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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15화 (11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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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여기 이름이 ROSE라는 건 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장미라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입구에서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걸으면서 형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예전 우리 집에 있던 분이 있었어. 나랑 효진이를 무척 아껴주셨던 분인데... 동네 길가에 장미꽃이 피면 내가 제일 먼저 찾아서 그걸 꺾어다가 그분한테 갖다 드리고 그랬지. 그러다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있던 분?"

표현이 독특했다. 형을 돌아보자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아버지가 결혼 여러 번 했다고 했잖아. 전부인 말이야."

"아아. 그랬나요."

"내가 얘기 안 했었냐?"

"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여러 번 결혼이라니. 그러고 보니 효진이한테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난다. 아예 결혼하지 않고도 날 낳으신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누구는 여러 번도 한다는데, 우리 엄마는 뭘까.

"그분이 그런 말씀을 자주 했어. 여자는 꽃이고, 꽃 중의 꽃은 장미라고. 왜냐고 물었더니 아름다우면서도 가시를 갖고 있기 때문이래. 능히 색과 모양으로 유혹하되 함부로 꽃을 꺾으려는 남자에게는 가차 없이 고통을 선사하고, 한 발 떨어져 감상하는 이에게는 아낌없이 향기를 준다고."

순간 내 등 뒤에 따라오고 있는 사람이 박태근이 아니라 박태순인 줄 알았다. 그것도 스물여덟 살 박태순이 아니라 열일곱 살 박태순. 이런 말까지 하긴 좀 무엇하지만 목덜미에 살짝 닭살도 돋았다.

"오오. 형이 그렇게 소녀 감성 넘치는 말을 하니까 나 지금 닭살 돋았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내가 빙글거리며 놀리자 형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인마. 그럼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우락부락한 줄 알아? 한때는 나도 여리여리하게 생긴 미소년이었어."

"......."

"그 표정은 뭔데!"

"아뇨,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형도 잘 아시리라 믿어서요.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이 자식이~"

형의 애정표현이자 내가 가장 싫어하는 헤드락이 행해진다. 전 같으면 꼼짝없이 걸리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목을 비틀어 빠져나갈 방법도 터득한 후다. 그렇게 둘이 장난을 쳐가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첫 번째로 만난 웨이터에게 룸 하나를 내어 달라고 부탁하고 형에게 웨이터를 따라가라고 했다. 내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웨이터는 알았다고 고개를 숙이곤 형을 안내했다. 지나가는 종업원들이 날 알아보고 인사를 해오자 형은 놀란 눈치였다.

"너 대체 여기서 뭐하냐?"

"일한다고 했잖아요."

"난 니가 일한다고 해서 여기서 빨래나 청소, 설거지 뭐 그런 거 하는 줄 알았어. 근데 왜 다들 너한테 저렇게 깍듯이 인사해?"

"....저 그런 거 잘 못하는데요."

"암튼, 다시 봤어. 한석 군."

형을 룸에 안내한 후, 지나가는 웨이터 한 명을 불러 아가씨들을 좀 넣으라고 했다. 얼마나 넣냐는 질문에 일단 넉넉히 넣어두라고 일러두었다. 의자에 느긋한 자세로 앉은 형은 날 보고 물었다.

"넌 어디 가는데?"

"말했잖아요. 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일단 사장님한테 출근 보고는 해야죠. 금방 방으로 따라갈게요. 먼저 가 계세요."

"그래라, 그럼."

룸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안에 들어가자 유미와 지나가 보였다.

"어머, 어서 와. 자기야."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유미는 여전히 나보고 '자기'라고 불렀고 유미를 제외한 나머지 종업원들은 날 보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자기는 그렇다 치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내가 조금 부담스러워했더니 지나가 "그러면 오빠라고 부를까요?"하기에 그냥 선생님으로 해 달라고 했다. 당신 나보다 나이 많은 거 알고 있거든? 일단 한 명뿐이긴 하지만 유진이라고 하는 학생이 있으니 아주 틀린 표현만은 아니었다.

"일찍 왔네? 오늘 시험 끝난 거지?"

"응. 그동안 별일 없었지?"

지난 일주일 정도가 시험 기간이라 ROSE에 안 오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 놓인 컴퓨터를 켜고 지나에게 부탁했던 전표 입력이 제대로 되었나 쭉 훑어본다. 다시 한 번 점검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특별히 큰 오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을 들여 제대로 봐야지 싶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일이라... 있는데?"

"뭐?"

