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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태근은 하굣길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아까 다른 놈들과 어울리며 몇 군데 얻어맞은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지난번 사고에 대해서 생각했다.
며칠 전이었다. 효진이가 혼자 집에 있으면서 석유 곤로를 한 번 쓰러뜨린 적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심지가 다 닳아있어 불은 나지 않았지만, 부엌 바닥은 기름으로 난장판이 되어 한바탕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태근이가 발견했다. 집에 있는 걸레를 전부 가져와서 몇 번이고 닦아내어 흔적은 지웠다. 효진이에게는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잘못을 저지른 건 효진이지만 태근이는 그게 자기 잘못같아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태근은 아직도 아찔했다. 만약 거기에 불이 붙었다면? 어린 여동생이 그 불을 끌 수 있었을까. 정말 불이 붙어서 뜨거운 불과 매캐한 연기가 집 안에 가득 찼더라면? 밖에서 잠가 걸어놓은 문을 효진이가 열고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만으로도 태근의 뒷목이 뻣뻣해진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면서 효진이가 나오지 못하게 꽂아두는 숟가락 하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새삼 깨달았다. 그걸 알게 되고 나니 도저히 학교에서도 수업에 집중이 안 되었다. 그 좋아하던 축구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커서 차붐처럼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도시락통 덜컥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숨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싸움박질하고 선생님께 혼나느라 평소보다 귀가가 많이 늦었다.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 집에 도착한 태근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 앞에 꽂아 둔 숟가락이 없었다. 집은 비어있었다.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태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집주인 윤 씨네 집으로 갔더니 식모는 효진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윤 씨도 없었다. 태근은 다급한 마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샅샅이 뒤져보았다. 혹시 전처럼 숨바꼭질하겠다고 이불 틈 사이로 작은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장롱 안까지 전부 살폈다. 집안 어디에도 여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훔쳐갈 것도 없는 집구석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도둑이 든 흔적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태근은 신발도 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뛰쳐나왔다. 효진이의 또랑또랑한 말투와 서글서글한 생김새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동네 슈퍼로 달려갔다. 마을 입구에 있는 그 슈퍼는 가끔 태근이와 효진이가 가서 과자 따위를 사고 장부에 달아놓곤 했다. 그러면 나중에 정석이 몰아서 계산해놓곤 했다. 태근은 슈퍼 문을 벌컥 열고 인사도 잊은 채 소리쳤다.
"아저씨! 제 동생 못 보셨어요?"
슈퍼주인 장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근을 돌아보았다.
"아니? 오늘은 안 왔는데?"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태근은 장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도 하지 못하고 다시 뛰쳐나왔다. 동네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을 보면 동생을 행방을 묻는다. 아무도 효진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태근은 동네 곳곳, 아이들이 모여 놀만 한 공터를 헤집고 다녔다. 그 어디에도 효진이는 보이지 않았다. 태근은 미친 사람처럼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신발 한 짝이 벗겨져서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태근은 그걸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효진이를 찾는 게 더 급했다.
"효진아! 효진아!!!"
아무리 불러도 동생의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태근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어 간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는다.
"효진아! 효진아!!!"
목이 터져라 동생을 부르며 동네를 샅샅이 뒤졌지만 작고 조그만 그의 동생은 나오지 않았다. 태근은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대체 동생은 어디로 간 걸까. 밖에서 걸어놓은 숟가락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분명 누가 밖에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동생이 그 사람을 따라 나갔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다섯 살이라고는 하지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늘 신신당부하고 있는데 말이다.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한 태근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주인집에 가서 전화를 빌려 아버지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턱 막힌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면, 뭐라고 할 것인가. 학교에서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랬더니 집에 있어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 것인가? 그럼 대체 아버지는 자신을 뭐라고 다그칠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태규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떠올려 거기에 죄를 뒤집어씌운다.
'이게 다 재규 그 새끼 때문이야.'
재규 뿐만 아니다. 동생이 없어진 게 축구를 권하고 자신을 붙든 친구들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태근의 분노는 맹렬하게 타올랐다.
'효진이한테 나쁜 일만 생겨봐... 내가 아주 이 새끼들을...'
이렇게 생각하던 태근의 가슴이 덜컥한다. 나쁜 일이라니. 그걸 생각하고 나니 가슴 속 불안은 더욱 일렁인다. 머리가 어지럽다. 토할 것만 같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태근은 황급히 한쪽 팔로 눈가를 훔쳤다. 한번 흐르기 시작하자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뛰어다니느라 숨까지 차올랐던 호흡이 가빠지면서 울기도 힘들었다. 태근이는 꺽꺽 소리를 내며 집 안에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엉엉 울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오빠, 울어?"
"안 울어...."
동생 앞에서 울다니, 꼴불견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효진 앞에서는 울지 않았던 태근이다. 그나저나, 동생.....? 뭔가 깨달은 태근은 고개를 홱 들었다.
"효...효진아!"
깜짝 놀란 태근의 눈앞에는 그의 동생이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입가에는 뭔가 가득 묻히고 있었고 손에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효진은 태근의 모습이 이상하게 생각된 모양이다. 그녀는 태근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집에 왔다가 왜 갑자기 다시 나갔어?"
천연덕스럽게 묻는 동생을 향해, 태근은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없어져서 찾으러 갔잖아!!!"
태근을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휘둘렀다. 효진의 머리통을 때린다. 갑자기 얻어맞은 효진은 머리를 감싸 쥐고 와앙- 울어버린다. 태근은 그 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지만 그렇다고 달래주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킨 동생이 예뻐 보일 리 만무했다.
"저런, 오빠가 동생을 때리면 어떻게 해?"
누군가 효진의 등 뒤에서 나타나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굉장히 살가운 목소리다. 효진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던 태근은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누구세요?"
고개를 올려다 본다. 거기에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어깨끈이 아주 얇은 끈으로 되어 있어서 그녀의 목과 쇄골이 단번에 드러나는 차림이다. 머리카락은 아주 길어 어깨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었고 하얀 얼굴과 대조적으로 붉디붉은 입술이 하관에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태근과 시선을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네가 태근이지? 효진이랑 짜장면 좀 먹고 있었거든? 너도 먹을래?"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태근은 엉겁결에 여자를 따라 앞집에 들어갔다. 울고 있던 효진은 여자가 어르고 달래자 이내 울음을 그쳤다. 앞집은 옛날 한옥식 집이었는데 가운데 자리한 대청마루에는 신문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짜장면 그릇이 세 개 놓여있었다.
"너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시켜놓기는 했는데 말야, 네가 그렇게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가버리는 바람에 지금 좀 불었을 거야. 우린 먼저 먹고 있었거든? 너도 먹어."
여자는 짜장면 그릇 하나와 나무젓가락 한 벌을 태근이에게 안겨준다. 효진은 남은 그릇 중에 하나를 들고 서툰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태근은 아까 효진의 입가에 가득 묻히고 있던 춘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줌마는 누구...."
그러자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으며 태근에게 말했다.
"이제 겨우 열여덟인데 아줌마라니. 누나라고 불러."
"누나요?"
"응. 미자 누나라고 부르면 돼."
태근은 난데없이 앞집에 나타난 여자의 정체도 궁금하고 효진이가 어째서 여기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자신의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효진이가 말을 한 건가? 그러나 그중에서도 자신이 도착할 시간을 대체 어떻게 알고 맞추어 짜장면을 시켰는지가 가장 궁금했지만 간만에 먹어보는 짜장면이 너무도 맛있어서 그런 질문들을 깡그리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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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