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89화 (8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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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경찰서를 벗어났다. 닭장차가 오더니 시위 중인 사람들을 하나씩 담요로 싸서 태워가는 광경이 보였다.

휴거...라고 했던가. 저들이 믿는다는 게? 게다가 중독이라니?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까 화면에 약 2초정도 비쳐졌던 소란의 모습을 떠올린다. 단 일주일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그래,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 경찰병원이든 뭐든 가보는 거다. 그러나 이내 또 걱정이 되는 것이.... 지금 경찰서도 천만다행인 요행으로 들어왔는데 병원도 그게 될까 싶었다. 윤태라는 경찰이 말한 걸 떠올려본다. "어지간한 빽". 그런 게 나한테 있을 리가 있나.....

패배감과 무기력함에 젖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되든 안 되든... 도움을 요청해 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박스 안으로 들어간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내가 가진 돈이라고는 5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 젠장. 아까 택시비도 겨우 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집까지도 걸어가야 할  판이다.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뿐이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얼마 전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ROSE. 또 다른 하나는 무려 변호사를 대동하고 다니던 효진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일단 ROSE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효진에게 신세를 거듭 지는 것 같아 미안했고 어차피 오늘 ROSE에 못 가겠다고 연락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번호를 누른다. 신호가 간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바로 받았다. 다급한 마음에 바로 말했다.

"여보세...."

"지금~ 로즈에는 아무도 없답니다. 일이 좀 있어요. 그러니깐요. 오늘 내일은 휴무~ 제 말이 끝나면 삑 소리 날 테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씀하세요. 목소리가 마음에 들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유미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녹음된 자동응답기였다. 젠장. 며칠 전에 ROSE에서도 하나쯤 필요하다며 유미가 주문했던 게 생각이 났다. 아무도 없다니. 어떻게 일요일 술집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제 토요일에 유진이가 결석했던 게 생각났다. 지애에게 물어보니 무슨 친척이 상을 당했다는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그것 때문일까.

전날 새벽에 있었던 충격적인 일에 의해 정신과 몸이 많이 놀라 하루 종일 멍하게 있던 나는 ROSE에 전화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토요일 하루를 멍하게 보내버렸었다. 이런 머저리 최한석.....

삐익-

신호음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동전이 그렇게 헛되이 소모되었다. 공중전화박스를 나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집까지 향했다. 종로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지나치게 멀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안타까움에 온 몸에서 힘이 빠져서 그런지 걷기가 더 힘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쳐버린 몸을 침대에 던진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일찍 나갔다. 선생님들이 군데군데 모여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혹시나 싶어 일단 가지고 온 교안을 지애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선생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어휴. 그러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교회겠어요? 말세 온다고 재산 바치고 몸 바치고 막 그런 곳이라는데."

"우리 학교 애들이나 학부모 중에서도 거기에 간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큰일입니다."

어제 뉴스에 그렇게 크게 보도되었기에 모든 대화의 화제는 그 교회였다. 모여 있던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날 알아보고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때 마침, 지애가 교무실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얼른 달려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송 선생님. 어제 말이죠..."

내가 서두를 꺼내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애는 손을 들어 내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최 선생. 우리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나 어제 새벽에 어디 좀 다녀오느라 살짝 피곤하거든?"

"어딜 다녀오셨는데요?"

"종로 경찰서. 참고인 조사로."

깜짝 놀랐다.

"어? 저도... 거기 저녁에 갔었는데...."

"최 선생이? 거긴 뭐 하러?"

"그게 왜냐면요...."

나는 예전에 소란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와 어제 TV에서 본 녀석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지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첫 수업이지?"

"아, 예."

"일단은 거기에 집중해. 퇴근하면... 나랑 어디 좀 가자."

고개를 끄덕이고 지애를 따라 교무회의에 참석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임선생님이 뭐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소란이에 대한 조사 때문에 지애가 불려갔었던 걸까. 그렇다면 신원이 확인되었다는 건데 어째서 풀려나지 않는 걸까. 그 경찰이 말했던 중독 상태라는 건 대체 뭘 말하는 걸까.

"...한석 씨."

"네넵?!"

옆에 서 있는 지애가 팔꿈치로 툭툭 치는 통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니 난감한 표정으로 회의석 맨 앞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엄한 표정의 교무주임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더군요. 설마 서서 졸고 계신 건 아니었을 테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수업이 많이 부담됩니까?"

"아... 아뇨."

"흠흠. 그럼 다시 말씀드리죠. 이렇게 최한석 씨, 박태근 씨, 양현아 씨. 세 분은 오늘부터 직접 수업을 시작합니다. 담당 분들과 평정 위원들께서는 신경 써주시길 바랍니다. 서서 조는 분이 없도록."

마지막 말은 명백히 날 가리키고 있었기에 날 뺀 나머지 사람들은 와- 하고 웃어버렸다. 교무주임의 말은 이어졌다.

"박은애 씨는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와서 신변상의 이유로 교직 이수를 포기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하더군요. 교감 선생님께도 말씀 드렸더니 없던 일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다들 이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두루뭉술하게 이야기 하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뭘 말하고 있는지 다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근이 형과 시선이 닿았다. 그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버리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현아는.... 아... 이럴 때 쟤를 보면 안 되는 건데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현아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비난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왠지 그런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나머지 분들은 준비 잘 되었으리라 믿겠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결재 올라온 교안도 모두 내용이 좋았다고 평하셨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나와 태근이 형, 현아. 이렇게 세 명의 교생은 나머지 선생님들의 박수를 받으며 인사했다. 오늘부터 우리 교생들이 실습을 시작하게 된다. 여태까지는 담당 교사가 수업을 하는 동안 배석하기만 했는데 이제 일주일동안 교생이 주도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그동안 교안을 열심히 써서 올려 결재를 받아두었고 시간 나는 대로 빈 교실에서 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수업을 하는 동안 담당 교사는 물론 다른 교사도 한 명 더 수업에 들어와 평가를 하게 된다. 이 평가에서 우 이상을 받아야 최종 실습에 통과하게 된다.

