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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47화 (14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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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품 안에 넣었다. 밥도 먹었겠다, 이제 더 만날 사람도 없다. 오랜만에 학교의 전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ROSE의 오픈 시간까지 아직 한참 남았다. 주변의 나무들의 풍광이나 하늘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제 완연히 가을로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9월의 캠퍼스는 나의 망중한을 그렇게 묵인해주었다. 서늘함이 가시고 슬슬 추워지려고 할 때에 전화기가 울렸다. 기다리던 유진의 전화였다. 무사히 도착했으며, 수녀원의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고 했다. 숙소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 적은 후에 잘 자라고 해주었다.

"오늘 집에서 혼자... 자는 거죠? 아저씨?"

"그럼 혼자 자지, 너도 없는데."

"정말이죠? 누구 다른 사람 없는 거죠?"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인지 거듭 확인하려 드는 유진에게 웃어주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유진이와 잡담을 나누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전혀 재미없는 이야기에도 유진은 웃었다. 그런 전화통화는 매일 밤마다 몇 시간씩 이어졌다.

일주일이 지났다.

지금 유진이는 수녀원에 매일같이 방문하며 수녀님들을 닦달하는 중이었다. 수련 중인 수녀지망생들을 결코 만나게 해주지 않으려는 지도수녀의 거절은 아주 완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고 살살 웃으면서, 때로는 울면서, 또 때로는 수녀원 일을 자진해서 도와가며 만나게 해 달라고 조르는 중인 유진이의 끈질김 중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유진이가 그런 거에 바쁜 만큼, 나 역시 그랬다. 밤에는 ROSE에 가고, 낮에는 하영을 만나느라 정신없는 시간이 흘렀다. 저녁이야 ROSE에서 대충 챙겨 먹는다고는 하지만, 늦게 일어나서 허둥지둥 나가느라 아침은 먹을 시간도 없고, 점심은 하영의 사무실에서 빵 종류로 때우기 일쑤다. 그녀의 사무실에 책상을 두고 앉아 회사에 관한 제반 사항 등을 전달받아 배우고 있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최소한의 정도"가 무슨 대학교 한 학기 분 전공 커리큘럼 뺨친다.

짬이 조금이라도 나면 말세교에 대한 정보라도 알아볼까 싶었는데, 혹독한 교관인 하영은 그런 농땡이를 전혀 용납치 않았다. 그녀가 말하길 내가 회장님의 발꿈치의 때만큼이라도 하려면 아직도 알아야 할 게 산더미라고 했다.

"산이라고요? 지금 산을 올라가라는 건가요? 얼마나 높은 산입니까, 그건 대체."

산더미 같은 자료와 끝없는 주입식 학습에 지친 내가 푸념하자 하영은 자신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답했다.

"누가 산을 올라가라고 했던가요? 삽으로 떠서 산을 옮기는 정도의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끄으으으윽...."

농담이 안 통하는 사람이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의 공부량이 어떤 건지 실감이 난다. 이건 도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그저 그런 공대생일 뿐이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람. 지금이라도 JS 그룹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송화의 경과는 어떤지 넌지시 물어보려고 하면

"휴식시간을 너무 많이 드린 모양이군요."

라며 대번에 다시 수업을 시작한다. 내가 대학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우등생이었는데, 하영의 강의는 그 어떤 교수보다도 엄하고 모질었다. 게다가 학생이라고는 나 한 사람뿐. 조는 건 고사하고 다른 생각만 해도 대번에 눈치채고 다그치지 아주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패닉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날 구원하는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오빠! 여기 천마산 휴게소 근처인데, 나오실 수 있죠?"

리사였다. 반갑기는 하지만 좀 뜬금없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호출이라니. 평소 사근사근하는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천마산?"

"남양주 근처예요."

"남양주라고?"

고개를 들어 하영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벽에 걸린 여러 판 중에서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의 지도가 상세하게 표시된 커다란 지도가 나타났다. 하영은 그중에서 천마산을 찾아서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있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좀 갑작스럽지만... 이리로 와주시면 좋겠어요."

행동에 있어 늘 이유가 있던 그녀다. 아무 이유 없이 그곳으로 오라고 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영이 날 쳐다보았다.

"직접 가시게요?"

"네. 제가 부탁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잖아요. 제가 가서 만나봐야죠."

하영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까지 공부하던 자료를 쳐다본다. 그 시선이 뭘 말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애써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제가 이런 공부를 꼭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일단 제게 중요한 일은 송화의 원수를 갚는 일이라서 그래요. 맞은 뺨을 돌려주지 않으면 밤에 잠이 안 오는 더러운 성격이라 그렇죠."

하영은 한숨을 쉬며 문 쪽을 향해 먼저 몸을 돌렸다.

"잠이 안 오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가시죠."

