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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26화 (12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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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입에 있는 걸 삼켰다. 그렇지 않으면 뿜을 뻔했다. 사레 걸린 목을 물로 진정시키고 녀석에게 항의한다.

"저기, 말이야. 제발 그런 류의 질문을 할 때는 가급적 예고를 하고 하든가 하지 않겠니?"

날 빤히 쳐다보던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고개를 숙여 그릇을 본다.

"싫어하는군요."

"아, 아니. 그렇게 단정부터 짓지는 말고... 애초에 나한테 애인이 어디 있어?"

제일 먼저 송화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녀와 나는 뭐랄까. 애인이라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에도 너무 접점이 이상했다.

"항상 애인 만나러 갈 때는 핸드폰 꺼놨잖아요. 안 그랬어요?"

"공부할 때도 끄긴 했는데?"

"그 차이를 제가 몰랐을 것 같아요?"

녀석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 메인디쉬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녀석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테이블 한쪽에 있는 물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아저씨 좋아하는 거 알죠?"

다행히 지금은 입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아아.. 뭔가 좀 맥이 빠진다. 대답 소리가 너무 시큰둥하지는 않았을까 족히 염려된다. 아니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인다거나. 어쩌면 귀찮아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추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고 자기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난요, 자라면서 언니들한테나 엄마한테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남자를 만나면 어떻게 해라, 남자들은 뭐 이런 거 저런 거 좋아한다 어쩐다 하는.... 그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한 건지 아니면 정말 조언을 하려고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은 다 하고 있어요. 개중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었기에 처음에는 참 혼란스러웠어요."

"어떤 게 앞뒤가 안 맞는데?"

"예를 들어, 어떤 언니는 저한테 그래요. 남자한테 너무 잘해주면 안 된다고. 그러면 자신한테서 너무 미련없이 떠나버린다고 말이죠. 근데 또 어떤 언니는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남자한테는 정말 잘해줘야 한다고. 자신한테 소홀하다는 걸 남자가 눈치채면 그대로 떠나버릴 거라고. 그런 식이에요."

녀석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례에 대해 말했다. 주로 그쪽 업계의 여인들이 해준 이야기라 육체적인 이야기도 다소 있었고 비정하고 정떨어지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또 그만큼 정에 굶주린 그들인지라 그것을 애틋하게 여기는 이야기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항상 듣고 자라 온 유진은 그 이야기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차라리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까먹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지금 듣는 게, 아 그렇구나 하겠지만... 분명히 난 이 사람에게 A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죠. 어느 날 이 사람은 저한테 와서 Z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런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서 전 기본적으로 사람을,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녀석의 사진 같은 기억력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도 들어 알고 있었다. 영민한 판단력을 가진 녀석이지만 그런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은 때론 사고 형성에 도움이 되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툭툭, 혹은 그 상황상황마다 내뱉는 말도 이 녀석에 와서는 그게 하나의 기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자신의 판단기준에 삽입된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훗날 그 사람이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나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게 고스란히 그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작용한다.

"근데 아저씨는 좀 특이해요."

"내가?"

"예."

녀석이 보기에 나는 너무 어리숙하다고 했다. 듣기에 썩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말이다. 딴에는 뭔가 열심히 감추려고 애쓰는데 그게 자기 눈에는 훤히 보이니 유진이로서는 기도 안 찼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나중에는 어찌 나오려나 한번 두고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기에 좋아했고... 또 그만큼 실망도 했었어요."

"그래서... 선영이 문제나 소란이 일에 그렇게 화냈던 거야?"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날 탓한 이유는 단지 그 일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내가 말해주지 않은 것, 그것이 유진이를 화나게 한 첫 번째 이유다. 지금 녀석이 말하는 폼을 봐서는 만약 내가 선영이를 그렇게 만나 과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어도, 혹은 소란이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유진에게 말만 했어도... 녀석은 받아들였을 것 같다. 물론 손등이나 기타 어딘가는 한 번씩 물어뜯었겠지만....

"그러니 말해봐요. 지금 만나는 그 사람... 정말 애인 아니에요?"

추궁 아닌 추궁에.. 할 말이 없어진다. 한참을 망설인다. 아무리 이런 어른스러운 말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결국 애는 애인데 녀석에게 이런 육체적인 관계에 대해서 털어놓아도 될까 주저된다. 송화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얼마 전 태근이 형이 그런 식으로 놀릴 때도 얼버무리고 말았을 정도다. 그녀는 나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공언을 했지만 나는 아직도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난 "애인과 잘 되어가느냐"는 유진의 대답에 선뜻 답을 못 하고 있었다.

식사가 나오고 서로 자기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도 녀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재촉도 무엇도 하지 않고 잠자코 햄버그만 썰어서 먹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나는 잠시 후,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넌, 섹스가 사랑과 상관있다고 생각하니?"

으아.......말을 꺼내놓고도 민망해서 죽을 것 같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누군가가 나에게 삿대질하며 물어본다. 이봐. 지금 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녀석은 올해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라고. 그런 녀석에게 대체 뭘 물어보는 거야! 그러나 유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날 보더니 되물었다.