회의가 끝나고 바로 수업이 있는 게 아니라서 남는 시간동안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교무실을 나섰다.  어느새 태근이 형이 따라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발로 판서해도 우는 준다고 하더라. 너무 쫄지 마라."

한숨을 내쉬었다.

"칠판에 발로 글씨를 어떻게 써요. 체육 선생님은 그렇게 쓰면 오히려 더 묘기 점수를 받는 거 아녜요?"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해볼까?"

농담이니까 제발 쓸데없이 진지해지지마! 우리 둘이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교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현아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와 태근이 형은 오히려 평범하게 대하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해요. 그리고 그 일은...."

"어? 뭐가?"

현아가 태근이 형에게 사과를 하자 형은 시치미를 딱 뗀다.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능글맞은 구석도 꽤 있다.

"저기... 그게 그러니까요...."

현아가 우물쭈물하며 말하려고 하는데 태근이 형이 말을 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현아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니 뭐가 미안한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네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사과를 받아줄게. 근데 원래 사과는 맨 입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나한테 맛있는 거 사주면 다 용서해줄게."

형이 말하는 맛있는 거라니. 뭘까. 여태까지 형이 우리를 데려갔던 음식점들의 면면을 생각해 본다. 현아도 그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전 그렇게 비싼 건 살 돈이...."

"푸하하하. 꼭 그런데 가자는 게 아냐. 네가 좋아하는 걸로 먹으러 가자. 여태까지 난 너한테 잘 보이려고 괜히 그런 데 더 간 거야. 사실 나 입 거칠어. 아무거나 잘 먹어."

씩씩하고 거칠 게 없는 형의 말투에서 호쾌함마저 느껴졌다. 현아가 조심스럽게 메뉴를 제시한다.

"혹시, 아구찜 좋아하세요? 좀 매운데...."

"아구찜? 좋지. 오늘 바로 갈래? 한석 군. 넌 어때?"

어째 사람으로서 그런 터무니없는 음식을 먹으러 갈 생각인지 모르겠다. 손을 내저어 거부의사를 표했다. 설령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걸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지애와 약속을 잡아두었기에 갈 수도 없었다. 두 분이서 가시라고 한사코 거절하고 물러났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둘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교무실로 돌아가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수업시간이 되어 지애를 따라 교실로 올라갔다. 잘 되었다고 해야 어쩌나.... 내 첫 번째 수업은 1학년 3반, 바로 유진이와 소란이네 반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술, 가정을 맡은 최한석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해요."

허리를 숙여 인사해보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이전 같지 않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소란의 빈자리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도 이미 소문이 퍼진 걸지도 몰랐다. 나만 해도 뉴스에서 소란을 발견했을 정도이니.... 어떤 소문이 퍼져도 이상할 게 없지 싶었다. 아침에 우연히 보게 된 신문에는 해당 교회에 대한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일부러 더 선정적으로 묘사된, 여신도들에게 행해진 난잡한 행위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었다. 하긴 종로 바닥에서 그 난리를 쳐대던 교회였는데...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교탁에 서보니 바로 앞자리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소란이의 자리는 물론 유진이의 자리도 비어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에도 결석한 그 녀석의 출결 란에는 "친척 장례식 참석"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때는 깊게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왠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친척이라니... 유진에게 친척이 있었던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날 바라보고 있는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교과서 80페이지를 펴주세요. 발명과 기술의 이해....항목을 여러분께 설명하겠습니다."

몇 주간 열심히 짜놓은 교안대로 수업을 진행해갔다. 말은 좀 떨렸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교실 뒤편에 서 있는 지애와 또 다른 평가 담당 선생의 눈빛이 날카롭다.

"그럼... 간단한 도표를 그려 이 내용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분필을 손에 들고 칠판에 도표를 그렸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래도 교안에 적힌 대로, 실수하지 않고 수업을 계속해 나갔다. 잘 한 건가 싶었다. 확신이 없었다. 간신히 첫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섰을 때 지애가 등을 두드리며 잘 했다고 하는 걸 보아 그리 나쁘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끝나고 지애와 나는 같이 퇴근했다. 학교 뒤쪽 길로 태근이 형과 현아가 함께 걸어가는 게 보였다.

"뭐해요? 얼른 타요."

"아, 네."

지애의 차에 올라탔다. 학교를 빠져나가면서 지애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인지 말해 줄게."

"네."

"아침에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경찰서에는 이미 다녀왔고, 조사 내용도 전해 들었어. 그래서 지금 가는 곳은 경찰병원이야."

"아..... 그렇군요."

어제 가려다 못 간 일이 생각났다. 이제서야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우리 둘은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계속 갔다. 잠시 후, 병원에 도착해서 차를 대놓고 안에 들어갔다. 접수처는 평범한 병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오셨죠?"

"저기.... 종로서에서 연락 받고 왔는데요, 신원 확인요청으로...."

"환자 이름이요?"

"양소란이라고 합니다."

지애가 접수하고 있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했다. 다급하게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그런데 등 뒤에서 들려온 지애의 비명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접수처 직원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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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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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약 120회 정도에서 1회차 엔딩이 마무리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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