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92화 (9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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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악!!"

여학생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라나는 새싹인 학생들 앞에서 보여주기에는 그다지 교육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 안의 똘끼가 내게 이러라고 외치고 있다! 그 외침을 따르지 못한다면 난 내 자신에게 너무 실망할 거란 말이지!

퍼억-

소리도 몹시 상쾌하게 울려 퍼지며 나의 타격이 제대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검은 옷의 여자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황망한 표정의 교인들이 벌떼처럼 내게 달려들어 손에 든 목탁을 뺏고 밀쳐냈다.

"웬 미친놈이!!"

"악마의 사주를 받은 놈이구나!!"

"김 권사님! 괜찮으십니까!!!"

너무도 적절한 언사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말이 아니라 니들을 향한 말이 그렇다는 거다. 미치긴 누가 미쳤다는 거냐. 이 썩을 놈들아. 몇 명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쓰러진 검은 옷의 여자를 돌보았고 남자 교인들은 팔을 걷어붙이며 내게 달려와 멱살을 쥐었다. 내게 마귀라며 옷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하는 그들을 향해 목탁을 집어 던지고 소리쳤다.

"소란이가 뭐 땜에 이렇게 되었는데! 니들이 여기가 지금 어디라고 몰려 들어와서 먼저 행패야, 행패는! 교회인지 귀신인지 뭔지 하는 네 놈들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런데 지금 뭐, 어쩌구 저째? 누굴 위해 기도하고 누구를 위해 여기서 예배를 드리겠다는 거야! 미친놈은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야!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아!!"

"이 노오옴!! 마귀가 들려도 단단히 든 놈이구나! 아까 땡중도 네 놈이 불러 들였지!"

"그래, 이 개독교 예수쟁이야! 내가 불렀다! 그러니까 너네는 빨리 안 꺼져? 부르지도 않은 새끼들이 몰려오는 건 개새끼 아니면 거지새끼 밖에 없다는데, 니들이 그거냐?"

"이놈! 보자보자 하니까!"

구경만 하고 있던 학생들이 나에게 가세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달려들어 엉겨 붙어 있는 나와 그들을 떼어 놓았다. 빌려 입은 와이셔츠 솔기가 다 터져나가고 누군가 휘두른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기도 했다. 여자를 때려본 건 난생 처음이다. 그러나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잘못 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더 때려주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교인들과 싸우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 밖으로 끌어 당겼다. 밀어 내는 사람도 있어서 버티지 못하고 빈소 바깥으로 구르다시피 하여 끌려나왔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았다. 이런....

"유...유진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유진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온 모양이다.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나를 나무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서 무어라 말을 할 수 조차 없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유진의 작은 손을 본다. 이 손 만큼이나 작디작은 손이 있었더랬다. 비밀을 지켜달라며 내게 내밀던 손가락 하나가 눈앞에 떠올라 ......날 울게 만든다.

- 제가 선생님이 애인 만나러 다니신다는 거 비밀로 해드리는 것처럼요, 선생님도 유진이한테 제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세요.

아까 유미도 그렇지만.... 이 모녀는 어째서 날 울게 만드는 걸까. 유진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울고 말았다. 아까 저 미친놈들에게 맞은 곳이 아파서... 그래서 우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창피한 것도 잊고 꺼이꺼이 울었다. 차가운 복도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자니 유진이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소매를 길게 잡고 그걸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녀석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내 품에 안긴 유진이는 꼼지락거리며 나를 밀어 내었다.

"아...아저씨...."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소란이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이 아이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데, 그래야 소란이도 내 비밀을 지켜 줄 텐데... 그럴 텐데.... 이제는 내가 들켜버려도 어쩔 수 없다. 정말 어쩔 수 없다. 설령 내가 소란이 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 아이가 내 비밀을 유진이에게 말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말할까.

점심시간에 내가 사준 음료수병을 하나씩 손에 쥐고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 때처럼, 그리고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처럼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했을까. 아니면 서로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 앉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남몰래 쏟아내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그렇지만 이제 소란이가 유진이에게 귓속말로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없게 되었다. 꼭 고만고만하게 키가 작은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교탁 앞에 멀뚱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키득거리는 그 모습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 그 모습이 언뜻 비쳐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보고 있을 때는 그것이 그리운 줄 모르고 있다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지금, 늦은 줄 알면서도 나는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괴로워한다.

참아왔던 괴로움은 눈물이 되어 끊임없이 흘렀다. 나보다 훨씬 작은 유진이가 내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 어떤 곳에 앉힐 때까지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이제 좀... 진정이 되세요?"

