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7 / 0471 ----------------------------------------------
[외전] 장미정원
일요일이 되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정석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날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일요일 새벽까지 접대하느라 술을 퍼마신 여파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일어나서 아이들 밥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질 않았다. 지난 며칠간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분명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도 부족할 정도로 빨래가 쌓여있을 게 분명하다. 청소는 물론 설거지도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들이 정석의 머릿속을 짓누르지만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어제의 술자리 대화를 계속 복기한다. 정석은 인내와 거래를 끊은 후, 거래처들이 지나치게 냉랭해진 이유를 알고 싶었다. 폭탄주 서너 잔을 말아 마신 거래처 사장이 하나씩 겨우 털어놓는 이야기에서 약간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자신을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승화물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애가 지금은 그렇게 정석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대체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정석은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으면 놓아주는 사람과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는 사람. 인애는 명백히 후자 쪽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런 사람이란 걸 모르고 등 돌린 것도 아니지만 현실은 너무도 뼈 아팠다. 정석은 아예 물류업을 접어버리고 다른 조그만 가게라도 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두 아이를 굶기지 않고 키울 길을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두 아이를 위한 밥상을 차려야 한다. 정석은 일어나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과 사투를 벌인다. 그런 인기척을 느꼈는지,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아빠, 아파?"
토끼 그림이 그려진 잠옷을 입은 효진이었다. 정석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안 아파... 아니, 조금."
"음, 어떡하지?"
효진이는 정석이 덮고 있는 이불을 끌어올려 아빠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마도 자기가 감기 걸려 누웠을 때, 엄마가 이불을 덮어주던 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창을 통해 흘러들어 오던 아침 햇살이 가려지고, 정석은 다시 안온한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효진은 제 아빠의 머리를 토닥이더니 말했다.
"오빠랑 언니네 집에 가서 밥 먹을게. 아빤 코오 자."
"그...그래...."
정석은 효진이가 말한 언니네라는 게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아마도 주인집이리라 생각했다. 거기 식모를 언니라고 부르는 걸까. 얼마 전까지는 이모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석은 다시 꿈결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석이 눈을 떴을 때, 태양은 아주 높은 곳에 있었다. 잠이 덜 깬 정석이 멍한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았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손끝 하나 들어 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정석은 점심이라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부엌으로 향했지만, 그도 여의치 않았다.
집 안은 아주 조용했다. 바깥에서 간간이 일상적인 소음만이 들려올 따름이다. 정석은 슬리퍼를 꿰어신고 집주인 윤 씨네 집으로 올라갔다. 식모에게 아이들이 여기 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태근이와 효진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정석은 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불러보았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정석은 좌우를 돌아보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아이들을 찾을 수 있나 막막했다. 아까 잠결에 듣기로 효진이는 언니네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나 정석은 효진이가 친한 언니가 누군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빠 아이들의 생활까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였다.
그때였다.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석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효진의 목소리였다. 앞집에서 들려왔다. 정석은 앞집 대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어? 아빠다."
대청마루에 앉아 만화책을 보며 시시덕거리던 태근은 대문 앞에 서 있던 정석을 발견했다. 어떤 여자의 무릎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던 효진도 오빠의 소리에 고개를 들고 정석을 본다. 그리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일어났어?"
정석은 효진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근데 니들 여기서 뭐 하니?"
남의 집으로 들어서기 멋쩍은 정석은 대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가 알기로 그의 집 앞집은 꽤 오랫동안 빈집으로 있던 집이었다. 너른 마당이 딸린 한옥 양식의 집이긴 하지만 새마을 운동 시절에 올렸던 슬레이트 지붕이 다 삭을 정도로 낡은 집이었다. 사람이 오래 살지 않아 마당에 아이 키만 한 풀이 무성하고 군데군데 담장도 무너진, 딱 보기에도 흉가로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회사와 집을 오가기에 바빴던 정석이었던지라 앞집에 누가 이사를 왔는지 여태 전혀 알아차리질 못했었다.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효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청아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정석은 쭈뼛거리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남의 집에서...."
태근이가 대답하기 전에 여자가 먼저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심심하지 않고 좋죠, 뭐."
마루에 가까이 선 정석은 그제야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를 자세히 관찰한다. 평범한 티셔츠에 긴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뽀얀 얼굴은 무척 어려 보였다. 스무 살은 고사하고 십 대 후반도 안 될 것 같다. 잘해야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정도? 갸름하면서도 선이 얇은 얼굴은 귀여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빛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정석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릴 정도였다. 그 눈은 마치 정석을 그대로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어른은, 안 계시니?"
아무리 보아도 정석보다 훨씬 어려 보였기에, 그는 말을 놓기로 했다. 그러자 여자애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긴 저 혼자 살아요."
"혼자? 부모님은?"
"다른 곳에 따로 사세요. 여긴 제집이고, 저 혼자 사는 곳이니 애들이 이렇게 놀러 오는 거 좋아한답니다. 애들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정석은 고개를 들고 집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놓인 종이박스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세간살이도 보이지 않았다. 이삿짐을 아직 다 풀지도 않은 모양이다. 지붕이야 슬레이트가 얹어져 있다곤 하지만 개방형 한옥처럼 지어진 이 집은 혼자 살기에 지나치게 컸다. 정석은 좀 의아했다. 그녀는 여길 "자기 집"이라고 표현했다. 서울 외곽인 이 동네 집값이 그리 비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높게 보아도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아가씨가 덥석 살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석은 그녀의 부모님이 사주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가씨 이름이?"
"진미자예요."
"미자 양. 암튼 미안하게 됐습니다. 쉬는 날인데 애들이 이렇게 방해를 해서."
그러나 미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에게 더 고마워요. 여기서는 참 심심하거든요."
정석은 마루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태근이가 좋아할 만한 만화책이 잔뜩 있었고 효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도 한 아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자기 집에 있던 책들은 아니다. 아이들이 이 집에 놀러 온 건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석의 시선을 눈치챈 미자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수준이 딱 아이들이랑 맞아서요, 제가 보려고 산 책이지만 아이들도 좋아하죠."
"으음...."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일단 앉으세요. 좀 있으면 식사가 오니까요."
"식사라니?"
정석이 의아해하자 미자는 마루 한쪽에 놓인 전화기를 가리켰다.
"아까 볶음밥 하나 시켜놨거든요. 저희는 아까 먹었으니 정석 씨 먼저 드세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식사를 권하기에 정석은 거절도 차마 못 하고 엉거주춤 그 자리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채 오 분도 지나기 전에 오토바이가 도착하더니 배달원이 볶음밥 한 접시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정석이 값을 치르려고 하자 미자는 이미 냈다며 웃었다. 그녀가 수저를 챙겨주며 정석에게 식사를 권했다.
"얼른 드세요. 어제 새벽까지 드셨으니 속도 다스리게 짬뽕 국물 먼저 드시든가요."
"그...그런가?"
정석은 작은 그릇에 담긴 짬뽕 국물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론이나 반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자기 말만 우선하는 미자의 태도는, 열여덟 살 아가씨치고는 너무도 노련했다. 게다가 자신이 이름을 밝혔던가?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신 걸 이야기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짬뽕국물을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적시며 위장으로 흘러들어 간다. 정석은 껄끄러운 속이 단번에 진정되는 걸 느꼈다.
"어으....좋다."
자기도 모르게 거한 소릴 내고 만다. 그 모습을 보며 태근이와 효진이, 미자가 셋이 동시에 킥킥거리고 웃고 있었다. 정석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미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도 느꼈지만, 그녀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석은 딱히 부담스럽다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녀의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