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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 그 이름은 다른 곳에서 많이 본 유미의 본명이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어 고개를 홱 돌려보았다. 유미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걸어오더니 이내 나와 태근이 형 사이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맥주병을 들어 태근이 형의 손에 들린 잔에 가만히 채워준다.
"정말 오랜만이네. 많이 변했구나, 너."
정말 사근사근하고 친근한 유미의 말투에서, 그녀와 태근이 형이 보통 사이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형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표정으로 유미를 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미자 누나는..... 누나는..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대로...."
"후후. 얘는. 안 변 했기는. 널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십오 년 전 인데 충분히 변했지."
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찌나 세게 흔드는지 저러다 비듬 떨어지겠다.
"아뇨. 나.. 진짜 딱 한 눈에 누나인 줄 알아봤어요. 어쩌면 그렇게도...."
"왜, 아직도 이쁘다고?"
"네. 정말 예뻐요."
"후후후. 고마워."
태근이 형과 유미가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능글맞고 말 잘하던 태근이 형이 무슨 선생님 앞에 선 국민학교 1학년 신입생 마냥 쩔쩔매는 것도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유미야 평소에 다른 사람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지만 군기가 바짝 든 형은 유미가 무슨 이야기만 해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다 맞다고 하고 있었다. 유미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말하면 형은 세상 모든 나침반을 고장내서 동쪽을 서쪽이라고 우길 태세다.
기분이 좀 묘했다.
유미와 나는 그 한 번의 관계 이후 줄곧 말을 놓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형에게 나이 차이에 따른 존대를 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런 형이 유미에게 다시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다. 흔히 빠른 년생 친구를 둔 동기나 재수생의 친구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꼬인 족보가 여기서는 대체 몇 년의 간극을 두고 펼쳐지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요."
손을 들고 두 사람의 대화에 조심스레 끼어들어 본다. 서로만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주지 않겠어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너...너도 있었냐?"
형은 그제야 날 발견한 사람처럼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이 사람아. 난 아까부터 여기 들어와 있었고 여태까지 당신이 계속해서 놀려 먹고 있었잖아! 대체 유미가 형에게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길래 그녀가 나타난 순간 이후부터는 거기에만 신경을 쏟고 있는 게야. 주변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라니.
"음... 뭐라고 해야 되나. 좀 복잡한데... 태근아. 내가 이야기해도 되지?"
"아, 네. 누나. 그렇게 하세요."
유미는 자기 앞에 잔을 하나 끌어다 놓고 맥주를 채웠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말이야. 내가 잠깐 앞집 사는 남자랑 결혼했었거든. 그 남자는 애가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어. 그때 그 두 아이 중에 하나가 바로 쟤야. 태근이."
여상스러운 말투,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태근이 형을 가리키는 유미를 보며 난 경악하고 만다.
"겨...결혼? 유미가?"
그러자 유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평생 결혼 한 번 안 해본 줄 알았어? 안 그러면 유진이가 대체 어디서 생겼겠어?"
어...그게... 물론 결혼한 사이에 아이를 두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나 같이 아버지 없이 자란 사람이 더 비정상이지. 그러니 유진이에게도 원래는 아버지가 있었다는 게 당연하다. 유진이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는 건 유미에게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당연한 일을 나는 왜 혼란스럽게 느끼고 있을까.
말이 되니 더 어처구니없는 이 현상을, 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입을 딱 벌린 내가 다물지 못한 채 그러고 있으니 이번에는 태근이 형이 조심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효진이와 난 어머니가 달라. 두 분 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내가 우리 아버지 첫 번째 부인에서 나온 자식이고 효진이는 두 번째 부인에서 나온 자식이지. 그리고 여기 미자 누나가 우리 아버지의 세번째 부인이었어. 우리 집에 한 2년 정도 머물다가 금방 나가버리셨지만...."
형은 내게 설명하면서도 몹시 애틋한 눈빛으로 유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자라는 이름, 내가 분명히 본 적 있다. 그녀가 내게 종종 맡기는 ROSE의 통장에서 말이다. 그리고 아까 본 사업자등록증에는 내 이름과 나란히 "진미자"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 그게 유미의 본명이었다. 난 그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형은 계속 그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효진이가... 유진이 언니였단 말이야? 유진이가... 태근이 형 동생이라고?"
