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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타닥타닥타닥타닥-
단단한 포석이 깔린 길 위로 달렸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송화가 날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쏘아붙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일이 좀 있어서 말야. 많이 기다렸어?"
"몰라."
입술을 삐죽 내미는 송화의 엉덩이를 몇 번 두드렸다. 밖에서 왜 이러냐며 몸을 빼내지만 그렇다고 아주 싫은 눈치는 아니다. 그녀는 내 팔뚝을 붙들어 안으며 말했다.
"늦은 사람이 밥 사기."
"벌써 밥 먹게?"
"시간이 어중간해. 영화 보고 나오면 배고플 거야."
예매해둔 영화의 시작은 열두 시. 두 시간 정도 본다고 치면 나올 때가 두 시 정도 되니 그녀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가 좋아하는 해산물 파스타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한산했다. 햇볕이 밝게 내리쬐는 거리에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이었다. 송화는 내 팔짱을 끼고 걸으며 쇼윈도 품평회를 시작했다. 직업의 특성상 거의 항상 정장만 입고 다니면서도 상당히 여성스럽고 나풀나풀한 종류의 옷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한 쇼윈도에서는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기에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을 본다. 거기에는 레이스가 가득 달린 원피스가 걸려 있었다.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런 거 사주면, 자주 입고 다닐려나?"
그러자 송화는 고개를 저었다.
"사주면 좋긴 한데... 돈 아깝다. 니 말대로 별로 입을 일이 없잖아."
"왜 없어? 나랑 데이트할 때 입으면 되지."
내 대답을 들은 송화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입은 옷도 이쁜데?"
"글쎄. 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고른 옷이 아니거든."
옷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며 더 걸어갔다. 도착한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위한 테이블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마주 앉은 우리는 샐러드와 파스타를 나누어 먹었다.
"와인도 한잔할래?"
"대낮부터 와인은 무슨."
눈을 살짝 흘기는 그녀였지만 바로 옆 트레이 카트에서 내가 와인을 꺼내자 군말 없이 잔을 든다. 마치 피처럼 붉디붉은 와인을 잔에 따른다. 내 잔은 없었다. 그녀가 마시고 난 잔을 내가 받아 마신다. 그녀의 입가에 와인이 조금 묻어있기에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내 손길을 음미했다. 손가락에 묻은 와인을 들여다본다. 내 입으로 가져와 쪼옥 빨아냈다. 송화는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영화 시작하겠다. 얼른 가자."
가게를 나온 우리는 서둘러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가게와 마찬가지로 영화관은 텅 비어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제목은 모르겠는데 주인공이 삼류 깡패였다. 내가 화면을 가리키고, 그다음에 다시 송화를 가리키며 어이없어하자 영화를 고른 당사자께서 웃으며 말했다.
"나름 재미있겠더라고,"
"어련하시겠어."
"불만이야?"
"아니요. 어찌 감히 공명정대하며 불의를 참지 않으시는 검사님이 고르신 영화를 어이없다 하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아무리 주인공이 깡패라고 한들 말이죠."
"뭐야, 그게."
송화는 까르르 웃으며 내 팔을 몇 번 두드렸다. 영화 내용은 괜찮았다. 삼류 깡패가 더 나은 곳을 향하며 온갖 일을 벌이다가 무너져 간다. 그런 내용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검사님께 물어보았다.
"영화로서의 재미는 별 몇 개?"
"음.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반."
"생각보다 후한데?"
"후하다니. 좋은 영화니까 그러지. 설정도 참신하고 화면구성이나 전개도 재미있고 말야. 아까 걔 말투 봐봐. 배배배배배배신이야, 배신!"
영화에 나왔던 주인공 깡패 말투를 흉내 내는 송화의 모습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참신은 개뿔. 난 좀 구질구질하고 정신없어 보이던데. 그럼 현실적으로는 어때? 저런 게 가능해?"
영화에서는 조폭과 검사가 결탁하고 서로 배신하는 장면이 나왔다. 송화는 씁쓸한 표정으로 "글쎄?"라고만 할 뿐, 딱히 그렇다 어떻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계속 물어보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영화관을 벗어나 길로 나왔다. 여전히 내 팔짱을 끼고 있는 송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차 가지고 올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팔을 놓지 않았다.
"그냥 걷자. 날씨도 좋은데."
"그럴래?"
지금이 가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덥다. 햇볕이 강렬했다. 송화는 핸드백에서 접이식 양산 하나를 꺼내어 펼쳤다.
"자기가 들어."
"내가?"
남자가 들기에는 자못 부끄러운 디자인인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양산이다, 송화가 들고 다니기에는 옆에 나란히 선 내 키에 맞추기 쉽지 않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양산을 들고 송화와 나란히 선 채로 길을 따라 걸었다. 송화의 걸음과 내 걸음이 점차 한 박자로 맞춰진다. 하이힐의 또각거림, 내 구두의 딸깍거림이 한음처럼 난다. 우리의 발걸음 소리가 길을 가득 채운다. 그 가운데 송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영이가 나 엄청 부러워하는 거 알지?"
"왜?"
"애인이 있잖아. 이렇게."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는 송화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혼자서 한참을 웃었다. 가까스로 웃음이 잦아들자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임용되고 연수원에서 제일 친했던 애가 하영이였어. 2차시험 준비할 때부터 서로 알게 되었는데 죽이 잘 맞아서 2년 내내 붙어 다녔지. 걔 이름에 '영'이 들어가잖아. 그게 꽃부리 영이래. 난 아예 이름이 그렇고... 그래서 우리끼리 꽃자매라고 했었거든? 근데 막상 말해놓고 나니까 둘 다 적응이 안 되어서 한참을 웃었어. 남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했지. 휴일이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같이 먹고 놀고 그랬는데 요새는 서로 바빠서 그게 쉽지 않네."
