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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모처럼 혼자서 사무실에 갔다. 늘 함께 오던 유진이 없이 혼자 사무실에 도착한 날 보고 하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는요?"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유진이를 가끔 이렇게 불렀다. 아가씨라는, 굉장히 낯간지러운 호칭 말이다. 생각해보니 태근이 형은 그 집 고용인들에게 도련님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일이 좀 있어서.... 다시 또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하영의 눈이 커졌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자 하영은 보고 있던 서류를 탁 덮으며 내게 쏘아붙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를 혼자 보내야 할 정도로 중한 일인가요?"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그렇지 않다면... 뭐."
"무슨 대답이 그래요?"
하영은 가볍게 눈을 흘기고 평소처럼 수업을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나의 부족한 준비를 그녀가 질책하려는 순간,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그걸 받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고개를 계속 갸우뚱한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영이 다소 주저하면서 대답했다.
"전무님께 말씀 안 드린 일이 있는데..."
갑자기 불안해졌다. 하영이 리사 앞에서 내가 "최 전무"라고 선언한 이후, 날 전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냥 한석 씨라고 불렀다. 여태 안 쓰던 호칭을 갑자기 꺼내 든 그녀를 보니 불안해지는 건 당연했다.
"뭔데요. 말해봐요."
"백당에 대한 조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몇 명을 붙여놨었습니다. 그런데..."
"백당? 백당이 뭔데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지만 그게 뭔지 생각은 안 났다. 하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리사라는 여자가 있는 부산의 조직 말입니다. 거기 이름이 백당이라고 합니다."
"아... 거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했나 보군. 그래서 저렇게 낯부끄러운 호칭으로 날 부른 모양이다.
"그런데 거기 붙인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 전부 연락이 끊겼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는 모양입니다."
"연락이 끊겨요?"
"네. 나름 정예들인데..."
사람을 붙였다느니, 정예들이라니... 통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유진이가 혼자 있다는 것. 갑자기 유미가 죽기 전날 밤, 나와 유진이를 한 침대에 재우면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유진이를 혼자 두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 그게 유진이 곁을 떠나지 말라는 이야기 아니었나? 그저 말 그대로 혼자 두지 말라는 이야기였단 말인가?
차 키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영도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됐다고 했다. 하영의 표정을 보니 유진에 대해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전부터 궁금하던 거다.
"하영 씨.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뭐죠?"
"대체... 유진이에게 그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회장님 지시사항이라도 되나요?"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든 클라이언트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거짓말쟁이를 보았나!!!
"그 클라이언트에 저는 포함되지 않나 보죠?"
"처음에 저를 만났을 때는 공짜 클라이언트였고, 지금은 클라이언트라기보단 상관 아닌가요? 그러니 제가 친절히 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클라이언트가 아니니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녀의 논리는 훌륭했지만, 그렇다고 클라이언트가 아닌 상관에게 이런 식으로 막 대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또 다른 논거로 반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와 말을 길게 섞다가는 또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기에 그저 싫은 표정을 조금 짓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아가씨가 박 회장님과 어떻게든 관계가 있을 거라는 거... 그건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회장님은 어떤 지시도 따로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인... 경험이라뇨?"
"저는 아주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언니와 오빠 손에 키워졌어요. 늦둥이라서 언니 오빠와 나이 차가 많았기에 그들이 제 부모나 마찬가지였죠. 그렇지만 전 그들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어요. 바로, 그때 광주에서요."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전혀 몰랐다. 그녀가 광주 사람이라는 걸.... 그녀의 말투라거나 어조에서 그쪽 지방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기도 했거니와 그녀의 배경에 대해 여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나 역시 전라도 사람이기는 하지만 광주와는 다소 떨어진 지역이고, 내가 살던 마을은 워낙 산속 깊은 곳에 있어서 "그때의 일"을 크게 체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전라도 사람이, 아니, 특히 광주 사람이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지 않고 "그때의 광주"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저 역시 그곳에 계속 있었을지도... 그러니 유진이에게 잘해주는 건, 그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특별히 회장님과는 관계없어요."
