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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하영이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본 모양인데 그녀의 바로 옆에 있는 나는 살짝 보고 말았다. 항상 무표정하고 반쯤 찡그린 표정의 그녀가 살짝 웃기까지 하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 웃음은 뭐랄까. 막 웃겨서 웃는 그런 웃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를 많이 보아온 건 아니었지만 얼굴에서 표정 변화가 이토록 크게 나타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하영은 그녀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남자에게 말했다.
"아아. 그러셔요? 그렇다면 그 잘난 성령에 기도해서 이 인간한테 벼락이나 내릴 것이지 쪼르륵 달려와 세속의 경찰서에 고소장은 왜 접수합니까? 여태까지 어떻게 하면 고소취하 시킬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건 뭐,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였군요. 쳇."
명백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안 그래도 흥분해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짓? 당신 지금 짓이라고 했소?"
그러면서 하영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그러나 하영 역시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그래요. 지금 당신들이 하는 짓거리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을 죄다 욕되게 하고 있는 거라고. 알아?"
그리스도인? ... 기독교인을 말하는 건가?
"내가 언제 그리스도인을 욕되게 했어! 이 여자가 말이면 다 인줄 알아! 내가 우리 말세교회의 장로로서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고 있거늘..."
"장로? 장로라는 놈이 남에게 폭행을 가하고 뭘 잘했다고 여기서 큰 소리야! 당신은 로마서도 안 읽어봤어?"
로...로마서? 다들 눈을 껌뻑이며 그녀를 쳐다보는 걸로 보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나야 그렇다 치고 장로 당신이 그런 표정이면 어떻게 해? 아아. 다만 아까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김은혜라는 권사는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하영이 외쳤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했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고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셨는데, 니들에게 불리한 법은 종교탄압이다 뭐다 하면서 들어 처먹지를 않고, 니들이 쓰기 좋은 것만 가져다가 낼름 쓰는 게 그게 법인 줄 알아? 그게 니들이 속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해야 될 도리인 줄 아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난데없는 하영의 사자후에 다들 침묵했다. 와. 무슨 랩 하는 줄 알았다. 중간에 숨은 쉬고 말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유창한 그녀의 말도 말이거니와 성경 말씀까지 곁들여 가며 일갈하고 나니 장로라는 남자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그나저나 눈앞에 성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구절을 줄줄 읊을 정도라니.... 저걸 다 외우고 다닌단 말인가? 정말 신기하다.
"뭐...아...아무튼, 우리는 합의 그딴 거 안 합니다. 조사 끝나면 바로 검찰 넘겨서 저 놈 콩밥 먹게 해주시오."
성경 이야기 들먹여보았자 하영에게 말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했고 이 경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몇 번 더 설득해보았지만 그쪽은 완강했다. 말로는 쫄린다고 생각해서인지 아까처럼 우리를 비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고소를 주장했다. 이 경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우리 쪽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쪽이 그렇다는데.. 어쩌시겠습니까?"
나야 뭐 할 말이 있나. 하영 쪽을 쳐다보자 그녀는 시계를 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기다려보면 알거라고 했다. 잠시 후, 사무실로 들어서는 사람을 발견한 나는 하영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땡중이 여긴 왜...."
장로 역시 돌아보고 확인한 모양이다. 어제 빈소에서 저들에게 구타를 당했던 스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합장하며 인사했다. 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마주 합장하며 인사했다.
"무리한 요구인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불초가... 그냥 오기만 된다고 하셔서..."
"일단 여기 앉으시죠."
하영은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스님께 권했다. 그리고 선 채로 말했다.
"이 경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저 사람들 말하는 고소 그대로 접수시켜 주시구요, 기왕 접수하시는 김에 이쪽 스님 것도 같이 접수시켜 주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건 거는 최한석 씨에 의한 김은혜 씨 폭행, 이거 한 건이죠? 저희가 걸 것은 저기 김은혜를 비롯하여 그 외 6인에 의해 행해진 다수에 의한 일방 폭행입니다. 진단서도 없이 자의 판단에 의한 상해 사실 주장과는 달리 이쪽은 진단서도 제출하고 폭행에 가담한 전원을 고소하도록 하겠습니다."
