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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어. 그게 보여?"
"아까 너랑 칠 때 정말 죽기 살기로 치던 파워가 안 느껴졌다 말이야? 아주 잡아먹는 줄 알았는데?"
그...그랬단 말인가. 자리를 다 깔아놓은 후, 앉은 채로 졸고 있는 유진을 두 팔로 안아 올렸다. 녀석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확 던져버릴까, 요 앙큼한 것을?
"내가 그런 거에 좀 둔해. 거기 담요 좀 줘봐."
"한석 군 둔한 거야 유명하지만.... 뭐, 그래서 더 미움도 받았겠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나 역시 무척 졸렸지만 그래도 유진이의 이부자리 정도는 준비해줄 수 있었다. 담요를 펼쳐 유진이를 눕히고 내 점퍼를 가져다가 녀석을 덮어주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러질 못 했다. 유진이가 내 옷깃을 잡고 놓고 있지 않았다.
"유진아..."
"....가지마요...."
잠꼬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창백한 녀석의 얼굴이 못내 안쓰러웠다. 효진이가 비척거리며 다가가 천장의 조명을 끄고 한쪽 구석에 거꾸러져 잠을 청하기에 나 역시 가만히 유진의 옆에 누웠다. 팔 하나를 펼쳐 유진의 머리를 괴어주었다. 아련한 향 냄새를 맡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소란이가 나오더니 내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훨훨 날아가듯 자유롭게 떠나는 그 아이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내 옷깃을 잡고 있는 유진이가 있었다. 앞으로 날 안 보겠다면서...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게 잡고 있는 그 손은 절대 놓지 않고 있었다.
"...석 씨... 한석 씨..."
"으음?"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떴다. 말 그대로 누웠다가 바로 일어난 것 같다. 눈을 비비고 앞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선영이가 날 깨우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정말 반가웠다.
"아까 직원이 와서 조금 있다가 발인한다고 하던데요."
"아, 예."
선영은 내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싶어서 보았더니 유진이는 팔과 다리가 내 몸 위에 하나씩 턱 하니 얹어져 있었다. 끄아아악. 이 녀석 잠버릇이 왜 이렇게 고약한 거야. 황급히 유진의 팔다리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입관이니 뭐니 하는 걸로 바깥에선 준비가 한창이다.
"어떻게 왔.... 오셨어요? 안 피곤하세요?"
말을 놓으려다가 조금 전 그녀가 내게 존대를 했다는 걸 떠올렸다. 반말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이제는 거리를 둔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이전같이 "자기야"라는 호칭도 들을 수 없는 걸까.
"뭐, 어차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없어서요. 유진이의 친한 친구인데.... 배웅 좀 해주게요."
하고 있는 일이 없다니. ROSE에 복귀하지 않는 걸까? 나머지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발인에 앞서 조촐하게 술을 따르고 마지막 잔을 올렸다. 어제 그나마 나에게 말문을 열었던 유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을 붙여보려 했지만 쌀쌀맞은 태도로 대하기에 말 붙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효진에게 선영을 소개했다. 유진이의 언니 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반갑다며 손을 맞잡았다. 나랑 잤던 두 여자가 서로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유진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선영이가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우리 집에 와줘."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언제 그런 말을 했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발인 준비에 임했다.
다 같이 버스에 올라 운구차를 따라갔다. 태근이 형은 쓸데없이 큰 버스를 빌려 가지고... 다섯 명밖에 없는 터라 더욱더 황량했다. 출발 전 기사님에게 미리 말해둔 대로 학교에 가서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다. 본관 앞에 멈춰서자 반 아이들과 지애가 버스에 탔다. 교장의 허락이 있었다고 했다. 그제야 조금 덜 쓸쓸했다. 아까까지는 나무라고 있었지만 태근이 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화장터에 도착하고 운구된 관이 화로 안으로 들어갈 때, 아이들이 많이 울었다. 인부는 무심하게 관을 밀어 넣으며 외쳤다.
"좋은 데 가십시오!"
유진이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왜 울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까지 보고 모두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버스가 납골당을 떠나기 직전, 누군가 창 밖을 향해 외쳤다.
"소란아, 잘 있어!"
여학생들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고, 남학생들도 벌겋게 된 눈을 감추느라 서로 바빴다. 학교에 들러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선영의 집으로 향했다. 늘 그랬듯이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처음 보는 옷차림의 선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그녀의 인사에 대답도 바로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몸 전체를 감싼 회색의 옷은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몸의 라인을 감추고 목과 어깨를 감싼 새하얀 천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직접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책이라든가 TV 같은 곳에서는 보았는데 저게 뭐더라...
"수녀복?"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더니 선영은 겸연쩍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 어.... 요새 이걸 입고 일하는 버릇이 붙어서, 이게 편해."
선영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방 안에는 각종 종이박스와 옷가지들로 어수선했다. 방 안을 둘러보고 물어보았다.