충격에 휩싸인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세 사람을 나란히 두고 본 적이 몇 번은 있지만 그들이 서로 닮았다고 생각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기 학교 선배와 자기의 친구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의 오빠, 언니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현실은 날 배반하고 말도 안 되는 소설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아노미에 빠져있는 내 상태는 아랑곳 하지 않고 태근이 형은 그저 다시 만난 유미가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왜 연락 한 번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효진이도 누나를 보면 반가워할 거예요."
형의 어조에는 살짝 원망까지 섞여 있었다. 저정도 덩치를 가진 남자가 저런 말투를 내뱉으니 무섭기까지 하다. 나는 끄응...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미가 그녀 특유의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아버지와의 약속이었으니까 말이야. 유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너를 만나지 않는 게 그의 조건이었어. 그러니 너도 오늘 날 만난 걸 박 회장에게 이야기하면 안 돼."
형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왜요?"
"그런 게 있단다. 그치만 나도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말이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변덕이 생기더라고. 한 번 보고 싶어졌지. 그래서 보러 왔어."
그녀는 여전히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 중에서 난 무언가 감지하고 말았다. 아까 날 ROSE의 공동 사장으로 만들어주면서 했던 이야기나 지금 그녀가 한 이야기는 하나같이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날 바에 나란히 앉아 이렇게 말았다. 곧 죽을 사람이다. 자신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만다. 그러나 형은 이런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때 누나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유진이군요. 누나가 그런 상태로 이혼하고 나가버려서 효진이가 정말 많이 울면서 찾았었어요."
"후후. 넌 안 찾았고?"
"당연히 저도 찾았지요. 그치만 울지는 않았어요."
대화만 듣고 있자면.... 십수 년의 시간을 뒤로 돌려 어린 태근이 형과 스무 살 정도의 앳된 유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유미는 형이 기특하다며 술을 따라주었고 형은 단숨에 마셔버렸다. 유미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너랑 이렇게 술을 마시게 되다니. 너나 나나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그때는 누나가 우유를 따라주곤 했죠. 정말 맛있었어요. 다른 누가 따라주는 것보다도 더."
"후후후. 어차피 슈퍼에서 사오는 우유가 뭔 차이가 있을라고. 너무 오바가 심한데?"
"아뇨. 진짜라니까요."
아아. 정말이지 못 봐주겠다. 진짜 꼬리만 달려있다면 형은 그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 기세였고 유미는 마치 능숙한 조련사처럼 강아지.... 아니, 형을 다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17년 전의 주제로 대화를 계속 하고 있었다. 17년 전은 고사하고 17개월 전의 유미도 모르는 나로서는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은, 그런 대화였다. 원래 다소 능글맞은 표정이었던 형은 모처럼 얼굴이 활짝 개어 있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눈에 아주 잘 보였다. 자신의 옛 남편과 효진이에 대한 안부를 묻던 유미는 형의 시시콜콜한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럼 둘이서 재미있게 놀아. 이제 늙은 사람은 빠져주고 젊은 애들로 좀 넣어줄게."
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형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유미가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본다. 형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늙은 사람이라뇨. 그냥 저랑 이야기 좀 더 해요, 누나.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그러자 유미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형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은 형의 얼굴을 타고 스르륵 내려와 형의 턱을 살짝 긁는다.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강아지를 다루는 주인같아 보였다.
"착하지?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잖아. 잠깐 얼굴만 보려고 했다고."
"그래도...."
어린 태근이 형.... 아, 진짜 이런 표현 밖에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형의 표정은 울상 그 자체였다. 형은 유미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태근아."
유미의 목소리가 ... 뭔가 좀 달랐다.
"넌 내 말 잘 들어주었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럴 거야. 그러니 이제 안녕하자. 만나서 반가웠어."
유미를 올려다보는 형의 눈빛. 그건 마치 연인과 헤어지려는 사람의 눈빛이나 진배없었다. 순간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왜 이러지, 내가? 유미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형의 저런 모습을 보고 내가 왜 울컥하는 거지?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던 애를 써야 했다. 쉽지 않았다. 형은 유미의 시선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잡은 손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손을 놓았다.
"아...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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