명쾌하고 통쾌했다. 김은혜와 교회 장로 두 사람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고 이 경장은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으며 스님은 합장을 풀고 걸망에서 진단서를 꺼내어 조용히 하영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사필귀정이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장로가 이쪽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증....증거 있어? 증인 있냐고?"
그러나 하영의 안경테가 번뜩였다.
"증인? 있지. 어제 당신들이 최한석에게 김은혜가 맞은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증인들 전원이 그 앞에 있었던 당신들의 집단 린치 현장을 아주 잘 보고 있었지. 안 그래?"
"이...이...마귀 같은....."
장로는 파르르 떨며 노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경장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말 마지막으로 물어봅니다. 그냥 합의하실래요, 아니면 정말 끝까지 고소하시겠어요? 저기, 손하영 씨라고 했던가요, 변호사님?"
"네."
"저쪽에서 고소하면 이쪽도 고소하실 거죠?"
"물론이죠."
"저쪽에서 고소 안 하면요?"
"여기 있는 명련 스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아, 이 스님 이름이 명련이었구나.... 아까 그렇게 열심히 통화를 하던 것은 아마도 이 스님과 연락이 닿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영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모셔 온 스님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장로와 김은혜는 서로 무어라 쑥덕거리더니 이내 체념하고는 합의 의사를 밝혔다. 이 경장의 주도 아래 양쪽의 합의서가 오고가고 나에 대한 고소는 취하되었다. 하영은 그들을 고소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작성했다. 이 경장은 서류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일단 송치는 되더라도 약식 기소 정도로 끝날 겁니다. 취하된 사실도 같이 전달되니까 벌금 금액은 뭐.... 변호사님이 잘 아시겠죠?"
"네."
"그러면 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교회 인간들은 우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휑하고 가버렸다. 나와 하영은 명련 스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하영은 스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아까 전화로 말씀드린 시주는 조만간 찾아뵙고 청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이만..."
종종걸음으로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영에게 물었다. 방금 그녀가 한 말 중에 내가 아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우리 엄마가 마을 뒷산에 있는 절에 다니면서 항상 하신다는 그 시주.
"시주라뇨? 무슨 소리에요, 그건?"
그러자 하영이 날 가볍게 흘겨보며 말했다.
"그럼 저 분이 여기 공짜로, 심심해서 왔겠어요?"
그럼 뭐냐, 저 분도... 부당한 교회의 고소에 힘겨워 하고 있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만 온 분은 아니라는 건가.
"....그럼 저 쪽에도 돈을 주기로...."
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전부 박태근한테 달아놓을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오늘 합의금도 마찬가지구요."
하아. 이것 참. 태근이 형한테 빚을 잔뜩 지고 말았다. 점심시간에 경찰서에 들어와 나올 때가 되니 한밤중이다. 하영이 차를 가져왔다고 했다. 조수석에 올라타니 밥 먹으러 가잔다.
"이 시간에 식당 하는 데가 있어요?"
"거긴 줄 거예요."
하영은 어디로 간다 설명도 하지 않고 그대로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기 직전, 그녀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이런 말을 했다.
"노아가 방주에 모든 것을 태우고 있을 때, 선이 다가와 태워달라고 했답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짝지은 것이 아니면 태워주지 않았고 결국 선은 악을 데리고 와서 올라탔다고 합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대요? 그냥 지도 타지 말지..."
"흠흠. 비유가 그렇다는 거예요. 암튼 그 후로 선이 있는 곳에 악이 항상 같이 있게 되었다고 하는 군요. 꼭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에 선한 자가 있는 것처럼 악한 자도 있어요. 종교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선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닌 거죠. 그러니 부디 한석 씨도 종교인에 대한 편견 같은 거 없이... 사람 그 자체로의 행동과 삶을 통해 판단해주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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