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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44화 (14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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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한 번 삼켰다. 그녀에게 무슨 면목으로 전화를 걸겠냐만은, 그래도 이건 비즈니스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나야. 최한석."

"어머. 오빠. 전화주셨군요. 어쩐 일이세요?"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전화를 받는 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과연 그녀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털어놓았던 그녀의 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박 회장이 언급한 그녀에 대한 사실. 그리고 장례식에서 보았던 그녀와 수행원들의 분위기.... 이것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전에 네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명함을 줬잖아. 그래서...."

"흐음. 어떤 일인데 그러시죠?"

하영 쪽을 한번 힐끔 쳐다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낸다.

"어떤 사람들을 찾고, 그리고 처리 좀 했으면 해."

"처리라.... 저희가 사용하는 말로 받아들여도 무방한 건가요?"

그녀가 말하는 "저희"는 아무래도 저쪽을 뜻하는 말일게다. 그들은 우릴 "일반인"이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다. 부산의 조직, 리사가 거기의 실권자고?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젠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말투는 예전 내 옆집에 살 때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지만 담겨있는 말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역시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음을 실감한다. 마른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래. 그런 의미야."

"음. 저희는 빠른 일 처리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단가가 높은데요.. 오빠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넉넉하신 건 아닐 텐데요."

"돈 문제?"

고개를 돌려 하영 쪽을 다시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그런 표정이었다. 전화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낮은 목소리로 리사에게 답했다.

"돈이라면, 전혀 걱정하지 말고."

리사는 보안의 문제가 있으니 전화보다는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했다. 내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자 그녀는 빠른 시간 안에 서울에 오겠다고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하영에게 도로 건넸지만 그녀는 그걸 받아들고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죠?"

"당신은........"

하영은 날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되려 묻는다.

"회장님의 제안을 수락하겠다는 건가요?"

"네. 뭐.. 그렇게 됐네요."

대충 대답하는 폼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하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 자리의 힘을 이용해서 제일 먼저 하겠다는 게... 송화가 잡으려던 놈들을 잡는 일이고?"

"네. 이미 들으신 대로... 당신이야 그리스도인인가 뭐시기여서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겠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불만입니까?"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품 안에 갈무리한 다음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녀는 좌우를 살피고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원래 사람이 그렇게 즉흥적이에요?"

"즉흥적이라뇨?"

"회장님의 일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수반하고 있는 건지 아까 제가 드린 설명과 회사규모를 보고도 감이 안 오나요? 송화가 잡으려던 놈들이 얼마나 흉악한 놈들인지 걔가 저렇게 누워있는 거 보고도 안 느껴져요? 그런데 그걸 오늘 반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다 결정해서 그대로 하겠다고요?"

그녀는 다소 흥분한 듯 보였다. 흥분한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건 몹시 좋지 않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까는 회장님 판단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건 회장님이고요! 당신이 회장님이에요?"

운전하면서 소리를 지르다니... 놀라게시리.

"......아니죠."

"나 원 참. 그때 폭행으로 빵에 가게끔 그냥 뒀어야 하나...이런 말도 안 되는 성격인 줄 알았으면..."

괜히 토 달아서 운전하는 사람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말도 안 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저 얌전히 앉아있었다. 계속 투덜거리는 하영은 그대로 차를 몰아갔다. 다행히 사고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네 집 앞에 도착했다. 내리기 전, 하영은 나에게 자신의 명함을 한 장 주었다. 법무법인 새암의 팀장 대리라는 직함이 박혀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직함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이제 알았다. 그런데 팀장도 아니고 왜 굳이 팀장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걸 들여다보고 있자니 하영이 말했다.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뭐든지 연락하세요."

"정말 뭐든지요?"

".....이상한 의미로 해석하지는 말아요. 말 그대로 업무적인..."

"누가 뭐랍니까?"

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날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아직은 회장님께 당신이 수락했음을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중요한 일은 좀 더 숙고한 다음 당신이 회장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지만 회사의 지원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공적인 일부터 개인적인 일까지, 제가 맡아서 준비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일까지도요?"

고개를 끄덕이는 하영을 보며 예전에 태근이 형이 하영을 불러 자신이 했던 일의 수습을 맡겼던 일이 떠올랐다. 효진은 하영을 운전기사로 쓰면서 이것이 일종의 계약관계라고도 했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박 회장 일가의 온갖 일을 맡아 처리하는 것이 하영의 역할인 듯했다. 내가 회장의 뒤를 잇겠다고 선언한 이상, 나 역시 그녀의 업무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 바로 출근해야 하나요?"

"당신 마음이에요. 어차피 회장님도 매일 출근하시는 건 아니니."

"아, 예."

차에서 내리자 하영은 곧바로 출발했다. 그녀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선뜻 옮겨지지 않는다.

박 회장의 제안.

혼수상태의 송화.

리사와 하영의 조력.

거기에 유진의 생부인 태근이 형의 이야기까지....

