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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41화 (14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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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자 박 회장은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춘희. 여기 커피 두 잔 주겠나?"

밖에 앉아있던 여인의 이름이 춘희인 모양이었다. 무척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니 그때는 다들 그렇지 싶었다. 잠시 후, 춘희가 커피 두 잔을 타서 갖다 주었다. 더 필요한 게 없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정석은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며 나가 있도록 했다. 춘희가 방을 나가고 커피 잔을 손에 든 박 회장이 내게 물었다.

"태근이에게 들었네. 유진이와 전국 일주를 하러 떠났다고 하던데?"

"전국 일주까지는 아니고, 산을 좀 탔습니다."

"그래? 나도 산 타는 걸 좋아하는데. 어디 어딜 다녀왔나?"

동해 쪽에서 시작해서 산맥을 타고 내려와 남쪽을 거쳐 지리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그에게 짧게 들려주었다. 사실 별거 아닌 이야기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꽤 주의 깊게 들었다. 산속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여행의 말미에는 염소농장에서 일까지 했다는 이야기에 그는 껄껄 웃었다.

"고생이 많았겠군. 자네나 유진이나."

"일부러... 택한 거니까요. 재미있었습니다. 유진이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가..."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가 대체 왜 나를 불렀나 몹시 궁금했지만 먼저 묻기는 좀 그랬다. 그래서 그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커피잔을 내려놓은 박 회장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둘이 했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면 뿜을 뻔했다. 다행히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기에 그런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의 질문일세. 아니, 질문이 더 있네. 유진이뿐만 아니라 미자와도 했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말야. 안 그런가?"

사실 난 말이다. 이 건물에 들어온 내내 그 규모와 위세, 그리고 박 회장이 주는 위압감에 살짝 쫄아있었다. 그러다 예상외로 무척 편하게 대해주는 박 회장의 태도에 긴장이 살짝 풀려 있었다. 등산 이야기나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리도 갑작스럽게 공격해 들어오니 정신이 없다. 방망이를 거꾸로 쥐고 타석에 들어섰는데, 자세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안쪽으로 꽉 차게 강속구가 날아든 것 같다. 이렇게 정직하게 스트라이크 존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오니 방망이를 휘두를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가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버하고 있자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반응을 보니, 이미 했군. 내 말이 맞지?"

"....그...그....그게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사람은 한때 유미와 결혼까지 했던 사람인데!! 게다가 유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 앞에서... 그런 사실을 인정하란 말인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는 대답을 미루고 있었지만, 그런 내 태도가 그에게는 이미 대답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역시, 미자가 말한 사람은 자네인가..."

그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신과 한때 결혼했던 여자와 그녀의 딸을 언급하면서, 그들과 잤냐고 묻는 사람에게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저 마른 침만 삼키고 있을 따름이다. 커피잔을 비운 박 회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그는 날 보더니 말했다.

"아? 내가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봐서 당황한 건가?"

"그...그렇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인가.

"아아, 미안하네. 미자와 있던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이야기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군."

"회장님이 미자...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진유미 씨를 말하는 게 맞습니까?"

"그래. 나중에는 유미라고 불러달라고 하더군. 하지만 날 처음 만났을 때의 이름은 미자였지. 그 이름으로 내 곁에 있었고, 나중에 떠나갔지."

그는 뭔가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이룬 것.. 내가 가진 것... 전부 그녀가 내게 준거나 마찬가지였어. 그렇지만 난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지. 그래서 그녀가 그런 짓을 한 것일지도..."

통 알 수 없는 소리였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는 뜸을 들이다가 날 쳐다보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여기서 일해볼 생각 없나?"

"일이요? 어떤...."

변호사로서 일하고 있는 하영을 떠올렸다. 난 그녀처럼 변호사도 아니고 심지어 대학도 다 마치지 않은 학생일 따름이다. 그런 나에게 일이라니. 대체 어떤 종류의 일을 맡기려는 걸까. ROSE에서도 알바 비슷하게 하면서 관리를 하긴 했지만, 그런 종류의 일이 여기서도 필요한 걸까. 그러나 박 회장이 꺼낸 이야기는 뜬금없다 못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뭐긴 뭐야. 내 일을, 내 자리를 물려받는 걸 말하는 걸세."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네엣?!"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박 회장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어르신, 아니, 회장님.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만..."