"근데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
"안 좋다기보다는 ... 자존심 때문에 서로 티격태격하는 거야. 예전에 둘이서 술 먹다가 검사가 낫네, 변호사가 낫네 하고 서로 다투었거든. 그 후로 약간의 알력이 생긴 거지. 하영이도 원래는 성적우수자로 검사가 될 기회가 있었는데 녀석이 고집을 피우더니 변호사로 간 거야. 박 회장에게 신세를 갚아야 한다나 어쨌다나."
"아...."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송화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검사 무시하는 거냐고 막 뭐라고 했더니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걔도 고집이 있는 애니까 까칠해진 거야. 원래는 친해. 지금도... 친하고. 둘도 없는 친구야. 내가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고, 나에 대한 거의 모든 걸 아는 유일한 친구가 바로 하영이야."
오늘따라 송화가 말이 많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던 그녀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우리 부모님은 아주 고루한 분들이라 여자가 무슨 공부 많이 하냐고 타박만 했지, 오빠들은 대학 뒷바라지까지 다 해주었으면서 나 대학 다니는 거에는 도와준 적이 없어. 심지어 사시 패스해서 연수원 들어갈 때도 별로 안 좋아하셨다니까? 거기서 2년이나 있어야 된다니까 시집은 언제 가냐고 하시면서 말야..."
"검사 한다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셨겠네?"
송화는 두 손을 짝 마주쳤다.
"그래! 다른 부모들은 자식이 검사한다고 하면 어디 가서 으스대기도 하고 그럴 텐데 우리 엄마 아빠는 통 안 그래. 오히려 뭐라고까지 하는 줄 알아? 아무리 범죄자라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잡아다 감방 넣는 건 사람으로서 죄짓는 일이라고 한다니까. 날 보면 뭐라 그러냐면, 잘못을 저지르고 온 놈이 있어도 잘 타일러서 괜찮은 놈이면 안 잡으면 안 되냐고... 그렇게 순박한 분들이야."
"그렇게 좋은 분들 밑에서 이렇게 야박한 딸이 나올 수 있다니....아얏!"
야박하다는 단어가 송화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그녀는 내 팔뚝을 몇 번 투닥이고는 발걸음 속도를 올려 앞으로 쑤욱 나아갔다. 어느새 우리가 걷는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저한 무(無)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나보다 한 발자국만큼 앞서 나가 있던 송화는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야박하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앞으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가만 안 두면? 체포라도 하게?"
"그래. 널 체포해서.. 평생 내 곁에 두고 싶었어."
"그 이야기는 전에도 들었잖아."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화를 냈다. 그녀는 기뻐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 되겠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들고 있던 양산을 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양산을 치우자 하늘의 빛이 전부 온전히 나와 그녀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에 물드는 송화처럼, 내 몸도 빛에 물들기 시작한다. 착잡한 표정의 송화를 향해 물어보았다.
"지금은 안 되다니?"
"응. 지금 당장은 곤란하지 않을까 싶어."
송화는 턱짓으로 내 뒤를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누군가 있었다. 잔뜩 울상인 얼굴을 하고 내 옷자락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언제부터 나를 붙잡고 서 있었을까. 이 아이의 이름은 대체 뭘까. 처음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저 예쁜 얼굴이 어쩌자고 울상일까. 입을 맞추면 딱 좋은 저 고운 눈가에 어째서 눈물이 가득할까. 그러면서도 왜 내 손은 꼭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걸까. 등 뒤에서 송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가 널 잡고 있어. 그러니 어서 가봐."
다시 뒤를 돌아본다. 송화는 점점 빛에 물들어간다. 하얗게, 그리고 투명하게. 그녀의 모습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 가까스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송화야..."
"난 좋았어. 다 좋다고 생각해."
"송화야..."
"내가 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은 너에게 맡길게."
"송화야..."
그녀는 고개를 저였다.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 사라져 간다. 이제 송화는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늘 함께 있잖아."
빛이 세계에 가득하다. 하얗고... 따뜻한 빛이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찾아온다. 밝은 어둠이다. 그 어둠 속에 송화가 있고, 내가 있었다. 이제는 눈을 뜬다. 눈을 뜨면 빛이 찾아온다. 어두운 빛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있다.
".........저씨...아저씨.....아저씨....."
저 목소리가 누구 목소리인지, 잘 알고 있다. 조금 전까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었는데, 현실로 돌아온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다. 지금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 것 같다. 지금 날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문제는 환자의 의식이....."
가까운 듯 때론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 사이로, 그 소녀의 흐느낌은 내 귀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다. 더 먼 곳으로 갈 수도 있던 나였다. 그러나 날 부르는 이 목소리가, 날 붙잡고 있는 이 손이 나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아저씨.....아저씨....."
저렇게 부르는데, 대답을 해줘야겠다.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말문을 연다.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인마..."
"아저씨!!!"
귀 터지는 줄 알았다.
"유진아... 살살 말해도 다 ... 들리거든?"
"우와아아앙!!"
이런. 또 울려버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내게 다가와 각종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어지러이 바삐 움직이는 의료진 사이로 눈에 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유진이가 우리 엄마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유진이의 등을 두드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들은 마스크를 쓰고 가운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도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이 보였다. 박 회장과 하영, 효진이, 태근이 형, 리사와 마리....
날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으려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좀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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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가 엔딩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말씀이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