"그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녀석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면... 나도 어른으로서 실격인 걸까. 반론을 제시해본다.

"사랑 없는 관계도 있잖아. 말 그대로 관계 뿐인."

그러자 녀석은 포크를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

"남녀 사이에서 육체 관계만 있는 사이는 없어요. 최소한 한쪽은 그렇게 생각할 순 있어도, 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관계는 없는 거예요."

유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날 좋아한다고 말한 송화는 이 관계를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정서적인 교류 없이 그저 육체 뿐인 관계라고 생각했던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유진이 지적한 부분은 나와 송화 사이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저는 모르겠지만 많은 언니들이 그러더군요. 두 사람이 결합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을 속인대요. 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니까 이걸 하는 거다. 그래야 자기 몸이 반응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여자의 몸은 열리지 않아요. 남자는 넣으면 끝나지만 여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거잖아요."

여자의 느낌은 나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녀석의 설명을 잠자코 듣는다.

"근데 말이죠.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찡한 기분이 한동안 오래가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좋은 음악을 들으면 노래가 끝나도 한동안 흥얼거리기도 하고. 전 한석규 영화 볼 때면 처음에는 내용 아느라고 한 번 보고, 그다음에는 석규 아저씨의 연기를 유심히 보면서 또 봐요. 그러면 그 움직임이 머릿속에 한참 오래 남죠. 그렇게 사람의 느낌이라는 건요, 잔상이 남아요. 그 잔상이 누적되고 계속 쌓이다 보면... 그건 결국 자기 느낌이 돼요. 자기가 그렇게 느끼는 느낌인 줄 안다고요."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리고 나보다도 나이가 훨씬 어린 녀석의 말이었지만... 녀석의 이야기하나하나 나에게 날아와 비수처럼 꽂히고 있다. 이제서야 생각난다. 내가 지혜를 대하면서 그러했고, 선영을 대하면서 그랬듯이... 송화도 그랬던 걸까. 거듭되는 몸의 접합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감정이 싹트고 그 감정이 자신의 것이라고 온전히 느끼게 되었던 걸까. 그랬던 걸까. 아득해지는 기분 사이에서 마리의 얼굴, 송화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누구보다 부끄럼쟁이였던 그녀들은 나에게 대체 무엇을 원했고, 또 얻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걸까. 그렇게 애잔한 기분에 빠져있는데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가리켜서 떡정이라고 하더군요."

"푸합..."

차분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이어가던 녀석의 이야기는 난데없는 등장한 전문용어에 기어코 뿜고 말았다. 간신히 식탁을 수습한 후, 녀석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송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해 주었다. 혼란 와중에 스치듯 보았던 첫 번째 만남. 그리고 커피숍 화장실에서의 급작스러운 두 번째 만남부터, 그리고 나중에 불려가 듣게 된 그녀의 특수한 상황까지..... 물론 약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고 그녀의 체질 때문이라고 둘러대었다.

"그걸 돕기 위해... 난 그저 몸만 그녀와 함께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달랐던 모양이야. 지난번 마지막으로 볼 때는... 다음에 볼 때까지 대답을 준비해달라고 했어. 날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며...."

기분이 묘했다. 아직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나보다 어린 여자애한테... 그것도 날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여자애에게 말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고 이런 조언도 해주었다.

"결국 아저씨는 선택하게 될 거예요. 그 선택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어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녀석은 내 팔을 붙들었다. 아까까지는 바로 옆에서만 걸을 뿐 이런 식으로 매달리지는 않았는데 의외였다. 놀라서 돌아보니 녀석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준 보답으로 팔짱 껴줄게요."

"아, 예."

내가 이렇게 시큰둥하게 답하자 녀석이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쿡쿡거리며 웃다가 다시 날 사~알짝 올려다본다. 조금 불안했다. 이런 표정, 이런 눈웃음에서 이런 입가 모양. 어째 누군가에게서 많이 보던 표정인데.... 유진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려진다. 그리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관리 좀 해야겠다 싶어서 말이죠. 어때요, 제가 아저씨 말고 오빠라고 불러주면 그 여자한테 안 가고 저한테 올래요?"

"뭐?"

어째 말투가 살살 간지러운 게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나쁜 의미로가 아니라... 전에도 한번 느껴본 적이 있는... 녀석의 색기와 교태가 말끝에서 듬뿍 묻어 나온다. 녀석이 볼따구를 내 팔뚝에 비비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놀래, 오빠~"

으악!! .... 진짜.... 남자라는 동물은... 여자의 목소리 만으로도, 이런 사소한 행동 만으로도 흥분하고 발기할 수 있는 거구나.... 하아.... 바로 그 순간, 유진이는 붙들고 있던 내 팔을 놓고 앞으로 몇 발자국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더니 혀를 쑥 내민다.

"아, 역시 안 되겠다. 아저씨는 그냥 아저씨야."

......좋다 말았네.

그렇게 그 날 하루는 통으로 녀석에게 붙들려 쇼핑으로 소일하게 되었고 저녁에 ROSE에 출근도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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