무심히 말하는 유미의 저 태도. 난 말이지, 저게 제일 무섭다. 저 여자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는 거 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못 보았거든.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려 유미를 쳐다보자 그녀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여기 우리 가게 말이야. 이제 자기도 책임을 좀 져줘야겠어."

"뭔 소리야, 그게 대체..."

"자, 이거."

그녀가 내민 종이를 받아든다. 사업자등록증. 일반과세자. 상호는 ROSE.

"이건 우리 가게 사업자등록증이잖아. 이걸 왜 나한테..."

"바로 그다음을 봐."

유미의 지적대로 바로 다음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업주의 이름에 유미 혼자 쓰여 있는 게 아니라 내 이름도 나란히 적혀있었다.

"이게 뭐야! 공동명의라니! 게다가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날 보며 유미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그래. 이제 자기가 여기 진짜 사장님이야. 대표공동명의자. 자, 지나야. 새로운 사장님을 환영하며 박수."

"박수요?"

옆에 서 있던 지나가 엉겁결에 박수를 친다. 그 외로운 박수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아직 사태 파악이 잘 되질 않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유미에게 등록증을 돌려준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게다가 명의 등록 서류 같은 건 대체 어떻게 꾸민 거야?"

"그거야 자기 여권 만든다면서 유진이한테 인감이랑 신분증 다 줬다면서? 잠깐 빌렸지."

"크아아아! 그건 범죄야! 남의 명의를 가져다가..."

"왜? 그래서 싫어? 여기 사장하는 게?"

따져 묻는 날 보고 유미는 팔을 쫙 벌리며 말했다.

"우리 가게 이만하면 목도 좋고 애들도 물 좋고 손님들도 빵빵하단 말이야. 어지간한 사람들이 다 탐내는 가게인데, 자기는 어쩜 이런 걸 마다해? 나 같으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겠네."

"아, 아니. 내가 ROSE가 싫다는 게 아니잖아. 그게 그러니까..."

"싫다는 게 아니면 받아들인 걸로 알게. 어차피 등록은 다 되었으니까 앞으로 전표 작성할 때 과세 항목 좀 신경 써줘. 우리 세금 많이 나오면 자기도 세금 많이 내는 거니까 말이야."

이야기로는 유미를 이길 자신이 없다. 논리도 상식도 없는 그녀는 마이페이스, 마이웨이. 그 자체의 여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앉는다. 지나를 내보낸 유미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계속 지켜보니 잘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자기라면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나보다 더 잘할지도 몰라."

"유미보다 잘한다니... 유미는 이걸 안 할 생각이야?"

"후후. 내가 이야기했던 거 벌써 다 까먹었구나?"

그녀가 이야기했던 거? 대체 뭐지? 워낙 갑작스러운 일을 닥치고 나니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어서 그녀가 말하는 게 무언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유미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유진이는 처음에 좀 싫어할지도 모르겠어. 자기 주변에 여자 있는 거 그렇게 질색하는 애인데 이런 물장사 사장이라... 펄펄 뛰겠지. 그래서 그 애한테는 아직 이야기 못했거든. 나중에 자기가 잘 설득해봐. 정 안 되면 몸으로라도 설득해보고."

"됐거든. 그런 이야기는 그만 좀 해. 대체 자기 딸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어디 있긴, 바로 여기 있잖아. 어디에도 없고 바로 여기."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저 날 놀리기 위해서 공동명의, 그것도 대표명의로 올리지는 않았겠지. 지금 그녀가 나를 그렇게 올려놓았다는 건 내가 지금 당장 이 가게의 지분 절반을 요구하며 팔아넘겨도 전혀 법적으로 하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지만....

"난 아직 졸업도 안 했고 군대도 안 갔다 왔단 말이야."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다. 그러나 유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졸업이야 시간이 지나면 하게 될 거고... 군대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야. 내가 봤거든."

"하....아.."

뭔가 다른 반박을 하려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보았다니, 내 군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리란 것을 '미리' 보았다는 말인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걸 따져 물어야 무의미하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 지금 조금 혼란스럽거든."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은 나 친구랑 술 한잔 하려고 왔거든. 방 하나만 쓸게."

"아,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같이 교생했던 친구?"

"응."

"애들 많이 데리고 가서 재미있게 놀아. 나도 이따가 한번 들를게."

".....굳이 안 오셔도 됩니다. 동업자님."

마지막에 붙인 내 칭호에 유미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래.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괜히 골머리 썩히지 말고."

쿨한, 너무도 쿨한, 진짜진짜 쿨하다 못해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인 그녀를 두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형이 몇 번 룸에 있는지 묻고 그곳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보니 아주 가관이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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