늘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는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시선을 반쯤 돌려 창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기에 나 역시 굳이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종류는 다르지만 그녀나 유진이나 일종의 참극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거기서 부모를 잃었다. 유진이를 보며 하영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공부는 당분간 안 해도 좋으니 어서 유진이에게 가보세요. 그 아이를... 혼자 두지 마세요."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사무실을 나섰다. 하영은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몸을 돌려 사무실로 다시 올라갔다. 노크도 잊은 채,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한석 씨?"
하영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소리 높여 펑펑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가에 눈물이 흘러넘쳐, 어쩔 수 없이 흘려야만 하는 그런 눈물이 뺨을 타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를 보며 당황해 했다. 당황하는 하영이라.... 거참. 대단한 걸 보게 되는구나.
"한 가지 잊은 게 있어서요. 그걸 말해주러 왔어요."
하영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흠칫 거리는 그녀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비행기에서 나올 때, 그리고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유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 아니, 유미뿐만 아니라 거기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 이름도 모를 그 사람들의 면면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꿈에 나올 지경이었죠.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그들이 못다 살다간 삶을 대신해서 사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게....무슨 소리예요? 난데없이...."
"하영 씨도,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는 말란 말이에요. 하영 씨는 지금도 이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너무 채찍질할 필요도, 모든 것을 이루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요. 다 잘하고 있어요."
"......흑!"
이런 곤란하다. 여태까지는 조용히 울고 있던 하영이었는데, 그녀는 이제 폭풍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세도 무너지려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안아주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댄 그녀는, 내 셔츠를 가득 적시면서 펑펑 울었다. 그녀의 뒷머리와 등을 쓸어내리며 진정하길 권했지만 쉬이 그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아픈 부분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안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함께 있은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피부로 느낄 정도로 그녀의 활동은 굉장했다. 변호사로서의 일은 물론이요, JS 그룹의 핵심적인 업무는 그녀가 다 처리하고 있었다. 내가 JS의 일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 가장 크게 놀란 건, 회장이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는 점과 대부분의 일은 하영의 선에서 처리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딱히 직급이 있거나 하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회장의 검토나 결재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룹의 직원들이 일감을 싸들고 하영을 찾아왔다. 그러면 그녀는 그것들을 거의 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조언할 부분과 처리해야 할 부분을 명확히 구분 지어 주곤 했다. 말이 쉽지, 그룹의 규모가 있다 보니 그녀에게 걸리는 일의 부하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녀가 그저 태근이 형이나 효진이의 뒤처리나 하고 있던 사람으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상상도 안 갈 업무량이었다.
그녀의 표면적인 직급은 팀장 대리였다. 근데 그녀가 소속된 17법무팀은 아예 팀장이 없다. 아주 예전에 유럽으로 연수를 갔다고 한다. 다들 그녀가 팀장은 물론이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직급을 받아도 문제가 없을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자신을 팀장 대리라고만 소개했다. 이쯤 되니 의문이 들었다. 큰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가 그룹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본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도 아닌 것에 왜 그리 열심일까.
그러나 오늘에서야 그 의문이 조금 풀렸다. 그건 바로 그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부채감 때문이었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고, 그 생환은 회장의 덕분이었다. 부모같이 여기던 언니 오빠는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런 생각이 그녀를 끊임없이 압박해온 모양이다. 요근래 유진이를 보며 거기에 자신을 비추어보던 하영이다. 사실 내가 한 말은 그다지 대단한 말도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억눌려 있던 감정이 제대로 터져나왔다.
"자자, 하영 씨... 진정하세요. 진정...."
거의 포옹과 다를 바 없는 자세로 계속 있기는 좀 그러했다. 하영도 그걸 깨달았는지 내게서 몸을 떼 내였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하자 그녀는 잠깐 흠칫했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내 손길을 그대로 두었다. 다 닦고 손수건을 갈무리하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둔탱이면서..."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 그 아이가 기다릴 거예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영은 원래의 그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또렷한 말투와 분명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잊어요. 조금 전의 제 모습. 그리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까지도."
그래서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흥."
가볍게 코웃음까지 치는 하영을 두고 돌아섰다. 사무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등 뒤에서 하영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그녀가 날 보며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빨리 가라는 거였어요."
"안 그래도 가고 있잖아요. 근데 왜요?"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숙이며 뇌까리듯이 말했다.
"빨리 가서, 빨리 돌아오라구요. 할 일이... 많으니까."
내가 해야 할 '공부'가 아직도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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