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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급히 고개를 돌려 하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이 무슨 문제냐는 투로 내 시선을 받아냈다.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전무라뇨? 제가 언제...."
그러자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회장님의 제안을 수락하신 때부터입니다. 부회장으로 할까도 싶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이사회에 보고된 것도 아니니 전무로 하시죠. 나이도 아직 어린데 대뜸 고위급 임원을 받는 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직급을 받게 될는지는 하영의 마음먹기에 달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에 "전무"는 그다지 고위급 임원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는 본인은 팀장도 아니고 팀장 대리로 있으면서, 전무가 높은 임원이 아니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그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나보다 더 놀란 이는 따로 있었다. 리사는 하영을 향해 말했다.
"어린 신부라뇨? 오빠가.... 결혼이라도 하셨단 말인가요?"
그러자 하영은 리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미성년자약취 및 유인죄를 범한 범죄자라고 해야 하니까요. 지금 전무님과 동거하고 있는 여성은 분명 미성년자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내보내지도 않고 꽁꽁 묶어두고 계시다고 하니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지는..."
나는 황급히 손을 휘저어 하영의 말을 끊고 리사를 쳐다보며 해명했다.
"허업... 이...이분이 법조계 분이라 표현이 좀 일반적이지가 않아. 유진이 이야기야. 전에도 봤지? 유진이 말야. 그리고 묶어두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감금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잖아요. 하영 씨. 걘 지금 아는 사람 만나러 간다고 지방에 내려갔다고요. 오해 하지 마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리사의 표정이 점점 침착해진다.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 아이군요. 오빠가 떠날 수 없다고 하셨던... 알았어요. 무슨 의미인지."
"리사야. 난 결코 범죄자가 아니라..."
"일 이야기를 하죠. 하영 씨 말대로 저흰 지금 일 이야기를 하러 만난 거니까요."
다시 한 번 싱긋 웃는 리사. 그러나 지금의 웃음은 아까와 사뭇 다른 것 같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쩐지 카페의 기온이 섭씨 10도 정도는 내려간 것 같다. 따뜻함을 보충하기 위해 일단 커피를 시켰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는 동안 리사에게 말세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슴은 아프지만, 유진의 친구이자 한때 내 학생이기도 했던 소란이의 비극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란의 자살 이후 해당 교회의 정보를 파헤치다가 만난 채송화 검사 이야기로 넘어가자 리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채송화... 검사요?"
"응. 이름이 좀 특이하지? 그 꽃 이름 채송화 맞아. 여기 있는 하영 씨의 사법연수원 동기거든. 그분은 말세교 내에 숨은 마약사범을 추적하던 분이라 말세교의 정보를 얻고 싶어 했어. 그렇지만 그들을 추적하던 중에... 크게 다쳐서 지금은 병원에 누워있어."
"어딜 다쳤는데요?"
"그게... 아무튼 좀 많이. 좀 오래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말야. 그래서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채 검사가 잡으려던 놈들, 그놈들을 다시 잡는 일을 리사에게 맡기고 싶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무거워진다.그녀의 비극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쉽게 말을 이어갈 수 없다. 하영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소강상태에 빠졌다. 점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그걸로 목을 축이면서 리사의 얼굴을 살핀다. 송화 이름이 나온 이후 그녀는 어쩐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리사는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오빠. 혹시... 그 채 검사님이 추적하던 마약사범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마약사범?"
"네. 약쟁이 말이에요."
말해도 될까 싶어 하영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알지 못하는 건가? 별수 없이 내가 송화와 있으면서 종종 들었던 이름을 꺼내놓았다.
"사람 이름은 아냐. 일종의 별명인 거 같은데... 채 검사는 자기가 잡으려는 상대를 바텐더라고 불렀어."
"바텐더!"
외침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나왔다. 리사의 뒤에 서 있던 예린이가 소리 지른 것이다. 리사는 그저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이다. 예린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리사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린과 리사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유명한 사람인가?
"바텐더요? 확실하나요?"
"응? 으응.... 채 검사는 그 교회에 잡입수사를 하면서 바텐더의 약에 중독되어 꽤 오래 고생했다고 하거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 검사가 잡으려던 바텐더라면...."
리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방금 꺼내놓은 이름은 뭔가 굉장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연에 모르긴 몰라도 리사와 예린이 이미 연관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이냐고요?"
리사는 반쯤 웃는 얼굴로 반문했다. 웃음은 아주 싸늘했다. 결코 호의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그녀가 평소 일상적으로 짓는 대외적인 좋은 얼굴, 그런 얼굴의 웃음도 아니었다. 대화의 맥락상 그녀의 화가 날 향한 게 아니란걸 알면서도 덩달아 나까지 무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서로 통성명은 한 적 있으니 모르지 않는 사이예요. 세상 참 좁군요. 그의 소식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되다니 말이죠."
리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계산기를 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손을 들자 예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자신의 옆얼굴을 리사 얼굴 바로 옆에 갖다 댄다. 리사는 예린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예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창으로 내다보니, 예린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무료로 해드리려다가, 저보다 어리고 아주 귀여운 아가씨랑 동거하고 계시다고 해서 다시 비싸게 받을까 했거든요? 근데 오빠가 잡아달라는 사람이 저도 잡아야 되는 사람이라니. 이거 돈을 받고 싶어도 못 받겠네요."
