이죠. 마누라가 죽었단 말입니다. 핏덩어리 같은 자식들 둘을 남기고, 그대로 죽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누라를 죽인 새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야 한다니, 이거 억울해서 어디 살겠습니까?"
은희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정석의 말은 구구절절히 맞다. 그러나 일단 조직에 속해 있는 그녀가 정석에게 해줄 수 있는 말과 대응은 미안하다는 말과, 더는 어렵다는 반응뿐이다. 정석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고 결국 저쪽 책상에 앉아있던 교통계장이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채순경?"
"아, 저 그게...."
은희는 파일 중에서 한 장짜리로 되어있는 조서 한 장을 꺼내어 계장에게 내밀었다. 덥수룩한 수염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계장은 조서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곤 다시 다시 정석을 바라보았다.
"남편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담배 태우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여태까지 소리 지르느라 머리가 띵한 정석에게 반가운 제안이기도 했다. 계장은 정석을 데리고 경찰서 뒷마당으로 갔다. 계장이 내민 솔담배 한 개비를 받아든 정석은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이자, 싸구려 담배의 탁한 맛이 그대로 폐까지 밀려들어온다. 사고 전에는 마누라 등쌀에 하루에 반 갑도 채 피지 않던 그였지만 요즘 들어 담배가 많이 늘었다. 계장 역시 담배 하나를 입에 물더니 정석을 보며 말했다.
"박 선생님.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이건 좀 어렵습니다."
정석도 내심 알고 있었다. 여태 이걸 미루어온 것도 자신이다. 이들만 탓할 순 없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시간이 너무 흘렀습니다. 원래 뺑소니 사건은 초기 조사가 중요합니다. 제가 조서를 보니 초동 수사를 할 만큼 했습니다. 파편이나 타이어 자국은 모두 확보했습니다만 무엇보다 사고 당시의 목격자가 없으니 대조 수사고 뭐고 할 수가 없어요. 이점을 생각해 주십시요."
계장의 간곡한 말투는 정석을 진정시켰다.
"목격자만 찾아오면, 수사가 재개됩니까?"
"신뢰할 만한 목격자만 확보하신다면, 물론이죠."
정석은 계장에게 인사를 고하고 돌아왔다. 회사에 돌아온 그는 춘희가 타 준 커피를 손에 들고도 계속 생각했다. 도로변에 가끔 걸려있는 교통사고 목격자나 뺑소니 차량을 본 사람을 찾는 플래카드. 그런 거라도 하나 걸어야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효과가 있으려나...'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기에는 죽은 아내에 대해 너무 미안했다. 생전에 그리 잘해주었다고 말할 순 없다. 지금 와 이러는 것도 결국은 자기 만족을 위할 뿐일지도 모른다.
'플래카드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정석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돈문제에 미치자 가슴이 답답했다. 최근에는 여태 현금으로 결제해주던 업체까지 어음으로 돌리는 바람에 돈 흐름에 동맥경화라도 걸릴 지경이다. 마음 같아서는 들고 있는 어음을 들고 명동 등지로 나가 할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지만 신용으로 먹고 사는 그가 그런 일을 했다가는 당장 다른 업체들 거래까지 끊길 판이다.
"저기, 사장님...."
복잡한 생각에 여념이 없던 정석은, 춘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왜?"
"몇 번을 불렀는데...."
"뭣 좀 생각하느라. 왜 그래?"
"손님이 오셨는데요."
정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은 자리 앞에는 파티션이 쳐져 있었다. 그 너머 놓여있는 2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이가 정석을 보고 손을 들어보였다. 정석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차를 준비하려는 춘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차는 됐어. 남 사장, 나가서 이야기하지."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던 인애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뭐하러? 여기도 아늑하고 좋은데. 나도 손님인데 차라도 내주지 그래?"
"별로 내키지 않는 손님이니까 그러지."
"내가? 왜?"
천연덕스럽게 웃는 인애를 보면서 정석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석의 회사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녀와의 관계를 단절한 이후부터다. 이쪽 바닥에서 수년간 굴러온 정석이다. 증거나 증인은 없어도 그가 처한 상황이 어디서 야기되었는가를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의 원흉인 인애가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정석의 눈치를 보는 춘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인애는 춘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애 때문인가?"
"무슨 소리야?"
"저렇게 젊고 탱글탱글한 년이 가까이 붙어 있으니 나 같은 늙다리는 눈에 안 찬 거 아냐? 저 애는 또 얼마나 따드셨을까?"
"인애!!"
정석은 고함을 질렀고, 춘희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춘희가 정석을 잘 따르고 단둘이 일하는 시간이 많다고는 하나 두 사람의 사이는 담백하기 그지 없었다. 정석은 시골에서 동생까지 데리고 올라와 힘들게 사는 춘희를 가여워했기에 많이 챙겨주기는 했다. 그렇지만 인애가 방금 내뱉은 저속한 방식으로는 춘희를 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정석은 인애를 끌어내지 않고는 사무실에서 내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춘희에게 밖에 잠시 나가있으라고 한 후 인애의 맞은 편에 앉았다.
"유치하게 이럴 거야?"
"유치? 글쎄. 모르겠는데? 나만큼 나이 먹으면 유치가 뭔지 벌써 까먹거든."
"우리 끝내자고 했잖아."
"누구 마음대로?"
"애들 돌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당신까지 신경 쓸 수 없어."
그러자 인애가 빙긋 웃으며 묘한 소리를 했다.
"흐음. 애들은 따로 봐주는 사람이 있던 것 같던데."
정석은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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