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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 아래 누워있는 날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서 소리쳤다.
"유진아! 유진아!"
잠시 후 달려온 간호사와 한 남자가 날 진정시켰다. 간호사는 외국인이고 영어로 뭔가 말했다. 진정하라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남자는 한국인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함께 온 아가씨는 옆 병실에 있습니다. 무사해요. 걱정마세요."
병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나 역시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잠이 오는 건지 기운이 빠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눈이 저절로 감겼다. 밀려오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생존자를 돌봐주기 위해 달려온 교민들과 영사관 직원들이었다. 그들에게 부탁해서 유진이 침대를 내 옆으로 옮겼다. 녀석의 외상은 거의 없었지만 기절 상태에서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우리를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비행기 탑승객 중 생존자는 별로 없었다. 눈을 감으면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과 유미의 마지막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거기서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이 날 끊임없이 짓눌렀다.
이틀 만에 유진이 눈을 떴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을 향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 유미는 도무지 그곳에서 빠져나올 상황이 되질 않았고 너는 기절해 있었다. 널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 유미를 포기했다. 그녀도 그걸 원했다. 유미의 능력에 힘입어 현장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구조되었다....라고 말이다.
유미의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다른 질문이나 요청을 하진 않았다. 녀석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푸른 하늘과 초록 평야가 펼쳐진 창밖만 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진아...."
"....."
"유진아...."
"....."
몇 번을 부르자 녀석은 겨우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유진이 날 보며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녀석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유진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봐..."
그러나 유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 했다. 의사는 우리에게 시간을 많이 할당하지 않았다. 유진이가 실어증에 걸리긴 했으나 몸은 거의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한 치료를 요구할 정도로 많이 다치지 않았고 나는 왼쪽 발목이 삐끗한 것을 제외하면 머리카락과 팔뚝 정도가 조금 그을린 게 다였다. 다친 사람은 많고 의사는 부족했다. 몇 안 되는 생존자의 대부분은 골절과 화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동체에 불이 붙고 폭발하기 전에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 남은 유미가 우릴 빨리 내보낸 덕분이다.
"아이고야. 이눔아! 니 에미를 놀래켜 죽일 셈이야!"
깨어난 지 이틀만인가, 사흘 만에 국제전화를 통해 엄마에게 안부를 전했다.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울먹이며 욕을 해대는 엄마에게 알았다고, 조심해서 귀국할 테니 걱정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미가 앉은 좌석은 원래 내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발견된 시신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어 당장 신분확인이 되질 않았다. 원래 좌석의 주인 이름인 최한석이 사망자 명단에 올라갔다. 내가 나중에 유미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녀의 시신을 인계받아 올 때까지 난 공식적인 사망자였다. 나중에 수정하여 3보인가 4보쯤에서는 최한석이 사망자 명단에서 빠지고 진미자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혼란하기 그지없는 그때의 상황은 사망자와 생존자 이름이 바뀌는 정도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난 또 다른 곳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게 말한다.
"저예요. 형."
"어쩐 일이야. 한석."
쾌활하게 전화를 받는 태근이 형에게 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한참 동안 망설였다.
"왜 그래? 지난번에 말한 벗고 노는 데 언제 쏘냐고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으하하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형은 여전히 활기찼지만 난 거기에 찬물을 끼얹어야만 한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변고....가 있어요."
"......뭐?"
당황한 그에게 여기는 괌이라고 이야기했다. 국내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듣자하니 연일 방송과 신문지상에서는 추락사고에 대한 기사가 반복해서 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 때이니 "괌"이라는 단어 하나에 그가 벼락같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너...너...누구랑 거기...간 거야? 넌...넌...괜찮은 거지?"
형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떨린다. 나와 유미의 관계에 대해 추궁하던 그다. 그런 그에게 유미의 사고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와 유진이는.... 살았어요. 그렇지만 유미는.... 그녀는....."
"으아아악!! 안 돼! 안 된다고!!!"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끊기기 직전 들려온 형의 목소리는 흡사 어미를 잃은 짐승의 외침 같았다. 무시무시하면서도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형의 휴대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고 이상한 메시지만 나온다. 별수 없이 그의 집으로 다시 걸었다. 그러자 한 아가씨가 전화를 받는다.
"네, 여보세요?"
"....저, 최한석이라고 합니다만..."
"방금 도련님과 통화하신 분인가요?"
......도련님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답했다. 아마도 형을 지칭하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귀에 익다. 그녀가 말했다.
"방금 휴대폰을 집어 던져 버리셔서 깨먹은 모양입니다. 날뛰고 계셔서 고용인들이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흉포하게 날뛰는 형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한숨을 내쉬고 이곳 괌 메모리얼 병원의 전화번호와 우리 병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전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병실에 돌아가니 약 30분 정도 후에 간호사 한 명이 오더니 날 불렀다. 너스 스테이션으로 가서 수화기를 받아든다. 형이었다.
"유진이나... 넌 무사하냐?"
여전히 울먹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적적이라고... 하더군요. 유진이는 타박상 정도만 입었구요, 전 다리를 조금 접질린 정도에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뭐...."
"미자 누나는....?"
"어제 오후에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지금은... 영안실에 있어요."
다시 한 번 오열하는 형 때문에 대화가 잠시 끊겼다. 가까스로 자기 자신을 추스른 형은 자신이 동원 가능한 가장 빠른 수단을 준비할 테니 그걸 통해 빨리 귀국하라고 했다. 천혜의 자연과 맑은 날씨가 몹시도 아름다운 괌이었지만, 한시 빨리 이곳을 떠나고픈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국에서 또 다른 유가족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 터였다. 좀 더 기다리면 유해를 옮길 수 있도록 수송기 편이 마련된다고 하였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는 물론, 탑승은 확인이 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사례도 많아 유족들 간에 이견이 많았다. 시신인도서를 이미 발급받은 나와 유진으로서는 이동편만 확보되면 바로 떠날 수 있었다. 병실로 돌아와 유진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태근이 형과 통화를 했어. 형이 우리가 귀국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준대."
그러자 유진이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녀석의 눈매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태근이 형은..... 원래 너희 어머니와 알던 사이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형에게 전화를 걸기 전까지 꽤 많은 고민을 해보았다. 유미가 없으니 이제 천애고아가 된 유진이다. 물론 그녀가 남긴 재산이 상당하기에 유진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있진 않을 테다. 그러나 어른의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될 녀석을 생각하니 딱하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원래 녀석의 친부임에 분명한 태근이 형의 아버지, 즉 박회장이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게 아니라는 걸, 그걸 말해주고 싶었다. 네게는 아버지도 있고 오빠와 언니도 있다.....그렇지만 유미가 유진에게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걸 내가 나서서 말해야 하나 생각하니, 또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단은 태근이 형에 대해서만 녀석에게 언급해 두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 네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했어. 내가 확인했으니 굳이 네가 따로 하지 않아도 돼."
날 빤히 보던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원 앞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혼잡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거기서 조금만 더 시야를 넓히면 아주 잘 뻗은 기나긴 도로와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태풍이 왔었냐는 듯 맑게 갠 하늘은 눈이 시릴만큼 파랬으며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일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아름답다. 그래, 정말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속에 사그라들어간 생명들을 생각해보면 더욱 미칠 듯이 아름답다. 내가 유진과 나란히 앉아 그 자연경관을 보고 있노라니 유진이가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꼭 잡은 그 손의 온도가 천 마디 말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가만히 잡아주었고 곧이어 녀석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도, 잠이 들어서도 그 손을 놓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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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언급한 문서 링크는 작품 설정에 올려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