하영이 모는 차에 올라타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서울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려가자 한적한 국도가 나타나고 산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산을 조금 오르자 마른 계곡이 나타났고, 그 상류에는 작은 보가 하나 있었다. 도로를 끼고 보를 돌아들어 가자 물 건너편에 특이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저기입니다."

하영이 가리킨 곳을 올려다보았다. 저수지 가장자리에 있는 언덕, 그 위에 자리한 나무로 된 건물이 보였다. 그림 엽서에 나올 것 같은 외관을 한, 아주 깜찍한 카페였다. 딱 보자마자 리사가 고를만한 가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로 좀 더 올라가니 너른 공터가 있었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모양인데, 이미 다른 차가 먼저 와 있었다. 눈에 익은 검은 차였다.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하영과 함께 나란히 카페로 향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며 방문객의 입장을 알렸다. 바 너머에 있는 검은 옷의 바리스타 한 명과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 카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오빠, 여기예요."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리사가 이쪽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가득한, 여성미 물씬 넘치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리사였다. 환한 얼굴로 웃는 그녀의 뒤에는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둘 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여자는 예린이었고, 남자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더 큰 듯한데, 덩치가 내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둘 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예린은 내 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어? 부산에서 출발할 때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어."

리사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요새 사정이 좀 그래서요. 행선지를 함부로 알리고 다니지 않아요. 이곳을 정한 것도 불과 한 시간 전이에요. 즉흥적으로 여길 정하자마자 오빠에게 연락한 거랍니다."

"그렇구나..."

행선지를 함부로 알리지 않는다? 뭔가 좀 묘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누가 뒤를 밟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필 왜 여기야?"

"음... 일단은 예쁘잖아요?"

리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밖을 본다. 창밖으로는 우거진 숲과 저수지가 잘 조화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올라온 도로가 저 멀리 아주 잘 보였다. 이런 깊은 산 중턱에 카페가 있으리라 생각도 못 했다.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네."

"것도 그렇고, 시내에서는 미행이나 습격의 위험이 있어서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교외에서 뵙자고 한 거예요. 여기라면 누가 따라붙더라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위치니까요."

"미행? 습....격?"

난데없이 등장한 살벌한 단어에 깜짝 놀라 리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이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새삼 깊게 와 닿는다.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사정도 복잡한데 내 부탁 때문에 괜히 더 부담스러운 거 아니야?"

"전혀요.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결코 무리가 아니에요."

"보상을 제대로 해야겠구나. 요금은 충분히 지불할게."

"에이~ 그건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 거예요? 오빠 일이라면 언제든 무료서비스도 가능하답니다. 호호호."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리사를 보고 있노라니 살짝 죄책감마저 들었다. 마리 문제 때문에 그녀와 틀어져 버려서 그렇지, 만약 그녀와 조금 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난 아마도 그녀와 함께 있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사는 입을 가리며 웃다가 내 옆에 앉은 하영을 쳐다보았다.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이기에 얼른 소개해주었다.

"아, 소개할게. 여긴 내가 속한 회사의 법무지원을 받고 있는 손하영 팀장 대리야. 하영 씨? 이쪽은 제가 전에도 말한 김리사 양."

두 사람은 간단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명함이라도 주고받나 싶었는데 그러지는 않고 시선만 교환하고 있다. 무표정의 하영 만큼이나 웃는 얼굴의 리사는 표정을 읽어내기 쉽지 않았다. 나 역시 리사의 뒤에 있는 남자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마치 무정물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그였기에 괜스레 물어보기 저어되었다. 예린은 평상시에도 과묵한 편이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예전에는 리사와 나란히 앉기도 하는 그녀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보디가드처럼 리사의 뒤를 지키고 앉아있다. 리사는 그들이 아예 있지도 않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신 줄은 몰랐는데요? 아직 졸업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일이 좀 그렇게 되었어. 어차피 학교는 괌에서 돌아온 이후 휴학했거든."

"어머나... 그러시구나..."

괌 이야기가 나오자 리사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졌다. 그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그러면서 부드럽기 그지없는 느낌이 내 손을 감싼다.

"식사는 잘하고 계신 거죠? 저는 늘 그게 걱정돼요. 항상 밖에서 사 먹고 계시니 영양도 불균형할 테고..."

갑작스럽게 잡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손을 빼내기도 무엇했다.

"밥은 뭐... 잘 먹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제가 좀 챙겨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

리사의 말을 칼같이 자르는 이가 있었다.

"이 자리는 소개팅이 아니라 업무협의를 위한 자리 아니었습니까? 사적인 이야기는 어지간히 하시죠. 그리고 최 전무님은 집에서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어린 신부가 있으니 영양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봅니다만."

깜짝 놀란 나와 리사의 말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최 전무?"

"어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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