병원 뒤쪽에 있는 작은 매점에서 음료수 두 개를 사온 유진이가 벤치에 앉아있는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들어 보니 따뜻한 음료였다. 비틀어 입구를 열고 조금씩 마셨다. 속 안에서부터 따뜻함이 퍼져나간다. 부족했던 온기가 몸 안에 채워진다. 작은 부분인데도 이런 걸 신경 쓴 건가. 기특한 녀석 같으니. 아까 목 놓아 울었던 것이 좀 쪽팔리기도 하고... 막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 게 못내 신경 쓰여서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냥... 뭐, 그래.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유진은 내 옆에 앉았다. 단정하고 얌전한 검은 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 녀석은 학생용 단화를 신은 발로 바닥을 툭툭 건드린다. 회색 포석이 깔린 바닥은 오래 되었는지 빛을 많이 잃고 있었다. 둘 다 한참 동안 음료수를 홀짝거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 역시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아까의 분을 삭이고 있었다. 긴 침묵을 먼저 깬 건 유진이었다. 녀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선영이 언니랑 같이 있었거든요. 언니가 워낙 자기 아버지 일 때문에 많이 슬퍼하고... 그러고 있기에 같이 있어줬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저희 집이랑 가게에 전화했었다면서요?"

유미와의 통화가 떠올라 조금 겸연쩍어졌다.

"으응... 그랬지."

내 태도는 크게 개의치 않은 듯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영이 언니한테도 해보지 그랬어요. 언니도 아저씨 목소리 듣고 싶었을 텐데... 이럴 때일수록 좋아하는 사람의 위로가 큰 힘이 되는 거니까요."

"그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뭐?"

고개를 홱 돌려 유진을 보았다. 녀석의 말투는.... 그러니까 나와 선영의 관계를 다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어떻게 알았지? 뜨악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지만 녀석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언니가요, 자기 아버지 뵈러 내려갈 때... 자기 아버지를 보는 건데도... 우여곡절도 많고 오랫동안 뵙지 않은 분이라서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한참 망설였대요. 그래서 의지가 될 만한 사람인... 아저씨에게 연락을 했었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저씨한테 전화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날, 새벽의 전화.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쓸쓸한 선영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랬구나. 그래서 내게 전화를 했었구나. 내가 같이 가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의지가 될 만한 사람이라니. 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 하는데. 선영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그런 것이다.

유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나,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언니 만나는 거 일찌감치 알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들고 다니는 중학생 교재가 누가 푸는 건지도 알아차렸구요. 아저씨 몸에서 나는 바디샴푸 냄새가 선영이 언니 집에 있는 그거라는 것도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근데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었어요. 기다리고 있으면 둘 중에 누구 하나는 나한테 말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둘 다 그러지 않더라구요."

이런 여우같은 녀석이라니...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아차리는 거지? 그렇지만 유진의 눈썰미라면 내가 신경 쓰지 못한 어떤 작은 부분에서 알아차리고도 남았으리라 싶었다.

"유진아, 그건 말야. 선영이가 너한테..."

"알아요. 언니도 이야기 했어요. 저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거... 이해는 해요. 언니가 원래 좀 학력 콤플렉스가 있으면서도 절 끔찍이도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을 해냈겠죠. 게다가 얼빵하고 만만한 아저씨니까 잘 구슬려서 공짜로 과외 받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예요."

열일곱 살짜리 녀석에게 얼빵하다느니 만만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은 건가. 스물세 살 최한석은...

"그리고 우리 엄마 가게에서 일하는 것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엄마가 기분이 많이 좋아졌거든요. 일도 집에 안 가져오고.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가게에 들어와서 먹이주고 키우는 중이라고 했어요. 조만간 잡아먹는다나 어쨌다나...."

......착잡했다. 그래도 방금 전까지는 얼빵하고 만만한 "사람"이었는데 순식간에 강아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뭐? 조만간 잡아먹는다고....? 복날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테고... 아우, 진짜 이 아줌마가.... 하도 어이가 없어 깨갱거릴 기운도 없는 강아지는 꼬리를 말고 옆 자리에 앉은 암표범의 말을 경청했다.

"난 말이죠. 선영이 언니 평가에 의하면 남에게 틈을 안 주는 애라고 하더라구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다른 사람 따위는 필요 없이 정말 똑똑하고 고고하게 구는 아이라서 언니도 처음에는 제가 많이 어려웠대요."

유진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에 섰다. 녀석의 표정은 한없이 슬퍼보였다. 소란이 때문인가 싶었는데 날 바라보는 눈빛은 꼭 그것만이 아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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