"평범?"

"네."

내 대답을 들은 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확신에 찬 동작이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미자, 아니, 유미의 능력. 자네는 알고 있었겠지. 안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유미의 남편이었던 그다.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

"그렇군. 말했군, 그래. 그럼 자네는 그녀의 말을 믿나?"

"처음에는 그냥 덕담 같은 걸로 생각했습니다. 직접 말했을 때도 설마설마했구요. 그러다 최근에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듣거나 보지 않은 일에 대해 말하거나 나중에 저희가 어디에 있을지 미리 안다거나.... 그러니 이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던가? 그녀가 왜 비행기 사고를 알고 있으면서도 피하지 않은 건지?"

"당연히 궁금합니다...."

그렇다. 유진이도 유미의 능력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박 회장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태껏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자네라면 말해도 괜찮겠지. 그녀의 능력에 관한, 그녀 자신의 아픈 기억이 하나 있네. 자신의 능력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죽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더군. 그걸 억지로 막았더니 도리어 아버지까지 참화에 말려들어서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해. 그래서 그녀는 그 후로 자신이 본 미래에 대해 거스르려고 하지 않는다네. 아니, 그 반대라고 해야겠지. 자신이 본대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려고 하지. 자신이 본 미래가 설령 인간의 도리를 어긋나는 행위라고 해도, 그녀는 그대로 따르고 행동한다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런 일이... 아...."

문득 유미가 나를 바에 데려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녀가 보았다는 미래를 덕담 같은 걸로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난 분명히 기억한다.

- 사람의 앞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겠어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지.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야말로 그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말이었다. 삶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뿐이라며 웃던 그녀. 그게... 그런 의미였나. 그런데 그게 몇 달 전이지?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그때의 기억이 상당히 아련했다. 박 회장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서 난 그녀를 불쌍히 여겼네. 그녀가 미래를 본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자체를 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 역시 처음에는 그녀의 능력이 부러웠고, 그걸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한밤중에 일어나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며, 혹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았다며 펑펑 울던 그녀였어..."

무서운 이야기였다. 난 여태 유미가 미래를 본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보이는 것이 있음에도 미리 말해주지 않는 게 싫기도 했다. 그러나 박 회장이 말하는 유미의 삶은 결코 그런 편리한 게 아니었다. 보아도 손댈 수 없는 미래.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을 향해 닥쳐온다. 결코 피할 수 없고, 피했다가는 더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걸... 그녀는 항상 보고 있었던 걸까.

"괌에서의 사고가 있기 전, 그녀는 날 몇 번 찾아왔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는 그녀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어. 그저 유진이를 걱정할 따름이었네. 그녀가 예전에 겪었던 일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여행을 막을 수도 없었네. 만약 그녀가 자신이 죽는 걸 보고 죽음을 피했다면, 그녀 주변 사람 중 누가 다치거나 죽게 될지는 모르게 되는 거니까. 확률은 낮지만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는 거라네."

"그렇다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괌 여행을 택한 건..."

"그래. 유미는 본 거야. 자신은 죽지만 유진이는 무사하다는 걸. 그걸 본 그녀는 그대로 행동했네. 그 이후의 일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유미.... 그... 바보 아줌마가...."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늘 유미가 철없고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면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거였다. 그 길의 끝에 구덩이, 아니, 구덩이 정도가 아니라 천 길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웃으면서 그 길을 걸었다.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딸이 그 사고에서 살아날 걸 알기에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네는, 그런 그녀가 자네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본 적이 있나?"

침을 삼키고, 애써 커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맛이 없었지만 그걸로라도 젖어드는 눈가를 가리려고 애썼다.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직접은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적 있습니다. 그녀가 본 제 미래는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미래라고..."

"휘둘려?"

"네. 좋은 사람을 만나게 좋게 될 거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쁘게 될 거라고 말이죠."

당연하기 짝이 없는 사실을 말하는 내 대답이 뭐 그리 우스운 걸까. 박 회장은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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