"이사 가는 거야?"
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사라기보다는... 당분간 피정을 좀 해보려고. 앞으로의 길을 고민할 시간을 갖는 거야."
"피정? 그게 뭔데?"
선영은 내게 앉기를 권했다. 늘 과외할 때 쓰던 테이블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선영이 냉장고에서 주스 한 병을 꺼내 내게 따라주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성소에 들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거야. 내 경우에는 교리 공부도 해야 되는데 여긴 워낙 번잡스러워서."
성소? 교리 공부?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선영이, 너, 수녀 된 거야?"
그러자 선영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수녀라니. 자기랑 못 본 지 고작 몇 주 사이에 그렇게 되겠어? 그게 보통의 마음으로 들어설 수 없는 길인데 말이야. 내가 말한 피정은 그냥 그런 분들 근처에서 조용히 얼마간 지낸다는 이야기야."
"그러면 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내가 그동안 지낸 곳에서 일할 때 하나 받은 거야. 처음에는 옷이 없어서 입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이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몹시 부담스러웠어. 그리고 지금은... 앞으로 입고 싶어지고 있고."
물론 이런 불측한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만 이미 소란의 전례가 있는 터라 나는 기도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면 가슴이 먼저 덜컥 내려앉는다. 이런 불안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니 선영이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진이 친구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몹시 슬픈 일이야. 아직 그게 무언지 확언을 할 수 없는 나인데도, 그렇게 배움이 짧은 나 같은 사람도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겠어. 종교가 결코 그런 일을 위한 것이 아닌데도... 참 못된 사람들이 많아. 그렇지만 이런 일을 겪었다고 자기가 모든 종교인을 다 매도하지 않았으면 해. 음지에서 낮은 자세로 임하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으니까.... 내가 지금 가려는 곳도 그런 곳이야."
선영은 차분한 어조로 충남에 있는 성 바오로의 집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늙고 병든 무연고자들을 돌보는 그곳의 일과 거기에 머물렀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자신이 그곳에서 보고 들으면서 깨달은 마음과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도 함께 들려주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아빠가 정말 답이 없는 분이었거든. 술만 마셨다 하면 행패 부리고 집기를 부수고... 그래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아버지가 저지른 짓에 대해 사과를 하고 다니던 게 우리 엄마의 주요 일과였어. 난 그게 너무 싫었거든. 그리고 아빠한테 맞는 것도... 술 취한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도... 전부 다 싫었어. 그래서 중학교 때 집을 나왔어."
과외를 처음 시작할 때, 자신의 학력을 이야기하며 부끄러워하던 선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학력 콤플렉스 이면에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일 저일 전전하다가 나쁜 사람들 꼬임에 빠져서 남자를 받는 일을 했었어. 하루하루가 너무 지옥 같아서 정말 죽고만 싶었지. 거기서 간신히 도망쳤는데도 이 세상이 너무 밉고 싫었어. 자포자기해서 거리를 헤매다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는데 그때 날 발견한 게 유진이야. 겨우 일곱 살이던 녀석이 날 내려다보면서 물어봤거든. 정말 죽고 싶으냐고. 살고 싶으면 따라오라고."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려졌다. 일곱 살이라고는 하지만 유진은 유진이었을 터. 어떤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어떤 표정으로 선영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그때는 유미 언니가 아직 ROSE를 차리기 전이었어. 언니도 당시에는 이런저런 일로 자기 앞가림으로 바빴을 텐데 자기 딸이 주워온 애라고 날 챙겨주더라고. 근데 처음에는 무슨 주워온 고양이 취급을 하면서 먹을 거랑 잠자리를 챙겨주는 거야. 그때는 이 여자가 날 놀리나 싶었는데 나중에야 알았지. 언니는 모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해. 그래서 그게 굉장히 공평하게 대해주고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
바로 얼마 전에 주워 온 강아지 취급을 당하고 있던 나로서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영의 말은 이어졌다.
"어디서 후원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결국 ROSE를 차렸어. 그렇지만 언니가 나한테 나와서 일을 하라고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렇지만 그냥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얹혀사는 게 미안해서 내가 나가기 시작했어. 그래서 돈도 벌고 여기 이 오피스텔을 구해 나오기도 했지. 그게 벌써 6~7년이 되었어. 세월이 참 빨라."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그녀는 그리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힘들고 괴롭기도 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삶을 새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선영이가 유진이를 왜 그리 끔찍이 여기고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친 선영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입가는 조금 웃고 있었지만,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내가 자기한테 그런 조건을 걸었었지? 내 몸을 줄 테니까 유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야."
"그...랬었지."
선영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가진 게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하찮은 년이라서 생각하는 게 딱 그 수준이었어. 그렇지만 이번에 알게 되었어. 내가 그렇게 막는다고 유진이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그런 핑계로 자기와 같이 있고 싶은 게 내 욕심이었다는 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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