웃으면서도 가시 돋친 말을 던질 수 있는 리사의 능력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가슴이 온통 따끔거려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 리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짧게 얘기하면 이래요. 저희 조직에서 한때 바텐더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부산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거든요. 저희 조직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분이 그를 잡아 처리했다고 알려왔고, 그걸로 분란은 일단락되었어요. 근데 지금 그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렇다면 이 경우, 오빠와 그분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죠."
여기서 리사는 말을 끊고 날 한번 쳐다보았다. 조금 전의 독기나 분노는 사라진, 아주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녀의 말 중에서 "처리" 어쩌고 들은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한 "처리"는 아무래도 해당 인물을 더 이상 살아있게 두지 않는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발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리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하지만 전 오빠를 믿어요. 채 검사도 믿고요. 비록 채 검사와 저랑 사이도 좋지 않고, 지금 와보니 채 검사가 오빠도 홀린 것 같아 괘씸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은 동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호...홀리다니!!"
리사는 무심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듣는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황급히 큰 목소리로 외쳐보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사의 반문이 돌아올 따름이다.
"채 검사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데 수사상황이나 자신의 몸 상태를 쉽게 말할 것 같나요? 분명 오빠와 깊은 사이니까 그런 걸 말했겠지요. 제 짐작이 틀렸나요?"
"아...."
무심코 꺼낸 몇 마디 말에서 이미 모든 걸 눈치챈 리사다. 이쯤 되면 무섭다. 게다가 채 검사와도 원래 아는 사이라니. 리사와 송화. 서로 극단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아닌가.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리사는 최대한 빨리 조사를 마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바텐더와 원 목사.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응. 아마... 그 정도 일 거야."
"어떻게 처리하시길 원하나요?"
또다. 또 "처리"라는 말이 나왔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고 있자니 하영이 대신 대답했다.
"두 사람을 찾게 되거든, 혹은 잡게 되거든 저희에게 주십시오. 곧바로 채 검사에게 넘기겠습니다."
하영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한 채 검사는 지금 범인 체포를 수행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뭔가 반박하려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법의 심판에 맡기겠다, 이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저희가 하려는 일이 그다지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도 잘 아실 텐데요? 그리고 좀 거칠어서 반드시 살아있는 상태로 잡아온다는 보장은 할 수 없어요."
"저도 그렇게까지는 안 바랍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수단도, 상태도?"
"전혀 신경 안 씁니다."
두 여자의 대화가 너무 살벌해서 여기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사와 난 헤어지는 인사로 악수를 나누었다. 하영은 오늘의 계약을 문서로 남기고 싶어 했지만 리사가 고사했다.
"오빠와 저 사이면 구두계약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게다가 저희 같은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걸 문서로 남겨봐야 JS 그룹에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닐텐데요?"
"그렇겠군요."
하영은 쉽게 수긍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세교에 관한 자료를 리사에게 전달했다. 대부분 송화가 수사하면서 모은 것들이었다. 어떻게 그녀가 그걸 가지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리사 역시 그것을 받아 확인하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 볼 일이 모두 끝나자 리사 일행이 먼저 출발했다. 공터에 서서 그녀가 탄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 우리도 차에 올라탔다. 하영이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다가 날 돌아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그러죠?"
내가 묻자, 하영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대개 무표정하고 화난 인상의 그녀였지만, 요 며칠간 보며 알게 된 그녀의 버릇이다. 뭔가 생각나면, 이런 표정이다.
"회사 이름을..... 말했었나요? 전무님이?"
"아....니?"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난 그냥 회사에 들어갔다고만 했지만, JS 그룹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리사는 알고 있었다. 하영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저 여자도,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전무님을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 모양입니다."
뒷목이 뻐근했다. 박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날 지켜보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런데 리사까지....
"전무님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니 이용 가치는 충분히 있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것도 없겠습니다. 저쪽에 대한 조사를 허락하시죠."
하영의 말투는 흡사 맡겨 둔 허락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이에 굴하지 않았다.
"됐어요.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그냥 믿고 기다리자구요. 오늘만 해도 보안을 위해 직접 만나 이야기하려고 부산에서 여기까지 달려와 줬잖아요."
"그게 과연 보안을 위해서였을까요?"
"그게 아니면요?"
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습니다."
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산속 카페를 등 뒤로하고,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운은 깊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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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근황 알림
- 첫번째 엔딩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상 회차는 159회. 다음 루트를 어떤 걸로 할지는 마지막 회에서 댓글로 접수하겠습니다.
- 연재용량이 2,000 kb를 넘겼습니다. 길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나름 노력의 결과라고 봐주십시오.
- 리메이크 이전에 보신 분들이 진행이 답답하다는 청원이 있어서, 특정 루트에서 신 캐릭터 등장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 감상문은 여전히 접수중입니다만... 지원자가 별로 없습니다. ㅠ_ㅠ 상품도 드린다니까요. 왜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