한 가지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일이 너무도 빨리, 한꺼번에 많이 일어나버렸다. 박 회장의 제안을 수락했다고는 하지만 잘 해낼 자신은 없다. 송화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잡겠다고 선언했지만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리사를 다시 볼 면목도 별로 없고, 저 까칠하기 그지없는 하영을 밑에 두고 부릴 생각을 하니 어째 부담스럽다. 그리고 태근이 형이라니.... 아아... 안 그래도 조만간 그에게 찾아가 ROSE를 도로 인수해와야 하는데, 당최 그를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 이전에 더 당면한 문제는 유진이다. 유진이 얼굴을 어떻게 보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트 앞 화단에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걸터앉은 화단 경계석이 차갑게 느껴질 때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차피 결론은 나지 않는다. 직접 맞닥뜨려야 할 시간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으로 가니 문이 열려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유진이의 목소리가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이제 들어올 생각이 들었어요?"

연분홍색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앞치마를 두른 유진이가 날 맞이했다. 따지듯 묻는 녀석을 향해 물어보았다.

"봐..봤어?"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 아파트 입구가 잘 보인다구요. 하영이라는 여자랑 차 타고 오더니, 헤어지고 나서도 거기 앉아서 대체 뭐 하고 있었어요?"

아마도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베란다에서 계속 밖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안. 오늘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거든."

집안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거의 시킨 음식만 두고 녀석과 식사를 하곤 했는데, 의외로 요리 솜씨도 있는 모양이다. 녀석은 내 겉옷을 받아 걸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아직 저녁 안 먹었죠? 만약 먹었다고 하면 난 굶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콱 깨물 거예요."

"....그럴때는 그냥 밥 먹자고만 해. 무섭다, 야."

"에헤헤."

배시시 웃는 녀석의 머리를 적당히 쓰다듬어 주고는 식탁에 앉았다. 유진이가 차린 저녁은 맛있고 정갈했다. 식사를 마치고 녹차를 한잔 하면서 녀석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부 들려주었다. 앞서 선영과 소란의 일을 녀석에게 숨겼다가 들었던 원망을 떠올리며 앞으로는 녀석에게 내 일을 숨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녀석의 생부 이야기는 뺐다. 그건 아무래도 못 말할 것 같다.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 유미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와 박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울적한 표정을 짓던 유진은, 점점 더 진행되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예의 그 고양이 눈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팟- 하고 날 째려보았다.

"....그래서 결론은 그 박 회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자리를 이어받고, 채 검사라는 사람이 잡으려던 나쁜 놈들을 잡겠다는 건가요?"

박 회장을 싫어하는 유진이다. 떡정유발녀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걸 고스란히 정면으로 어겨버린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진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또 그러기 위해서 사람과 돈을 구하려고 리사라는 여자랑 하영이라는 여자랑 알콩달콩 지내겠다고요?"

"앞부분은 맞는 말인데 어째 뒤로 갈수록 여자 쪽에 포커스가 맞춰지냐?"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틀렸어. 알콩달콩이 아니라 업무적으로 협조를 구하겠다는 거야. 게다가 채 검사가 잡으려는 놈들은 그때 네가 자료를 수집하던 말세교에 관련된 놈들이라고. 너도... 그놈들을 잡고 싶어 했잖아."

"그건 알아요. 그리고 아저씨가 결정한 일에 반대할 생각은 없어요. 그치만...."

"그치만 뭐."

녀석은 샐쭉한 표정으로 곁눈질하며 말했다.

".......내 남자의 곁에 다른 여자가 자꾸 엉겨붙는 게 싫다고요."

이제 겨우 열일곱인 녀석이, 내 남자 운운하며 질투심을 폭발시키는데 나무랄 수가 없다. 아아. 나도 확실히 중증이다. 이런 녀석의 표정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보이다니. 아니... 예전에는 이러면 그냥 귀여워만 보였는데, 이제 녀석과 나는 일정한 선을 넘었다. 여자로서 다시 태어난 유진이 보여주는 표정은 좀 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요염했다.

"읍...."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유진의 입술을 덮쳤다. 녹차의 쌉싸름한 맛 너머 부드럽기 짝이 없는 유진의 혀가 느껴졌다. 손을 뻗어 녀석의 허리를 감싼다. 가냘프고 한 팔에 쏙 안기는 몸이 내 몸에 와 닿는다. 기나긴 키스를 하는 동안 두 손은 자유롭게 녀석의 옷 안을 뛰놀았다.

"하아아.... 갑자기 왜...."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홍조 띤 얼굴로 유진이 물었다. 녀석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한 번 맞춰주고 대답했다.

"네 남자라며. 그렇다면 너는 내 여자라는 거겠지. 그걸 지금부터 서로 확인하는 게 어때?"

".....확인...?"

"응. 확인."

녀석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끄르기 시작한다. 유진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녀석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능숙해..."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싫어?"

"조금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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